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의 비몽

류승룡은 날고 싶다. 날아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니트 보스 맨.

화보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유쾌하고 장난기가 넘치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예전보다 과묵해진 것 같기도 해요.

이젠 늙어서.(웃음) 그래도 기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염력>은 무려 3년 만의 개봉작이에요.

그러게요. 사실 마지막 화보 촬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요.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던 게 <염력> 출연의 계기였을까요?

<부산행> 개봉 전인 2016년 4월쯤에 <염력>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이런 영화를 기획 중인데 같이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연상호 감독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같은 소속사에 있는 배우 오정세 씨가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사이비>에서 목소리 연기를 해서 시사회를 보러 갔다가 만났어요. 기회가 되면 같이 작품 하나 해보자고 했는데, 사실 그때만 해도 연상호 감독이 만든 영화에 출연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죠. 실사 영화를 찍을 거란 생각도 못 했고. 그런데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듯이 <서울역>을 하게 됐고, <염력>까지 출연하게 된 거죠.

<부산행>을 보기 전에 <염력> 출연을 결정한 셈인데, 연상호 감독이 실사 영화를 잘 연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진 않았나요?

그냥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비록 <부산행>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처음 실사 영화를 찍는 감독임에도 잘 해냈다는 후문도 들었고. 그리고 <서울역>으로 디렉션을 받을 때 정확하고 기발하면서도 영민하다고 느꼈거든요. <염력>을 촬영할 때도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많았어요. 불안한 건 전혀 없었죠.

기존에 출연했던 실사 영화와 차이를 느낀 점은 없나요?

일단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이기 때문인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콘티 북을 완성하기를 원했고, 이를 토대로 영화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줬어요. 이 상황이 어떻게 시각화될지 궁금했는데 콘티대로 정확하게 장면을 완성하더라고요.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는 느낌이었죠.

레더 재킷 제이백 쿠튀르. 셔츠 CH 캐롤리나 헤레라. 바지 띠어리. 슈즈, 타이 모두 꼬르넬리아니.

<염력>에서 연기를 위해 몸무게를 12kg 정도 늘렸다고 하던데요.

연상호 감독이 자기 같은 체형을 만들어달라고 해서.(웃음) 일단 대한민국 중년 같은 느낌을 원했어요. 아무래도 대부분 배가 많이 나왔잖아요. 물론 저도 관리 안 하고 신경 안 쓰면 알아서 몸무게가 불어나요. 그리고 역할에 맞게 헤어스타일을 디자인하듯이 체형도 바꾸는 거죠. 사실 이런 걸로 주목을 받는 게 좀 그래요.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다른 배우들도 다 하는 걸 했을 뿐이죠.

공중을 나는 장면도 더러 등장하니, 와이어에 매달려서 연기한 날이 적지 않았을 텐데, <염력>은 <최종병기 활>과 <표적>을 잇는 류승룡의 세 번째 액션 영화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몹쓸 액션이죠.(웃음) 지난 두 작품에선 정교하고 숙련된 액션이 필요했다면 <염력>은 갑작스럽게 초능력이 생긴 평범한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라 액션이라 말하기엔 어설픈 동작들을 구사해야 했거든요.

결국 <염력>은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힘을 갖게 되면서 세상이 그를 평범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배우 입장에선 그 인물이 느끼게 될 혼돈 자체를 이해하는 게 중요했을 거 같아요.

큰 능력을 갖게 된 것뿐이지 이 사람의 인생이나 그릇 자체가 소박해요. 그래서 생계형 초능력자가 되는 거죠. 자신의 능력으로 남을 도와주는 걸 갈등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렇게 억눌려 있던 마음들이 진정한 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통쾌함이나 유쾌함을 느끼게 되죠. 그리고 <염력>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가정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쳐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6부작 시리즈물인 <킹덤>을 촬영 중이라고 들었어요. <싸인>과 <시그널> 각본을 쓴 김은희 작가의 신작이기도 한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라 들었습니다.

좀비라기보단 역병 환자에 가까워요. 간이 손상되면서 생기는 병에 걸리는 사람들로 인해 난리가 나죠.

아무래도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작품이니 기존 TV드라마 촬영 환경과는 분위기가 다를 거 같은데요.

완전히 달라요. 표준 근로계약 제도를 적용해서 촬영하고. 게다가 영화 현장에서 일하던 스태프들밖에 없어요. 심지어 <터널>의 김성훈 감독이 연출을 맡고. 오히려 영화를 찍는 느낌에 가까워요.

재킷 메종 마르지엘라 by 분더샵. 터틀넥, 바지 띠어리. 슈즈 CH 캐롤리나 헤레라.

2004년에 개봉한 <아는 여자>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한 뒤로 꾸준히 영화 제작 환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영화 현장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목격한 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요즘은 매년이 달라요. 6개월에 한 번씩 자동차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를 안 하면 지도 속에서 바다나 산 위를 달리게 되는 것처럼. 영화 현장도 매일매일 발전하는 거 같아요. 특히 스태프의 처우 문제는 많이 선진화되고 있어요. 표준 근로계약 제도가 시행되면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이 개선된 거 같아요. 그런데 아직은 과도기예요. 아무래도 영화가 예술이다 보니 공무원처럼 정확하게 만들 수는 없거든요. 결국 규격화된 방식으로 불합리한 사안들을 없애면서도 유연하게 적정한 지점을 찾아가야 할 거 같아요.

지난해 개봉할 것 같았던 <7년의 밤> 개봉이 미뤄지면서 결국 2018년이 됐어요. 사실 2016년에 촬영을 마친 작품이죠.

촬영 당시 우리 애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 중학생이 됐어요.(웃음) 왠지 <최종병기 활>보다 더 오래된 작품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7년의 밤> 이후에 준비했던 차기작의 제작이 연기되면서 10개월 정도 공백이 생겼어요. 제작을 기다리면서 작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도 작년에는 <염력>을 찍었고, 꽤 바쁘게 지냈어요. 1년에 작품 하나씩은 준비한 셈이니까.

촬영을 마친 작품의 개봉이 미뤄지고, 준비하던 작품의 제작이 지연되면서 본의 아니게 경력에 공백이 생긴 셈이니 조바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오히려 그런 공백이 생겨서 스스로에게 필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필요한 시간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쓰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 책도 읽고, 여행도 가고, 아이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여러 면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사실 2012년부터 2013년 사이가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한 해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까지 대단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배우로서 큰 인지도를 얻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된 얘기를 하는 기분이네요.(웃음)

지난 작품을 말하는 게 겸연쩍게 느껴지나요?

사실 좋은 기회가 많았고, 운이 좋았죠. 그리고 40대가 돼서도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다는 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앞서서 선배님들이 지치지 않고 선구자로서 길을 닦아준 덕분에 잘 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죠. 좋은 이야기꾼이나 기획자들 덕분에 도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고마운 일이죠.

과거에 출연했던 작품을 다시 보는 일은 없나요?

TV에서 우연히 보게 될 때가 있죠. 얼마 전에는 아이가 채널을 돌리는데 느닷없이 <천년학>이 나오는 거예요. 국회방송에서 방영하더라고요. 오랜만에 보니까 색감이나 미장센이 1980년대 영화 같은 느낌이라 제가 영화만 30년 한 사람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웃음) 사실 제 영화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천년학>은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고, 언제 다시 볼 기회가 생길지 몰라 앉아서 끝까지 재미있게 봤어요.

개인적으로 <천년학>의 엔딩 시퀀스에서 비상학이 날아가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가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CG를 활용하는 시절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영화가 원하는 정서를 영상으로 잘 표현한 느낌이었어요.

그때 <천년학> CG 작업을 했던 실장님이 <염력> CG 작업을 한 회사의 대표님이에요. 그래서 <염력>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고사 지낼 때 둘이 앉아서 그때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저는 매니저도 없었고, 내일 뭘 찍는지도 모르면서 늘 대기하다 부르면 갔죠. 오랜만에 얘기하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배우에게는 작품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앨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종종 섬에 가는데 관매도만 다섯 번 정도 갔어요. 유채꽃이 정말 예쁘거든요. 유명한 솔밭도 있고요. 사실 <천년학>을 거기서 찍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러 번 가진 않았을 거예요. 촬영하면서 산도 자주 올라가고, 톳나물이랑 갑오징어를 먹었던 기억이 남아서 가족들도 데려가고 그랬어요.

코트 조르지오 아르마니. 니트 톱 메종 마르지엘라 by 분더샵.

작년 10월에 열린 난타 20주년 기념 간담회에 참석했었죠. 심지어 오랜만에 무대에도 섰습니다.

거의 16년 만에 공연을 하게 됐는데 근육들이 기억하더라고요. 그래서 문득 슬펐어요. 얼마나 고생하면서 했길래 근육이 통증으로 기억하나.(웃음)

과거에 인터뷰에서 <난타> 무대에 먼저 도전한 이유가 ‘연기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건 젊을 때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거 같아서’라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역시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거 같다’고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제가 올해로 49세예요. 40대의 마지막이죠. 어쩌면 이미 작년에 촬영한 <염력> 같은 작품이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는 작품이 됐을지도 모르죠. 결국 모든 게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일 거예요. 그리고 저는 지나고 보면 보이는 부족한 부분들을 다시 해서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도 그때 최선을 다한 거니까요. 결국 제 역량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부족한 게 보여서 부끄럽지만 정말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한 결과이기 때문에 다시 한다 해도 그 이상 잘할 자신은 없어요.

그래도 연기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 아닐까요?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엄청 많아요. 저는 그냥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좋은 작품을 성실하고 기분 좋게 해낼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혹시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갖고 싶은 능력이 있을까요?

드론처럼 날아다니고 싶어요.(웃음)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나요?

얼마 전 제주도 EBS에서 <한국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드론으로 담아내는 절경이 멋있더라고요.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광경이거든요. 직접 날면서 보는 느낌? 워낙 자연을 좋아해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대자연을 보고 싶어요.

날고 싶은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거군요.

자연을 좋아해요. 트레킹도 좋아하고. 걷다 보면 얻는 것이 있어요.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좋은 걸 보면서 매일 정체돼 있던 몸에 활력을 주기도 하고, 좋은 공기도 마실 수 있고, 제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죠.

덕분에 언젠가 관매도에는 꼭 한번 가보게 될 거 같아요.

3월 초가 제일 좋아요. 1, 2월에 가도 괜찮고요. 바람은 조금 불겠지만 별로 안 추워요. 2월이면 이미 봄나물이 나오니까요. 남쪽은 따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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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어시스턴트 신 동윤
사진 김상곤
헤어 백 가영
메이크업 김 혜원
스타일링 송 희경
출처
29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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