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배는 지금 노화도에 있다-2

김성배 - 에스콰이어

#4. 그땐 술을 좀 마셨으니까 그랬죠. 실은 나도 엄청 무서웠다고.

김성배는 대당리 마을회관에 살고 있었다. 마침 섬에서 자리를 잡은 후배가 소개해준 거처였다. 회복을 위한 기거라면 충분한 공간, 꼭 필요한 살림살이와 앉을 곳과 누울 곳이 충분한 곳이었다. 방에는 아이맥과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었다. 바닥에는 드보르작 현악 4중주, 베토벤 교향곡 9번과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악보가 쌓여 있었다.

“차 우려드릴게요. 아는 스님이 주신 건데, 아주 죽여줘요.”

언젠가 “다른 분들은 악사인데 성배 씨는 도사네”라고 말한 비구니 스님이 챙겨준 차였다. 부엌 테이블 한쪽에 있던 다도 세트로, 김성배가 차분하게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대당리 마을회관 안에 나무뿌리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땅 냄새, 저 위에는 숲 냄새였다. 한 모금 마셨더니 몸과 마음이 같이 차분해졌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아침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김성배가 말했다.

“다 끊고 뉴스도 못 봤어요. 손석희 앵커가 울고, 나라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점점 보이고 그랬으니까요. 제 단점이긴 한데, 제가 감당을 못하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차단하고 숨어버리는 게 있어요. 내가 너무 고 통스러우니까 외면하고 안 보는 거죠. 그랬어요, 그때는.”

김성배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의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한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촌에서 장사가 잘되는 카페를 운영하던 친구는 독일로 영화 공부를 하러 떠났다. 외국계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친구는 태국으로 갔다. 나라 때문에 스스로 피폐해지는 걸 예민하게 느꼈으니까, 가난하고 외롭더라도 외국을 택한 친구들이었다.

남아 있는 사람도 온전치는 않았다. 술집을 하던 친구는 술과 욕이 늘어있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좀비 같았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김성배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세월호 관련 뉴스가 나오면 수저를 놓고 자리를 떴다. 먹을 수도 없었다. 창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민의 시작이었다. 언제까지나 분노만 할 수도 없었고, 꼭 같은 정도로 지속되는 우울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 공감하고 싶었다.

“주변에 예술하는 친구들, 우을증 걸린 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스스로 꼬랑지를 내리고 자기 겸열도 심해졌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음악은 해서 뭐하냐 생각하지만, 배운 게 음악이니 접지는 못하고. 음 악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막히기 시작했는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스스로 막아버린 거죠.”

4월 30일 인천 연안부두에서 본 김금화 만신의 세월호 추모 굿은 김성배에게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그 형식과 에너지로부터의 충격이 첫 번째, 굿 자체를 한국의 전통 예술과 음악과 퍼포먼스의 관점으로 보고 그안에서 실낱 같은 길을 느낀 충격이 두 번째였다. 연구에 착수했다. 김금화 만신에 대한 각종 다큐멘터리,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황해도 굿에 대한 논문은 물론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한 책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자주 가던 술집 사장은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그 사장이 그래요. ‘야, 옛날에는 김금화 만신이 구민회관에서 하고 그랬어. 1세대 재즈 드러머 김대환 선생님 있지? 김대환 선생님하고 김금화 만신하고 인천에서 라이브 퍼포먼스를 하고 그랬대.’ 만신은 작두
타고 김대환 선생은 드럼으로 맞짱을 뜬 거죠.”

인천은 그런 도시였다. 문화와 문화가 섞여서 발화하는 항구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날것의 도시였다. 지금은 말로만 전해지는 그런 공연이 사료로 남아 있었다면 그 엄청난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을까?

2015년 초, 김성배는 음악적 연구에 뜻을 품고 인천문화재단 소속 레지던시 아티스트가 되었다.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김금화 만신의 신딸 이옥자 만신을 소개받고, 전통 무속 음악을 자료와 악보로 문서화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 2015년 4월에는 이옥자 만신이 강화도에서 했던 굿 판에 같이 갔다. 강화도 어떤 지역의 유지한테 집안의 살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 굿이었다.

“그땐 그냥 한번 가본 거였어요. 그런데 오래 못 봤어요. 굿은 하루 종일 했죠. 나는 한두 시간 봤나? 그 소리가 너무 세고 무서웠어요. 세속무랑은 달라요. 진짜 소울이 있죠. 두려웠어요. 엄청나요, 정말. 그 소리가, 잘하는 연주가 아니에요. 소리가 굉장히 흐트러져 있어요. 챙챙챙챙 투두 두두하는 소리. 막 굿을 하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거기 문지방에 서 있지마! 처마 밑에 가지마!’ 그러고. 신들이 와 있으니까 가지 말라는 거죠. 영상으로 봤던 거랑은 달라요.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이거 홀리거나 씌겠구나 생각했죠. 바로 돌아왔어요.”

이옥자 만신은 첫 만남부터 살벌했다고 김성배가 말했다. 첫 만남은 두 시간 정도였다. 소개해준 사람과 셋이 있던 자리에서 김성배는 거의 침묵하고 있었다. 이옥자 만신은 소녀였다가, 할머니였다가, 아주머니였다가 했다. 그러다 김성배에게 말했다.

“성격 안 좋으니까 성격 좀 죽이고, 안 고치면 큰일 난다고. 약간 신기가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그 얘기가 정말 세게 왔어요. 무섭고.”

“어제 우리 저녁 먹을 땐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했잖아요.”

“그건 술 좀 마셨으니까 그랬죠. 하하하. 무서웠어, 나도.”

김성배가 또 껄껄껄, 마을회관을 웃음소리로 다 채웠다. 연구는 연말까지 계속됐다. <RITUAL> 음반을 녹음한 건, 2015년 12월 12일이었다. 연주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디렉션만 줬다. 70% 이상이 즉흥이었다.

“파트 1에서도, 3에서도 조금씩 왔다 간 것 같았어요. 지나치게 몰입했던 거죠.”

예술과 무속,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과 감성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혹시, 누가 어디에 몰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는 아니었을까?

“음악가들한테는 내 머릿속에 있는 것만 요구했어요. 시는 감정 없이 중얼대듯 읽고 발음만 정확하게 해달라고. 파트 4에서는 알아서 놀게 해주겠다고. 전자음악 하는 친구한테도 경계를 정해주고, 하나 누르고 그냥 있으라고. 30분 동안 한 음 연주한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수제천 방식의 연음으로 연주해야 하니까 소리가 끊어지면 안 됐어요.”

녹음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음원은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에 교통사고가 났다. 깜박이를 켜고 왼쪽 차선으로 진입하려고 하는데 버스가 들이받았다. 분명히 차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였다. 기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한 뇌진탕이었다.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끼이이이하고 휙 그러고. 옆에 계속 뭐가 있는 것 같았어요.”

김성배 - 에스콰이어

에는 두 장의 LP가 들어 있다. 핫 핑크와 형광 녹색 LP를턴테이블에올리는순간,좀다른세계를직면할수있다. 김성배는 섬 아이들에게 기타와 피아노를 가르치고, 노화도의 밤바다는 누가 깔아놓은 천처럼 가지런했다.

김성배 - 에스콰이어

#5. 뇌를 회로라고 하잖아요? 아마 그게 합선됐었나 봐.

아까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심하게 가물었던 여름이었다. 어떤 집은 물이 끊길 정도였다. 아침에도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이러다 말 거예 요, 몇 달째야 벌써.” 점심을 먹고 캔디바를 먹을 때 김성배가 말했다. 그런데 습도가 점점 올라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공룡알 해변에서 음반을 촬영할 땐 숫제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지금 이런 소나기.밤까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김성배가 이 섬에 들어온 건 올봄이었다. 그때만 해도 잠시 머물 생각이었는데, 섬의 시간은 좀 다르게 흘렀다. 시간이 평평했달까. 아침과 점심과 저녁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하루가 나뉘지 않으니 이틀도 나뉘 지 않았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을 거라는 걸 삶으로 알고 있었다. 김성배는 전복 농장에서 청소를 돕기도 하고 섬 아이들에게 기타와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지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교통사고 직후에는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다. 2016년 1월이었다.

“뇌가 붕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계속 그래서 힘들었죠.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뇌의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거예요. 계속 켜져 있었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누워도 잠이 안 오고 부들 부들 떨었죠. 지병이 생긴 건지 정신적으로 그랬던 건지 몰랐지만 어쨌든 내 상태를, 그걸 똑바로 보고 싶었어요.”

도망친게 아니었다. 한국어가 안들리는 곳, 완전히 낯선 곳에서 직시하고 싶었던 거였다. 앨범 녹음과 교통사고 직후 한국에서의 연말은 내내 괴로웠다. 일본에 있는 친구한테 돈은 상관없으니 집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후 곧바로 떠났다.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시달렸다. 왼쪽 머리가 너무 아파서 술은 생각도 못 했다. 잠을 자도 뇌의 스위치가 켜져 있으니 몸을 더 혹사시키기로 했다. 무조건 뛰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조깅했다. 그렇게 일본에서는 딱 한 달 버텼다. 2월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자살 사이트에 접속해 있었다.

“진짜 무슨 환청 같은 게 들렸어요? 누가 명령하고 그랬어요?”

“아뇨,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그냥 이명. 그 인터뷰는 너무 과장됐어요. 하하. 근데 그런 건 있었죠. 운전하고 가는데 누가 옆에 붙어 있는 느낌. 옆 차선이 비어 있는데 차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다른 차가 날 자꾸박을 것 같았어요.”

“가위에 눌리고 그랬어요?”

“가위는 맨날 눌렸죠. 평소에 안 보던 사람들이 꿈에 많이 나왔어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헤어진 전 여자 친구도. 왜 기가 허해지면 허깨비가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맨날 조깅해서 몸은 좋아졌겠네요.”

“하하.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러닝머신을 10km씩 뛰었어요. 제 팬 중에 정신과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 진단은 간단했어요. 우울증이다. 쉬어라. 창작 작업을 너무 과하게 하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린 거다. 받아들여라. 그래도 밤엔 무서웠죠. 온몸에 엄습해오는, 저려오는 게 있었어요. 그게 무서우니까 귀를 막고 러닝머신을 뛰는 거죠.”

후배들한테 기억나지 않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동했던 정황은 기억에 없는데 어느새 양재동 친구네 집이었던 밤도 있었다. 소주를 컵에 따라 원샷하고 쓰러졌다. 이튿날 아침의 고통에서 지옥을 봤다고, 김성배는 회상했다. 괴로워서 귀를 막았다. 왼쪽 머리에 진드기, 거머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아파서주먹으로 자꾸 머리를 때렸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연주 활동은 해야하는 데 음악을 들으면 괴로우니까, 당시 모든 무대에서 이어 플러그로 귀를 막고 연주했다. 다른 연주자들의 손을 보면서.

“그러다 진공 상태가 왔어요. 즐거움도 슬픔도 없고 불행도 행복도 없는 상태. 나, 마흔인데 왜 이러고 있지? 왜 음악하지? 해서 뭐 하지? 자살 사이트에 들어갔던 것도 그 즈음이었어요. 우울증이었던 거죠. 그래서 진짜 거의 처음으로 절실하게 새벽 기도를 나갔어요. 열심히 할 테니까 살려달라고. 그때, 말하자면 웜홀 같은 걸 통과한 것 같아요.”

10년 전에 했던 요가도 다시 시작했다. 제주도에선 <중앙일보>와의 짧은 인터뷰 이후 ‘효리 요가 선생님’으로 알려진 한주훈을 찾아가서 수련했다. 아침저녁으로 수련하고 낮에는 산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같이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을 보냈더니 다시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와서 수련을 이어갔다.

“요가는 작년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꾸준히 했어요. 두통도 사라지고 귀도 돌아왔죠. 그런데 아직 음악이 안 돌아왔어요. 하지만 몸에서 독이 빠져나가는 걸 직접 보고, 내 머리와 정신을 물질로 보고 관찰할 수 있 게 됐죠. 거기에 억압당하는 게 아니고요. 내 아픔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완하고 호흡하면서 내보내는 거예요.”

몸이 회복되면서 아주 단순한 것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햇빛, 풀 냄새 같은 것. 냄새와 맛을 느끼는 감각도 좀 달라졌다. 몸이 막 나아지기 시작할 때, <RITUAL> 공연 겸 녹음 작업에 참여했던 무용수 셀린 바케가 대만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성배는 그녀에 대한 언급을 성의껏 아끼고자 했다.

“셀린에 대한 예의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상도 있고 음원도 있으니까. 같은 연주를 두 번 할 수도 없는거니까요.”

그렇게 다듬은 음원이 재즈평론가 황덕호를 거쳐 비트볼로 갔고, 그해 대중음악상 심사위원에게도 들렸던 모양이다. 음반이 없는 형태, 그러니까 음원 그대로 후보에 오를 정도의 에너지였다. 재즈 가수 나윤선을 프랑스에 데뷔시키고 김성배의 전 앨범 아반트리오(Avant Trio)를 만든 프랑스 프로듀서 피에르 비앙카렐리도, <RITUAL>의 음원을 듣고 나선 “반드시 LP를 내야 한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제가 만든 앨범이 네 장인데 네 장 다 한국 대중음악상에 후보로 올라갔거든요. 그러니까 수상은 못 했다는 뜻이죠. 후배들은 그래요. 재즈계의 디카프리오냐 뭐냐, 왜 후보에만 오르고 상을 못 받느냐고.”

<RITUAL>은 그렇게 나온 음반이었다. 김성배가 항구에서 음반을 손에 들고 지은 표정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있는 거니까. 그저 진공 같은 기분으로 맞이해야 하는 순간도 있는 거라서.

2015년 겨울, 인천 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의 연주. 북과 노래에 김동원, 알토·소프라노 색소폰에 김성완, 피아노에 이하윤, 시 낭송에 표진호, 전자 사운드와 효과에 권현우, 콘트라베이스에 김성배, 무용에 셀린바케. 65분을 살짝 넘기는 이 전무후무한 두 장의 LP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2014년 4월 16일과 이후의 모든 슬픔과 분노, 도리 없이 국가적이었고 피할 수 없이 개인적이었던 아픔을 각각의 층위에서 견딜 수 밖에 없었던 시기. 모두에게 혹독했던 시간 안에, 음악가 김성배가 이렇게 견뎌 낸 시간도 있었다.

김성배 - 에스콰이어

재킷에는 이옥자 만신이 쓰는 부채가 그 에너지 그대로 살아 있다. 펼치면 신당이다. 오랫동안 신으로 모셔왔던 ‘장군님’들이 저 안에 있다.

#6. 내일은 날씨가 아주 맑겠네요, 화창하겠어.

서울에 와서 다시 듣고 있는 그의 앨범 은 일요일 새벽에 듣던 것과 아주 달랐다.그렇게 무섭게 들렸던 소리는 사실 관습적으로 ‘무서운 상황에서 나는 소리’라고 학습된 소리 같았다. 다시 마음을 가 다듬고 접했을 때 들은 건 어떤 사연, 혹은 지금 가장 걸출한 연주자들이 작심하고 연주하는 즉흥연주였다. 서양 악기에서는 안 나는 미분음, 서양 박자에는 없는 리듬. 그들이 이끌었던 대로 몸과 마음과 귀를 같이 열고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쨍’하고 얼음같이 맑아지는 것 같은, 소리 그대로의 음악이었다.

“제가 섬에 들어온 이유가요, 제 연주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내가 만든 네 장의 음반에 대한 책임, 소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요. 내 인생이 내 소리니까. 이게 그렇게 진지한 얘기는 아니에요. 저는 음악가로서 궁극의 사랑, 그런 걸 찾고 싶어요. 나 자신과 한 약속이 있어요. 서울에 올라가서 다시 음악을 하면 이제는 거리낌 없이 다 하고 싶거든요. 여기, 봄에 되게 좋았어요. 갈매기가 온화하게 날고.”

그때 김성배가 살고 있는 마을회관에 그의 후배가 찾아왔다. 미리 사다 놓은 전복을 회로 떠줄 사람이었다. 대학 후배였는데, 학교에서는 천재 소리를 듣던 피아노 반주자였다. 지금은 섬에 있다. 누구에게나 숨 고르기는 필요한 거니까. 김성배가 말을 이었다.

“저한테 지난 2년은 굉장히 컸어요.‘여기서 다시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건 어떤 뜻일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귀 자체가 달라졌으니까요. 확실히 다를 거라는 확신은 있어요. 두려운 것도 이제 없어요. 전혀.자, 전복 드시죠. 이따 라면에 넣어서 끓여드릴게요. 라면에 전복을 넣으면 라면이 맛있어질 것 같죠? 반대예요. 전복이 죽여줘요, 진짜.”

우리는 같이 웃으면서 녹음 버튼을 다시 눌렀다. ‘김성배’라는 이름으로 저장한 파일에는 우리가 나눈 3시간 32분 동안의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있다.물론 여기에 적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후배가 전복을 다듬는 동안 김성배가 말했다.

“후련하네.후련한 것 같아. 아, 이게 진짜 인터뷰구나. 이제 다음 작업할 때는….”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왔을 땐 그렇게 무섭게 내리던 비가 다 그쳐있었다. 마을회관 주변은 담이 아주 낮은 마을이었다. 어쩌면 김성배한테는 이 인터뷰가 굿판이었을까? 이튿날 아침은 전에 없이 화창했고, 며칠을더 견뎠더니 서울의 한 철이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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