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은 투명하다

조정석은 강요하지 않는다. 늘 물처럼 자연스럽게 객석을 웃음과 눈물로 뒤덮는다.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회색 줄무늬 슈트 162만원 라르디니 by 샌프란시스코 마켓. 헤링본 베스트, 남색 체크 셔츠, 회색 타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형>은 아주 작정을 하고 못된 영화였다. 노골적이랄까, 뻔뻔하달까. 시작할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뭔지 다 알겠는데 끝내 빠지고 마는 함정 같았다. 조정석은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 영화 한가운데서 객석을 감정의 절벽으로 은근히, 때론 강렬하게 이끌었다.

국가 대표 유도 선수였지만 사고로 시력을 잃고 식음을 전폐한 동생을 볼모로 가석방된 사기꾼 역이었다. 동생을 보살필 마음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동생한테도 사기를 쳐서 아우디부터 사는 마당에, 영화 초반의 조정석은 못되면 못될수록 좋았다. 그래야 드라마가 생기니까. 조정석이 말했다.

“처음 집에 딱 들어와서, 제가 슈퍼에서 뭘 사 왔는데 두영이가 생라면을 부숴 먹고 있었죠. 제 소리를 듣고 방에 들어가다가 식탁에 걸려서 넘어지잖아요. 제가 ‘뭐 하냐?’ 하고 돌아가려는데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려는 걸 잡아줬는데 뿌리치는 그 장면 좋아해요.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제 연기도 마음에 들었어요. 흘러가듯 보셨을지 모르지만요.”

아픈 장면이었다. 우직하게 울리는 게 아니라 쿡 찌르고 가는 신이었다. <형>은 의도가 명확한데 끝내 그 의도를 달성해내는 뻔뻔함 때문에 못된 영화였다. 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관객으로서 ‘에이, 영화 참 못됐네’ 하고 싶은, 일종의 투정이라는 뜻이다.

웃기고 싶을 때 웃기고, 울리고 싶을 때 울도록 권유하는 영화. 이런 감정, 가끔은 괜찮지 않느냐고 툭 치고 웃는 영화. 2시간도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눈앞이 캄캄하기도 하고 가슴이 저릿하기도 하다 결국 ‘흡’ 하고 눈물을 참으면서 ‘내가 왜 이걸 보면서 우는 거지?’ 싶은 영화.

“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걸 실제로 느끼게 만드는 게 연기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연기라 생각하고 하면, 왜 우리 그런 말 하잖아요? ‘연기하고 있네.’ 이 말은 ‘거짓말하고 있네’라는 뜻이잖아요? 그런 말 별로 안 좋아해요. 배우는 투명해야 되거든요.”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회색 체크무늬 재킷 175만원, 바지 86만원 모두 닐 바렛. 핑크 PK 니트 톱 73만원 J.W. 앤더슨 by 무이. 첼시 부츠 130만원 생 로랑. 시계 가격 미정 IWC. 베스트, 머플러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벨벳 재킷 99만원, 블랙 니트 49만9000원, 체크무늬 셔츠 14만9000원 모두 폴로 랄프 로렌. 니트 타이, 타이 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무리 억지스러운 장면에서도 조정석의 연기에는 위화감이 없다.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랬다.

그 유명한 ‘납득이’는 이제 유일무이한 캐릭터가 되었다. 가장 최근의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리를 지르면서 세상 못되게 굴거나 토라지거나 눙칠 때도 아주 녹듯이 그 안에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대사.

“얘가 얼마나 나한테 과분한 앤데. 엄마가 몰라서 그래, 엄마 아들 얼마나 시시한 줄 알아? 요즘에 회사 그만두려고 맨날 사표 내는 백수에다가 유방암에 (중략) 나 이제 행복하게 해주는 데 부족한 남자야. 갈비탕 싫어? 갈비탕 싫으면 엄마도 오지 마, 결혼식.”

말은 못됐는데 마음은 밉지 않고, 산뜻한 상황은 아닌데 결국 웃기고 마는 장면이 <질투의 화신>에는 수두룩했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다른 걸 잊는 일이야말로 TV 앞에서 시간을 할애하는 가치이고, 조정석이라서 가능한 시간이었다. 물론 공효진과의 조화도.

“저는 호흡을 중요하게 여겨요. 공기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미묘한 감정, 디테일한 감정의 공기를 형성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요. 이번엔 너무 좋았죠.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이것저것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서로 주고받는 게 되니까.”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남색 줄무늬 재킷 238만원, 바지 98만원 모두 비비안 웨스트우드. 체크 셔츠 8만8000원 에스타도. 포켓스퀘어, 구두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검은색 재킷 179만8000원, 바지 69만8000원 모두 김서룡. 첼시 부츠 130만원 생 로랑. 시계 가격 미정 IWC. 화이트 셔츠, 니트 베스트, 양말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정석이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려고 3수를 하다가 서울예대에 입학했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처음으로 등교하는 날 정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던 기억이 있다.

“오케이, 이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난 죽었어, 하고 딱 들어갔거든요. 그런 마음이었어요. 뭐 하나를 해도 열심히.”

이후 2004년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부터 지금까지 주저 없이 왔다. 각오는 단단히 하면서도 긴장은 떨쳐내고, 열심히 하지만 경직되지 않고. 이런 유연함은 타고나는 걸까? 배우가 훈련을 거듭하듯이 연습으로 습득할 수 있는 걸까?

“첫 뮤지컬 주연을 맡은 <찰리 브라운>에서 너무 떨었어요. 제가 너무 떨면 연기를 못 해요. 아, 븅신 같애요 진짜. 굳이 슬럼프라고 한다면 그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선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정말 중요한데, 연기를 너무 열심히 해버리면 그 연기가 안 좋아져요. 물론 최선을 다하죠. 하지만 이 정도 마음이 들었으면 그 정도 표현하는 거예요. 느끼지 못한 걸 이만큼 크게 표현할 수는 없거든요.”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보헤미안을 꿈꾸는 모범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긴장과 이완, 해야 할 일과 즐길 일, 할 수 있는 일과 잘하는 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포기를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까스로 이완의 시기다. 드라마 촬영 막판에는 스스로를 거의 끝까지 몰아세웠다. 그건 웃음, 즐거움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오후 세 시부터 떨어지는 해를 그대로 보면서 커피를 마시거나, 누구랑 같이 걸으면서 새로운 풍경을 보거나,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 담배를 한 대 태우는 일이 너무 오래전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버거울 정도로 없으면 그게 저한테는 가장 힘든 상황이에요. 그래도 제 욕심 차리려고 갑자기 어디로 떠나거나 그런 건 안 해요. 그건 정말 배려가 없는 거죠. 정신력,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차 몰고 강원도 쪽으로 가다가 국도로 바뀌는 곳이 있어요. 거길 쭉 달리고 싶어요. 거기 정말 좋아요.”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슈트 가격 미정 꼬르넬리아니. 회색 울 니트 19만8000원 할리 오브 스코틀랜드 by 바버샵. 흰색 셔츠, 포켓스퀘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정석은 투명하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코듀로이 슈트 177만원 라르디니 by 샌프란시스코 마켓. 셔츠, 타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떤 배우는 빈틈없이 계산하고 숨 쉴 틈도 없는 연기를 한다. 한편에는 잘 노는 일이야말로 어떤 경지라고 노래하듯 연기하는 배우도 있다. 백 명의 배우가 있다면 백 가지 연기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 조정석은 이렇게 생각한다.

“누가 물어봤어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 ‘배우는 잘 놀 줄 아는 철학자’라고. 공부, 해야죠. 열심히 분석하고 생각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머리를 이만큼 키워놨으면 연기할 때는 심플하게. 그게 제 생각이에요.”

다 내려놓은 것같이 그늘도 욕심도 없는 얼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은 심지, 춤을 추는지 걷는지 잘 모르겠는 흥. 조정석한테는 긴장과 이완이 같은 비율로 섞여 있다. 모범생과 한량이 한 몸에 있다.

“세상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싶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말과 “크리스마스에는 시간을 선물 받고 싶다”는 말 사이에는 또 어떤 조정석이 있을까? 헤어지기 전에, 조정석이 아무 계산도 머뭇거림도 없이 말했다.

“멋있고 멋지고 의리 있는 거 다 떠나서 그냥 지금처럼, 살아왔던 대로 살다 보면 좋은 남자가 돼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좋은 남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날의 날씨가 계절을 정의하듯, 때론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정의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연기할 땐 침착하게 감정을 맡길 수 있다. 슬플 땐 울고 웃길 땐 웃으면서, 완벽하게 이완한 채 기꺼이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다.

조정석은 그런 배우니까.

경계도 계산도 없이 마냥 선선하고 투명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