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이병헌은 나무 사이를 걷거나 벤치에 머무는 시간처럼, 혼자서 산책하듯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다 어떤 순간, 표정과 표정 사이에 날카롭게 달아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병헌이 겪고 연기해온 모든 시간이 그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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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니피센트 7>에서 이병헌은 동양의 암살자 빌리 락스였다. 상대는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 개봉 전후로는 흔한 말들이 쏟아졌다.

덴절 워싱턴, 에단 호크, 크리스 프랫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이병헌이 얼마나 잘했느냐를 두고 미디어가 종횡으로 섞는 그 무수한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를 둘러싼 찬사와 뒷담화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진짜 이병헌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순간은 어떨까?

빌리 락스가 허수아비 둘을 세워놓고 농부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흐르듯 베고 춤추듯 찌르면서 말했다.

“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전혀 어렵지 않아.”

시범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기에 질려서 돌아서는 농부들의 온순한 등이 보였다.

“컴백!”

빌리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소리쳤다. 왠지, 빌리 락스의 그 뒷모습이 시원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게 이병헌 같았다.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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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는 모르겠는데, 그 순간을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주 앉은 이병헌이 말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이었던 송강호와 신하균한테 “야, 이 개새끼들아! 그냥 가면 어떡해! 가까이 오지 말라 그랬지 언제 그냥 가라 그랬어, 이 씨… 살려주세요”하고 울던 그 큰 입으로 활짝 웃으면서.

“난 쩌으기,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라니까” 말하면서 조승우 어깨를 툭 치던 익살 그대로.

“시나리오에는 ‘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한 줄로 나와 있어요. 그런데 내가 무술 감독도 아니고, 합을 짤 수도 없고, 그래서 정두홍 무술 감독님한테 도와달라고 그랬어요. 그렇게 둘이 합을 짜고 촬영하는 중에 감독이 위트를 보여주고 싶었나 봐요. 즉석에서 만들어진 신이에요. 애드리브일 수밖에 없죠. 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대사도 실은 이병헌의 농담이었다. 이병헌은 감독을 말렸다.

“현장에서 다들 막 웃었거든요, 좋아하고. 저는 리허설 때 농담하고 장난 친 거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긴 하지만 ‘이거 약간 위험하다’고 그랬어요. 중요하고 심각한 신인데, 그 대사가 신의 공기를 바꿔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산뜻한 균열이 됐다. 이병헌의 농담은 아무것도 흩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삶은 원래 그렇게, 아무리 지랄 맞아도, 툭 치고 지나가는 농담 사이에도 빛나는 순간이 있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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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서의 이병헌도 그랬다.

몇 벌의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이나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공기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지극히 순한 일상 같았다. 이병헌은 문득 나무처럼 서 있거나 초식동물처럼 걸었다. 어떨 땐 기린처럼 관조하는 것 같았다. 대체로 사슴같이 조심스럽다가 소처럼 순박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그, 팍 하고 웃는 거 있지?” 친숙한 사진가의 주문에는 핏줄이 도드라지게 웃었다. 곧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감정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럴 때, 표정과 표정 사이에, 그러니까 어떤 연기와 연기 사이의 아주 평범한 순간에 시퍼렇게 선 칼날이 살짝 보였다. 고개를 살짝 젖히면서 카메라를 모로 볼 때, 이병헌과 사진가 사이의 공기가 떨릴 틈도 없이 베였다.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모두의 표정에는 뭔가 남아 있었다. 혹은 이런 말을 할 때도.

“그렇게 많은 감정을 경험했는데도 결국 영화 촬영장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대부분이에요. 내가 누굴 죽여봤겠어요? 내가 사람을 반병신이 되도록 두들겨 패본 적도 없고, 내가 그렇게 당한 적도 없죠. 하지만 누구를 죽여야 하는 눈빛이 나와야 할 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고 미워했던 감정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그때 그 감정의 열 배 정도 되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지?’ 하고 극대화시켜서, 결국 그 감정이 옳다고 믿는 거예요. 만족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믿는 거죠. 믿지 않으면 그 커트를 마무리할 수가 없어요.”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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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정도 흘렀을까?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 <내 마음의 풍금>의 이병헌이 스르륵 스쳐갔다. 이렇게 극단적인 감정,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 어절마다 각인된 듯 스쳐가는데 그 숱한 굴곡을 매번 연기로 정면 돌파해온 그는 정말 괜찮은 걸까?

이병헌은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찾아오는 공황장애에 대해서도 말했다.

“원래 긴장을 잘하는 성격이기는 해요. 그런데 공황장애가 순간 ‘빡’ 오면 그 순간부터 끄으윽- 하고 숨이 안 쉬어지는 거예요. 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주로 팬 미팅이나 라디오 공개방송처럼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순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아,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뛰쳐나갈까? 그래도 될까?’ 그런 고민을 10분 이상해요.”

<레드 2> 홍보 때문에 출연했던 <두 시 탈출 컬투쇼> 공개방송 현장에서도 한동안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물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곁에 있어도 타인은 알 길이 없는 공포, 원인도 모른 채 일단 오면 받아내야 하는 공격이었다. 혼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다 결론은 ‘에이씨, 쓰러지더라도 여기서 쓰러지자’ 하고 견디는 거예요. 너무 두렵거나 긴장이 극에 달해서 그럴 때는 ‘인생 뭐 있어?’ 하고 그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제가 좀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해서.”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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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할 정도로 공개된 삶을 살면서, 오로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공포를 안고 웅크린 채, 다시 모두에게 공개돼야 이어질 수 있는 삶. 이병헌은 여전히 최고이면서 스스로를 던지듯이 세를 넓히는 중이다.

“하하, 영어 인터뷰할 때마다 나는 죽을 것 같은데 ‘아, 질문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알아들었는데 설명할 수 없는 질문이면 어떡하지?’ 그러다 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 인생 뭐 있어? 나 영어 잘 못한다고 얘기하면 되지 뭐. 다시 한 번 물어봐달라고 그러면 되지 뭐.’ 카메라에 비쳐지는 모습은 평온해 보여도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가, 다시 크게 웃었다. 타고난 낙천성이야말로 이병헌의 무기일까? <마스터>와 <싱글라이더> <남한산성>에서의 이병헌은 또 어떤 인생일까?

이병헌, 스스로를 던지듯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체크무늬 슈트, 티셔츠, 워커, 벨트 모두 가격 미정 조르지오 아르마니.인터뷰 말미, 아내 이민정과 아들 이준후 군이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공개되지 않은 평화, 이병헌의 일상이 그날의 스튜디오에 있었다. 그는 순간순간 날카롭게 뜨거웠다.

“아주 작은 것, 자주 있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저를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해요. 촬영장에서 어떤 컷을 내가 온전히 거기에 맞는 감정으로 끝내서 OK가 딱 떨어졌을 때. 끝은 어딘지 모르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불안, 기대, 떨림 때문에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것 같아요. 끝을 모르니까 불안하고, 그러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거대하면서도 기민한 초식동물처럼, 스튜디오 안에서 뛰어다니는 아들과 그 뒤를 쫓는 아내를 넌지시 보면서 이병헌이 말했다. 그 장면이야말로 자기 삶이라는 듯,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하리라는 걸 평온하게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