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나-3 프랭크 게리

프랭크 게리, 로스앤젤레스의 작업실에서.

프랭크 게리, 로스앤젤레스의 작업실에서. 건축가, 88세

척 노리스와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갈색 띠까지 땄다. 갈비뼈가 몇 군데 부러졌다. 가라데 연습을 계속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팔굽혀펴기는 40번까지 할 수 있다. 조금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물에 뛰어드는 경향이 더 강하다. 물론 말 그대로 물에 뛰어든다는 게 아니라 비유적 표현이다. 젊은이는 친구들이 모두 간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곳에 간다. 함께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친구들 대다수가 더 이상 옆에 없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일주일에 두 번쯤 와인이나 테킬라를 마신다. 시가는 끊었다. 약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진통제도 먹지 않는다. 사연이 있어서 진통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옷은 아주 못 입는다. 옷 쇼핑을 싫어한다. 두 아들과 놀러 나가면 아들들은 나를 베벌리힐스로 데려가서 꾸며주곤 했다. 보르살리노 모자를 쓰면 내가 보기에는 정말 멋졌다. 이제 2주 동안 매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옷이 있다. 그런데 어떤지 아나? 두세 벌만 입고 나머지는 그냥 걸려 있다.

영국 평론가가 나를 두고 ‘한 가지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 내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프랭크 게리의 딸 레슬리는 2008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자기 방어력이 낮았고, 그 비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정말 비수를 꽂는 말을 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나는 토론토에서 자랐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슬롯머신이 불법이 아니었고, 우리 아버지는 여러 레스토랑에 슬롯머신을 마흔 대인가 쉰 대쯤 설치하고 거기 들어 있는 돈을 수금하러 다녔다. 그 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러 일을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둔 적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한 일 중에서 특별한 것을 꼽자면 식료품점 쇼윈도를 장식한 것이다. 예술 쪽 일을 했다면 아버지가 더 즐겁게 일했을 것 같지만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로스쿨에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 여성들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포일의 전쟁>이다.

첫 번째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세상에서 도피하던 때였다. 어느 날 친구가 “입 다물고 조용히 나를 따라와”라고 했다. 친구는 나를 심리 상담가 밀튼 웩슬러에게 데려갔다. 할리우드 인사들을 많이 치료한 사람이었다. 2년 동안 개인 상담을 받은 뒤 15명과 함께 그룹 치료를 받았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룹 치료의 뛰어난 점은 1:14로 상대하는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 말을 흘려들을 수 없다는 거다. 효과가 있었다. 그룹 치료를 받기 전까지 나는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못 했다. 그 치료 덕분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편안해졌다.

혼자 배를 타고 항해를 나가곤 했다.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고, 만사가 다 잘될 거라는 기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간다. 대부분 건축가나 예술가다. 우리는 온갖 사람들에 대해 다 이야기한다.

혼자 배를 타고 항해를 나가곤 했다.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고, 만사가 다 잘될 거라는 기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간다. 대부분 건축가나 예술가다. 우리는 온갖 사람들에 대해 다 이야기한다. “이번 주에 노먼 포스터 작업 봤어?” 같은 식이다.

우리는 화나는 것이 있을 때 가만히 앉아서 염증을 더 심하게 만든다. 통제할 힘은 자기 내면에 있다. 스위치만 움직여도 바꿀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연민을 즐기기 때문이다.

화학공학자인 사촌이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화학공학자를 높이 보았고, 그래서 나도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화학공학 연구실을 가봤는데 아주 지루했다. 자동차용 도료를 개발하는 연구실이었다. 나를 연구실로 데려간 사람이 나중에 말했다. “네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몰라도 이 일은 네 길이 아니야.”

아버지가 될 준비가 돼 있다고 느꼈는지를 말하자면, 처음에는 복잡했다. 딸을 2명 낳았고, 그 직후에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딸들이 열두 살인가 열세 살 때 아내와 아이들이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일이 쏟아졌는데 대부분 나쁜 일이었다. 아이들의 미움을 사고, 전처는… 그런 갖가지 일 말이다. 새 가족은 훌륭하다. 한 아들은 나와 함께 일한다. 건축가다. 또 한 명은 화가다. 첫 결혼에서 얻은 아이들보다 이 아이들과 더 많이 함께 지낸 것 같다.

건설 산업의 30%는 낭비다. 예산이 1억 달러면 3000만 달러는 쓸모없이 쓰인다. 날아가는 돈이다. 우리는 기술을 개발해 낭비를 줄여왔다. 나는 예산 통제에 크게 자부심을 느낀다.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값비싼 건물이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90%가 손을 들 것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1 제곱피트당 300달러로 지었다. 정말 비싸지 않은 건물이다. 이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사실이에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진짜 사실이다.

나는 철저하고 완전한 무신론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을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대인 학교에 다녔고 캐나다에서 유대교 성인식도 치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꽤 독실한 신자였다. 물리학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와 함께 신이 없다는 가정을 증명하기로 했다. 우리는 <성경>을 쭉 훑으며 모순되는 부분을 130인가 150곳쯤 찾았다. 정확한 숫자는 잊어버렸다. 그 부분을 모두 적어서 작은 책자로 만들어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우리는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고 학교의 여학생들은 아무도 우리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심한 일이었다.

침대 옆에 <돈키호테>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두었다. <돈키호테>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해와 곡해. 그런 것이 모두 거기 담겨 있다. 세르반테스는 정확했다.

디자인을 하고 작품을 만드는 것은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과 같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짜잔’ 하고 완성이 되고, 멋져 보이고, 모두가 좋아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이스하키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제는 하키를 할 수 없다. 노인이면 누구나 겪는 허리 문제를 나도 겪고 있다.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마라. 문제 대부분은 자기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한심한 것이며, 정말 의미 없는 것이다. 자식을 잃는 것 같은 진짜 고통은 끔찍했다. 나는 서너 달 동안 딸을 보러 거의 매일 병원에 갔다. 정말 힘들었다. 그런 일을 제외하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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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Ben Mitchell
번역 조 동섭
사진 Steve Schofield
출처
29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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