차범근, 영웅의 일

차범근은 시대와 환경의 압력을 몸과 재능으로 이겨냈다. ‘분데스리가 레전드’로 선정된 차범근이 자신의 축구 인생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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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분데스리가 홍보대사가 되었나요?

분데스리가가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케팅이 좀 빈약해서 세계적으로 덜 알려졌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가 유명하지만, 독일은 2014년 월드컵 우승이나 기타 성적을 통해 리그 조직이 건강하다는 게 확인되었지. 분데스리가는 이 리그를 더 알리기 위한 일환으로 레전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어. 나는 분데스리가가 좋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홍보대사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고. 더 나아가 지금은 한국 축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변화가 더디기도 하고. 독일의 좋은 시스템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한국 축구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독일 시스템은 어떻게 더 좋은가요?

축구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프로그램에 들어가. 좋은 시스템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거야. 리그 조직이 잘되어 있다는 이야기지. 아이들 팀이 지역 리그를 통해서 7살부터 2살 간격으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쭉 올라가.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가 청소년의 마지막 과정이고. 이렇게 아이들이 체계적으로 시합하면서 커나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어.

유럽의 다른 리그보다 뛰어난 건가요?

유소년 센터를 만들어 아이들을 키우는 조직화된 구조로는 독일이 세계적으로도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지. 거기서 좋은 선수들이 나와서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그 선수들도 한국 운동부 학생들처럼 공부는 안 하나요?

독일은 무조건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를 해야 돼. 고등학교를 마치면 인문계는 대학을 가지만 나머지는 직업을 하나씩 선택해서 졸업을 하게 되어 있어. 고등학교를 마치면 사회에 나가서 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까 축구를 더 하고 싶은 사람은 프로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직업을 가지면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를 하고.

아마추어라면 즐기는 축구를 하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단순히 즐기는 게 아니고 선수 활동을 하면서 직업을 갖고 있어. 전에는 수입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마추어라도 돈을 조금씩 주니까 괜찮은 직업이지. 한국 축구계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 사회적으로 대학을 선호해서 대학에 가야 하니까. 어느 시점엔 그게 바뀌었으면 하지만, 언젠가 축구를 그만둬야 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해서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안 되니까 그쪽으로만 강조하기도 어려운 게 한국 사정이야. 독일 시스템을 지금 통째로 들여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한국에서 개선해야겠지.

분데스리가 타임키퍼인 태그호이어는 ‘Don’t Crack Under Pressure’, 즉 압력에 꺾이지 말라는 슬로건이 있어요. 차범근 감독님은 열악한 당시 환경을 떠나 분데스리가에서 성공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하는 동안 여러 종류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가장 큰 압력이나 고통으로 기억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축구뿐 아니라 어느 분야든 새로운 걸 시도하면 마찰과 부작용이 있지. 축구 같은 경우에는 (차범근 전까지는) 아무도 유럽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걸 시도하면 시간도 걸리고 오해도 샀어. 그건 당연히 따라오는 거지.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게 축구 교실이었어. 한국 축구의 시스템에 새로운 걸 도입해서 혁신을 추구하자는 거였지.

축구 교실도 차범근에게는 새로운 시도였나요?

그 전에는 한국 축구 선수들이 공부를 안 하고 축구만 했어. 유럽은 공부를 한다고. 내가 봤을 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 축구에 앞날이나 비전이 없어. 그냥 축구만 시키면 그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거야.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유럽식으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서 축구를 해야 축구 선수가 안 되어도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서도 축구계에 종사할 수 있는 자원이 만들어질 텐데, 내가 볼 때는 암울했지. 누구도 시도할 수 없었고. 그런데 나는 유럽에서 경험을 했고, 봤고, 그래서 시도한 거지 뭐. 지금은 축구 교실 숫자와 초등학교 축구부 숫자가 비슷해.

압력은 없었습니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걸 할 때는 필연적으로 굉장한 압력이 있어. 축구 교실을 처음 열었던 때 다른 지도자들은 자기들 밥그릇 빼앗기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어. 그건 아니야. 축구가 더 잘되게 하려고 한 거거든. 조금 더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했는데 그런 부분에서 이해를 못 한 사람들이 있었지. 27년 전 이야기니까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 축구는 변화에 상당히 더뎌서 오늘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

남들이 안 하는 걸 했는데 고통스럽지는 않았나요?

나는 사명이라고 생각했어. 하도 주변에서 뭐라고 하니까 ‘내가 10년, 15년 후에 샘플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지. 그 시간이 필요했어. 애들이 클 때까지. 그래서 5, 6살 유치원생부터 시작하는 축구 교실을 만들었어. 우리 아들이 1기고. 그중 잘하는 애들을 중학교 2개와 고등학교 1개로 보내고 수원대학교까지 보낸다는 샘플을 보여줬어. 그 샘플대로 프로 팀이 팀을 만들어가고 있고. 축구 교실을 하면서 내가 계속 이야기했어. “우리 축구 교실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 축구는 방과 후에 해야 된다. 아이들에게 맞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돈을 너무 많이 걷으면 안 된다. 애들을 때리면 안 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다음 문체부에서 공문이 내려왔어. 모든 초·중·고·대학교가 학기 중이 아니라 방학 기간에 축구 대회를 하라고. 그래서 유소년 축구가 리그제로 전환됐어요. 유럽처럼 확실한 리그제가 안 되어 있긴 하지만, 그때는 완전히 아무 때나 시합 나가고 학생들이 공부도 안 하던 때니까. 그때 나는 그 자체에 감격했어.

세상을 바꾸셨네요.

그동안 내가 말했던 모델의 샘플도 프로 팀에게 보여줬고. 지금은 대부분의 프로 팀이 특정 학교와 약정을 맺고 지원을 해줘. 공부는 학교에서 시키고 운동은 클럽에서 시키는 식으로. 내가 말한 대로 15년이 됐을 때의 모델을 보여주고 더 운영하다가 그걸 다 떼서 줬어. 우리는 더 중요한 유소년 축구에 집중해야 하고 내가 거기에 사명이 있으니까. 사람들을 설득할 때는 부작용도 많고 계속 설명을 해야 했어. 일할 때마다 구단에게 돈 받아 써야 하고. 하루에 지역구 다 돌면서 말단 직원에게 축구 교실을 운영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정말 힘들었지.

이 일을 비롯해서 한국 축구계로 돌아와서 여러 고초를 겪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걸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돌아온 건 후회한 적이 없고.

후회할 법도 한데요.

1978년에 재팬 컵에 출전하러 갔더니 일본 아이들이 잔디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어. 슬로건은 ‘타도 한국’. 그때 한국에서는 대학 대표 선수들이 맨땅에서 축구를 할 때였는데. 우리는 대표팀이 돼도 잔디를 못 밟는데 일본은 초등학생들이 잔디에서 축구를 했단 말이지. 충격이었어. 그 아이들이 ‘타도 한국’을 슬로건 삼아 축구를 했을 때 10년, 20년 후에는 한국이 질 것 같았지. 지금 거의 그런 상황이잖아. 그걸 보면서 축구 교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1978년도부터 말씀입니까?

그렇지. 1978년 말에 독일에 갔어. 거기서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됐는데, 공에 대한 적응력은 아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공을 갖고 놀았을 때만 생긴다는 거야. 공에 대한 감각이라는 건, 우리가 골프를 배울 때 성인이 돼서 배우면 폼이 안 나잖아. 어렸을 때부터 계속하면 감도 생기고 폼도 유연하잖아. 같은 얘기지. 게다가 어려서 공을 안 만져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려서 공을 만졌던 사람의 감을 얻을 수 없는 거야. 그건 훈련으로 얻을 수 없다는 거야.

독일에서 선수를 할 때부터 지금 같은 삶을 생각한 거군요.

내가 독일에 갈 때 한국은 중요한 고비에서 월드컵과 올림픽에 다 실패했어. 그때마다 언론에게 엄청 깨졌잖아. 난 ‘우리는 왜 이러나’ 생각했지. 그래서 독일을 꿈꾸게 됐고, 그래서 갔고. 가 있을 때 배워야 했지. 거기서 공부하다 알게 된 거지. 한국 축구가 업그레이드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아이들이 어려서 축구를 해야 된다는 걸. 그래서 축구 교실이 시작된 거야.

사명감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축구팀 숫자의 반은 축구 교실이 차지하고 있지. 엄청난 숫자야. 엄청난 변화지. 한 사람이 (유소년 축구 발전을) 사명으로 알고 투자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나를 생각했을 때 가족들은 독일에 남길 원했지. 독일에서 코치 등의 권유도 있었고. 하지만 나는 사명 때문에 돌아온 거고 그걸 절대 후회하지는 않아. 1998년에 그런 게(월드컵 예선 중 감독 경질) 있었지만 사명을 가진 사람은 환경 때문에 가야 할 길을 포기하고 그런 게 아니잖아. 사명을 갖고 가도 다들 ‘죽일 놈’ 했지만 나는 축구장에 갔지.

차범근 축구 교실을 계속하셨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는데 그 눈이 녹고 나서 얼어요. 그러면 꼬마들 축구하는데 넘어지니까 안 다치게 하려면 누가 깨줘야 되잖아. 내가 오전에 그 얼음을 깨니까 어떤 학부모가 사진을 찍어서 올렸더라고. 나중에 보니까 나도 뭉클하더라고. 그렇게 욕을 먹고 있는데 나는 운동장에 내려가서 애들 다칠까 봐 그걸 깨고 있는 모습이. 내가 왜 저러고 있나 싶고.

레전드인데.

생각해보면 한국 축구가 위기일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그걸 들어준 것밖에 없잖아. 그래서 월드컵 예선을 기가 막히게 통과해서 우리는 최종 예선 두 경기 전에 이미 본선 진출을 끝냈고. 그랬지만 어쨌든 아이들이 다치지는 않아야 하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느꼈어. 이게 내 사명이구나. 좋든 싫든 해야 되는 내 사명인 거지.

어린 시절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을까요?

우리 때는 운동화라는 게 없었어. 운동화 사서 몇 번 신으면 다 갈라졌는데 1년에 그거 한 번 사기도 어려웠어. 맨발로 축구했지. 돌멩이 있는 맨땅에서. 공이 어디 있어. 지푸라기나 뭐 이런 걸 말아서 엮거나, 동네에 돼지 같은 거 잡으면 오줌보가 나와. 아니면 옛날엔 배급 나오던 밀가루를 담았던 천이 있었어. 오줌보나 그 천을 찢어서 감아서 차고 다녔어. 그렇게 했지.

그러던 소년이 독일에 가서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되었네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나요?

축구에 소질이 있었지. 어릴 때는 워낙 가난하니까 누구를 공부시킬지 선택해야 했어. 형이 둘인데 큰형은 공부해서 대학교까지 갔어. 나는 축구에 소질이 있었는데 대줄 형편은 안 됐고. 축구를 하게 하려고 병아리를 키워서 계란을 먹게 하는 정도는 해줬지. 너무 가난하니까 축구를 하는 것 말고는 미래가 없었어. 농사짓는 건 힘들고 싫으니까 나는 축구를 하겠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민첩하고 동네 아이들보다는 축구를 잘하니까 이리로 가겠다.

수원에서.

수원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지. 수원에 가려면 하루 세 번 오는 버스를 타야 했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옮겨주는 것까지는 아버님께서 해주셨지. 좋은 땅을 비싸게 팔아서 조금 싼 땅으로 갔어. 그 차액을 전학비로 지원해준 게 마지막이었어. 거기서 성공을 못 했으면 안 됐는데, 그게 성공해서 축구하는 학교로 가게 됐지.

그 가난한 옛날에 독일에 갈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일요일 10시 반이면 분데스리가 축구를 보여줬어. 그걸 보며 꿈을 가졌지. 잘돼서 저기 한번 가고 싶다. 유니폼도 멋있고 축구도 잘하니까. 갈 수 있는 길은 없었어. 우리는 삼류고 저기는 일류니까. 1978년에 축구 대회 박스컵(Park’sCup,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을 할 때 슐트라는 독일 프로 팀 코치가 대회에 참가하면서 나를 본 거야. 그 사람이 독일로 돌아가서 “한국에 (차범근이라는) 이런 선수가 있다. 충분히 뛸 수 있는 선수다” 이렇게 소개해줘서 일이 추진됐지.

독일 진출에서부터 마찰이랄까, 압력이 있었잖아요.

그렇지. 당시에는 “가면 역적이다”라면서 반대했지. 그만큼 우리가 덜 깨어 있었던 거지 뭐.

그런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갔던 이유는 호기심이었나요? 더 높은 곳이 궁금하다는?

그렇지. 7년 정도 국가대표 선수를 다 해보고 우승 다 하고 더 이상 비전이 없잖아. 상위 리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시아 최고 선수고. 유럽은 너무 높다고 생각해서 꿈도 못 꾸고 있고. TV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 길이 열리니까 갑작스레 간 거지.

그때 신혼이었죠.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의 반대는 없었나요?

결혼해서 1년쯤 됐을 때였어. 그때 250만원을 빌려서 강남구청에 있는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어. 허허벌판에 딱 그 아파트 하나만 있었어. 전세금도 빌려서 결혼한 상황이니까 외국 가서 뭘 할 형편이 안 됐지. 아내는 내가 군대에 가 있을 때 피아노 레슨으로 돈을 좀 벌어서 제대할 때쯤 17평짜리 아파트를 27평짜리로 간신히 늘려놓았어. 그게 내 재산 전부였지. 그런데 내가 하도 독일에 가고 싶어서 고민하니까 아내가 그러더군. ‘한번 가봐라. 내가 이 아파트 팔아서 1년 동안 대줄 테니까. 그 1년 동안 벤치 멤버에서 벗어나라. 주전으로 들어가라.’ 안 되면 포기하고 돌아와서 다른 일을 해야 했고, 나는 살아야 되니까 가서 성공해야 했지.

그런데 성공했죠. UEFA 컵에서도 우승하고.

당시는 독일이 최강이었어. 프랑크푸르트 공격은 나고 바이에른 뮌헨 공격은 루메니게, 함부르크 공격은 케빈 키건. 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야.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거지. 젊은 친구들이 옛날 걸 폄하하기도 하지만 당시 성적이 말해주는 거니까. 지금 챔피언스 리그 시스템이 옛날 유럽축구연맹(UEFA)컵 시스템이었어. 지금은 32강부터 조 리그를 하지만 당시에는 홈 앤드 어웨이 토너먼트였어. 그때는 지면 1회전 탈락이었어. UEFA컵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야. 시스템 구조상. 난 그걸 두 번 한 거지.

1980년대에 동북아시아인이 세계 수준의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건데, 억울했을 것 같기도 해요.

독일 사람들은 대단한 걸 아는데 한국은 모르니까 폄하해. 나도 처음에 그 상이 그렇게 큰 건지 몰랐어. 그걸 지금 자꾸 말하면 뭐 하겠어. 시대가 바뀌었는데.

축구인으로 평생을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요?

독일을 선택한 것. 젊었으니까 용기를 내서 독일에 진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 그다음 돌아와서는 어쨌든 접목을 해야 하니까 축구 교실과 축구상을 만든 것. 축구상도 내년이 30주년이야. 한국 축구의 미래가 이 상을 받은 친구들에게서 나왔으면 했지. 축구 스타가 있어야 하니까.

차범근 축구상을 받은 선수 중에서 실제로 축구 스타가 많이 나왔죠.

그 어린 선수들이 프로 팀에 가니까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지.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야.

한국에 선진 축구를 알린 것 말씀이시죠.

알리고 접목시킨 것. 사실은 더 체계화했어야 했는데 그건 못 했지. 축구 교실의 샘플을 던졌을 때, 일본은 그 시스템을 다 적용해서 초등학교부터 시작하는 유소년 축구 육성 모델을 만들었어. 우리는 그걸 못 했어.

왜였을까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협회에서 주도적으로 (육성 모델을 만들어서) 밀고 갔어야지.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어느 시대의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이니까. 30년 전과 지금은 차이가 있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기 때문에 더 잘해야지.

30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세요?

나아졌지. 잔디에서 축구를 하잖아. 세계 축구랑도 가까워졌고. 옛날에는 유럽 사람과 축구를 하면 다리가 땅에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어. 위축되니까.

요즘에는 유럽에서 뛰는 선수도 많이 있는데 말예요.

그리고 그 선수의 경기를 안방에서 다 보잖아. 우리는 그때 유럽 축구를 보기조차 어려웠지.

상대했던 선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입니까?

칼하인츠 푀르스터. 나를 마크했으니까.(웃음) 슈트트가르트 소속에 독일 국가대표였는데 독일에서 가장 거친 수비수였어. 나를 만나면 맨투맨으로 항상 따라다녔고. 야콥스라는 맨투맨 수비수도 있었어. 정강이에 상처 나면 다 걔네들 때문이야. 지금은 공간 수비를 하지만 그때는 잘하는 선수들을 따라다녔거든. 그걸 벗기기가 되게 힘들어. 그런데 독일 국가대표 맨투맨 수비수가 나를 따라다니는데 힘들지. 그렇게 따라다녀도 걔네들을 벗기고 내가 골을 넣으니까 걔네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1990년에 쓴 에세이집에서 ‘축구는 80%의 머리와 20%의 발’이라고 했어요. 축구를 잘하려면 전략적으로 생각해야 하나요?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의 차이는 그다음 상황을 얼마나 잘 준비하느냐에 있어. 순간적이지만 공을 받기 위해서, 혹은 공이 없을 때 어떤 동작을 하느냐에서부터 차이가 나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경기를 하면서 그냥 깨달을 순 없잖아. 내가 골을 넣으려면 내가 지금 골을 넣는 위치에 있는지, 내가 볼을 받을 위치에 있는지, 나를 따라오는 수비를 어떻게 따돌려야 하는지를 계속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해. 그런데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수비수도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고 있잖아. 그러면 또 변화를 줘야 하고. 생각이 없는 선수가 잘 못한다는 건 다음 상황에 대한 준비가 없다는 뜻이야. 생각이 많고 영리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먹히니까. 순간적으로 움직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거니까. 내가 공간에 들어갈 때 조금만 이르면 오프사이드에 걸려. 그걸 피해서 들어가는 순간에 맞춰서 동료가 공을 잘 줘야 하고, 내가 수비를 떨어뜨리고 들어가는 순간에 공을 받아야 해. 그건 쉬운 게 아니지. 공격수들의 머리 수 싸움은 아주 예민하고 빨라야지.

인간의 한계는 정해집니까, 아니면 노력을 통해 달라질 수도 있습니까?

일단 타고나지. 타고난 걸 발전시키면 커질 수도 있고, 발전시키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그런데 좋은 자질은 타고나지.

차붐은 무엇을 타고났습니까?

일종의 소질도 타고났고, 후천적인 노력도 있지.

노력하는 끈기도 재능의 일부입니까?

인간 성품의 일부지. 어떤 사람은 인내심이 부족하니까. 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고. 한국 사람들은 인내와 끈기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축구를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니까.

분데스리가를 더 재미있게 보려면 어떤 부분을 챙겨 봐야 할까요?

분데스리가의 평균 관객이 4만1500명이야. 프리미어 리그나 다른 리그보다도 많아. 축구가 그렇게 인기가 있다는 건 그 안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장점이 있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막연하게 보거나 가끔 보면 재미가 없지. 한국 선수가 있는 팀이든 바이에른 뮌헨이든 어딘가를 정해서 자꾸 보다 보면 독일 축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 특히 독일 축구는 어린 선수를 키우는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서 어린 선수들이 너무 좋아. 최근 20년 동안 유소년을 가장 잘 키웠고, 잘 큰 어린 선수들이 가장 많고, 그 선수들이 팀에 들어가 있어. 그 어린 선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력을 느껴서 빠져들 수 있어.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선수를 정해서 눈여겨보다 보면 재미를 느끼고 빠져들 수 있을 거야. 독일 축구에 팬이 많은 게 다른 나라의 축구처럼 화려한 요소가 많아서는 아닌 것 같아. 기본적인 게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팬들이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해.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여러 문제가 노출됐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지금처럼 가면 안 된다는 거야. 시대가 바뀌었어. 새 시대인데.

가장 작고 구체적으로 변해야 하는 건 뭘까요?

생각을 바꿔야지. 내가 처음에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것과 똑같아. 경험하지 못했다면 모를 수도 있지.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고 축구가 바뀌고 있는데 맨날 옛날 방식을 쓴다면 도태되지. 지금 새로운 것이 얼마나 많이 나와. 매 순간 바뀌고, 몇 달 지나면 새로운 게 나오는데. 만약 옛날 방법에 맞춰서 시스템이 돌아간다면 바꿔야지. 옛날 방식으로 대표 선수를 뽑으면 안 되지. 다른 게 바뀌면 거기 맞춰야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입니까?

뭐, 축구한 게 가장 잘한 거고, 우리 마누라랑 결혼 잘했지.

독일에 계실 때도 스위스 시계는 고급품이었나요?

스위스 시계가 제일 유명했지. 선수 때 샀던 스위스 시계가 아직도 있어. 시계 하면 스위스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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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KWAK G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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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with TAG HE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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