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은 의심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제훈은 그렇게 스스로를 책임진다.

이제훈 - 에스콰이어

터틀넥, 바지 모두 하이더 아커만.

민용준(이하 민) 얼마 전 <삼시세끼>에 출연했다. 붙임성이 좋아 보이더라.

이제훈(이하 이) 연기할 때는 스스로 많은 집중을 요하다 보니 주위에 있는 스태프들도 덩달아 긴장시킬 정도로 예민한데, 평소에는 신경 쓰는 것 없이 다 내려놓는다. 그리고 <삼시세끼>는 대본도 없이 촬영하면서 그저 함께 어우러져 맛있는 밥 한 끼 해 먹는 식이라 편했다.

민_예능에서 보기 힘든 배우라고 여겨서 의외의 출연처럼 보였다.

이_작년에 tvN 10주년 기념 시상식에서 상을 하나 받았는데 시상자가 나영석 PD였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길에 프로그램에 한번 출연해달라고 하셨는데, PD님의 예능을 즐겨 보던 편이라 긍정적인 의사를 전했더니 이번에 불러주셨다. 고민하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민_이러다 <꽃보다 청춘> 섭외까지 들어오는 거 아닌가?(웃음)

이_사실 여행하는 걸 좋아해서 한번 나가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또래 친구들과 우애도 다질 수 있고, 기회가 되면 해볼 만할 거 같다.

이제훈 - 에스콰이어

롱 코트, 터틀넥, 바지 모두 발리. 구두 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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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재킷 살바토레 페라가모. 티셔츠 톰 포드.

민_<아이 캔 스피크>는 <건축학개론>을 제작한 명필름에서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이런 사실이 작품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이_지난해 9월부터 쉬지 않고 <내일 그대와>와 <박열>을 연이어 촬영했던 터라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님이 제안해서 받아들인 것도 있다. 사실 <아이 캔 스피크>는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을 다루는 영화라 역사적 의미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택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가볍게 느껴지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길 바랐는데 심재명 대표님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마음이 느껴져 참여를 결정했다.

민_<아이 캔 스피크>에서 연기한 민재는 여느 동사무소에 앉아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인데, 그런 평범함을 연기한다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잡히지 않는 공기를 쥐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_일단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접근해서 연기하고 싶었다. 다만 외모에 관해선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도 봤을 법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건 아닐까? 반듯한 이미지이지만 옥분이라는 사람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로 보일까? 깐깐해 보이고, 융통성 없어 보일까? 그래서 옷 입는 스타일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안경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짚어가며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제작진은 좀 더 멋있는 인물을 원했던 거 같지만 나는 오히려 심심해 보이고 정형화된 이미지가 영화 속의 민재와 맞다고 생각했고, 그런 부분을 최대한 피력해야 한다고 느꼈다.

민_<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어쩌다 보니 <박열>에 이어 또 한번 일제강점기 역사와 관련 있는 작품에 출연했다.

이_어찌 보면 <박열>이 <아이 캔 스피크>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도 같다. 배우란 대중에게 희로애락을 전달하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전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매개가 된다면 보다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어떤 자세로 작품을 바라보고 선택해야 하는지도 좀 더 명확해진 것 같고. 다만 누군가에겐 아픈 이야기일 수 있으니 좀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접근해서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어떤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거나, 이런 식으로 해소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것 같다. 덕분에 이런 과정 자체가 인생을 배워나가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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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셔츠 모두 디올 옴므.

민_민재는 9급 공무원에서 7급 공무원으로 진급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 그렇게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은 그를 7급 공무원으로 만들기 이전에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가치관을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동한다. 애초에 배우 이제훈에게도 연기란 원하는 인생을 실현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 배우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게 됐다. 이제훈도 민재처럼 달라진 걸까?

이_연기를 시작한 건 사람들이 내가 표현하고 발산하는 것을 보고 기뻐해주고 감동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연기란 그런 바람을 이루는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지 메시지에 집중하게 된다. 단순히 액션이나 서스펜스로서의 재미로도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을 확장시키는 것 역시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민_언제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도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에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이_일을 한다는 건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본다. 선택하기 전까진 많은 고민이 따라오겠지만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선택한 부분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지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기지 말자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의 조언을 들을 순 있지만 결국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니 내 선택의 결과가 환호가 되든 비난이 되든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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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톱, 셔츠, 바지, 스니커즈 모두 루이비통.

민_<아이 캔 스피크>에서 정말 많이 등장하는 ‘How are you?’는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문턱 같은 문장이다. 연기를 접하면서 배우로서 문턱을 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_스물두 살 때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를 졸라 캠코더를 하나 샀다. 셀프 카메라로 습작 같은 걸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촬영한 내 모습을 보고 정말 실망했다. ‘아무래도 연기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많이 질문했는데 실망이 커서 빨리 접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처참하고 비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으니까.

민_그럼에도 결국 연기를 선택했고, 배우가 됐다.

이_뭔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계속 습작을 만들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많았지만 콤플렉스를 극복하듯이 스스로를 견디는 시간이 있었다. 만약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그 이전에는 지지부진하고 힘든 시간을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로 끌고 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민_그렇게 배우가 되니까 예상대로 만족스럽던가?

이_처음에는 주연배우로서의 모습이 각인되면 끝난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새로운 작품 안에서 매번 나라는 사람을 캐릭터로서 설득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아직까지도 팽배하다. 항상 나를 더욱 긴장시키고 집중하게 만들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보다 여유로워진 측면도 있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 같다.

민_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해 보이는데 당연히 그런 자신이 괴롭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 같다.

이_괴롭지. 그럼에도 내가 연기를 한다는 건 결국 대중이 평가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고, 여전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굴리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인 거 같다.

민_캠코더로 촬영한 셀프 카메라가 연기의 문턱을 넘는 계기가 됐다고 하지만, 반대로는 문턱을 넘지 않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문턱을 넘어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 다른 근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이_궁극적으론 영화가 너무 좋아서였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에는 하루에 한 편 이상 영화를 봤다. 영화를 통해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채워지는 게 행복했다. 연기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영원히 영화는 봤을 거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나를 일깨워준 것 같다. 한번 도전해보라고.

민_그렇다면 감독이나 현장 스태프가 되고 싶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배우였을까?

이_주로 인물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캐릭터가 보여주는 감정과 표현에 굉장한 희열을 느꼈는데, 언젠가 저런 희열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내 인생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 배우로서 연기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획이나 제작 혹은 스태프나 감독의 영역까지도 관심을 갖고 해당 분야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낼 수 있는 시너지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는 것 같다. 그럼 언젠가 내가 작품을 기획하거나 제작할 수도 있을 테고, 좀 더 실력을 닦아서 연출할 수 있는 기회도 꿈꾸게 되는 것 같다.

이제훈 - 에스콰이어

스퀘어 네크라인 셔츠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

민_언젠가 작품을 만들 날이 올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_맞다. 물론 당장은 아니고.(웃음)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쨌든 배우로서도 아직 부족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을 규정하는 건 조금 어리석게 느껴진다. 만약 <아이 캔 스피크>에 일조할 수 있다면 스태프로 참여했다 해도 만족했을 것 같다.

민_나문희 씨는 지금까지 함께 주연을 맡았던 배우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연기해온 배우였을 거다.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이_아무래도 대배우와 연기한다는 부담감과 조심스러움이 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너무 편안한 인상이라 그냥 녹아들었다. 어차피 자식이나 손자가 있을 테니 아들이나 손자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분량이 없어도 선생님 옆에 계속 붙어 있으면서 시답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평소에 뭘 하시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드시는지, 그렇게 계속 지켜봤다. 결국 민재를 잘 연기한다기보다는 선생님께서 주시는 걸 잘 받고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민_민재는 본래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상 9급 공무원이 된다. 그런 민재와 반대로 이제훈은 2년간 다니던 공대를 자퇴하고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연기를 선택했다. 그런 면에서는 민재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_음, 듣고 보니 그렇다. 민재는 부모님이 안 계시고, 동생을 책임져야 하기에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내가 배우의 길을 선택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후회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웃음) 그래서 충분한 고민 끝에 결정했다. 그리고 민재도 삶의 안정을 위해 공무원을 선택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을까 싶다.

민_혹시 본인의 선택을 한 번이라도 의심해본 적은 없었나?

이_없었다. 물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연기를 선택하면 후회하지 않을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단편영화에 출연하거나 대학로 연극 무대에도 서보면서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지, 이 일을 순수하게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가장 큰 걸림돌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배우로서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을까?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진 않을까? 이런 질문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길을 밟지 않으면 인생 자체가 무의미할 거란 답을 얻었다. 결국 한예종에 들어가 기초적인 연기를 배우면서도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됐는데 지금까지도 그렇다. 어쩌면 배우란 끊임없이 뭔가를 발견하고 창조한다는 점에서 결국 완성될 수 없는 일을 하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민_단편적으로 보자면 과감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스스로를 검증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 이후에 택한 길이었던 것 같다.

이_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려 했는데 만족스러운 부분은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스스로 감내하길 바란 것 같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고 좋아해준다 해서 기뻐하지 않았고, 스스로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훈 - 에스콰이어

셔츠 돌체&가바나. 바지 하이더 아크만. 타이 지방시.

민_혹시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이 되나?

이_일단 규칙적으로 일상을 채워나가는 일은 피했을 거 같다. 책상에서 시작해서 책상에서 끝나는 일보다는 좀 더 창작적이거나 활동적인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하게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파일럿이나 비행기 남자 승무원? 아니면 여행 가이드? 그런 것도 좋을 것 같다.

민_여행이 좋은 이유는?

이_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좋다. 그래서 긴 시간이 주어지면 주로 여행을 간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주목받는 일을 하다 보니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갖길 원하는 거 같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살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잘 모르는 무리 속에 섞여 자연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고 싶다.

민_어쩌면 배우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여행이 주는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_맞다. 결국 여행을 통해 연기할 수 있는 힘을 충전하는 것 같다. 그래야 힘든 순간도 조금이나마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 같다.

민_올해에만 두 편의 영화를 촬영했고 공개됐다. 군입대 직전인 2012년에는 네 편의 영화가 공개됐고, 드라마에도 한 편 출연한 바 있다. 끊임없이 작품에 출연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_연기가 내 인생의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연기 외에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으니까. 체력적인 부침이 있어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연기의 흐름이 끊기진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혈기왕성하게 계속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민_올해도 몇 개월 남지 않았지만 왠지 한 작품 더 촬영하자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거 같다.

이_아직 정해진 그림은 없지만 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좋은 이야기에는 언제나 참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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