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적 김명민

모자라서 충분하다.

김명민 - 에스콰이어

정우성(이하 정) 이번 영화 <하루> 예고편을 봤어요. 배우 김명민이 이번에도 힘들고 괴롭고 피로하고 스스를 못살게 구는 영화를 선택했구나 싶었습니다.

김명민(이하 김) 전 처음 시나리오를 볼 때 전체적인 이야기부터 봐요.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책으로만 읽게 돼요.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을 즈음엔 시나리오 속 인물이 눈앞에 딱 서 있어요. 옷까지 입혀져서. 표정과 헤어스타일 같은 것까지 그려져요. 두 번째 읽으면 이 사람의 행동거지까지 구체적으로 나와요. 그렇게 상황 속 인물이 그려지고 나면, 이 영화는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돼요.

정_ 내가 이 캐릭터를 연기하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고 괴로울지까진 생각이 안 미치는 거군요, 처음엔.

김_ 이미 작품을 하고 싶다고 결정하고 난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가 보이는 거예요. 처음엔 그게 안 보이고 작품과 인물만 보여요. 그러니까 결정하고 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거죠.

정_ 재밌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땐 약간 신명이 난 상태인 거군요?

김_ <하루>도 그랬어요. 처음부터 뭘 따져가면서 봤으면 출연하기 어려웠겠죠. <하루>에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잖아요. 반복되는 장면을 찍고 또 찍고. 똑같은 장면을 어떻게 다르게 연기하지? 이걸 어떻게 계산해? 이런 디테일을? 그랬다면 처음부터 아예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신기주(이하 신) 어쩌면 오늘 하루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네요.

정_ 편집장님, 또 무슨 엉뚱한 말씀을 하시려고?

신_ 바로 오늘 <하루> 제작 발표회가 있었잖아요. 오늘 하루 종일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고 반복하고. 기자들은 처음 하는 질문이겠지만, 어쩌면 김명민의 입장에선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고 있을 테고. 그걸 또 조금씩 다르게 대답해줘야 할 테고. 오늘 하루가 딱 <하루>네!

김_ (웃음) 이런 반복되는 하루는 저한텐 꽤 익숙해요. 그래도 인터뷰어가 계속 바뀌잖아요. 사람이 바뀌니까 나름 거기에서 신선함을 찾아보려고 해요.

신_ 딱 <하루>네요. 하루는 같지만 그때그때 선택에 따라 변주가 가능한 것,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해야 하니 고통스러운 하루인 것도 영화 <하루>와 같아요.

김_ 저한텐 익숙한 상황이라니까요. 영화 촬영 현장도 반복의 연속이죠. 찍은 걸 또 찍고 또 찍고. 오케이 났어. 그래도 또 찍어.

정_ <소름> 때였나요? 리허설만 19번 했던 게.

김_ 17번. 그러면 정말 하루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에요. 오늘 찍었는데 내일 가서 또 찍어요. 똑같은 걸. 그런데 분명히 다른 신이에요.

정_ <하루>에선 하루가 몇 번 정도 반복되나요?

김_ 예닐곱 번.

정_ <엣지 오브 투모로우>라는 영화가 있잖아요?

김_ 크루즈 형 거?

정_ 거기선 죽어야 다시 시작되잖아요.

김_ <하루>도 비슷해요. 어떤 운명의 굴레 같은 거예요. 더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여기까지. 이것도 많이 얘기한 거예요.

김명민 - 에스콰이어

셔츠, 바지 모두 S.T. 듀퐁.

신_ <하루> 개봉이 6월 15일이던데.

정_ 일부라도 편집본을 봤나요?

김_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전 기술 시사도 안 가고, 편집실에도 안 가요. 중간에 현장 편집도 안 봐요. 현장에서 모니터도 안 봐요.

신_ 현장에서 모니터조차 안 본다고요?

김_ 전혀. 저 같은 배우가 몇 분 있어요.

신_ 고집스럽게 안 보는 이유가 있나요?

김_ 배우가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는 순간 전체적인 그림이 흔들려요. 그 신 자체에 대한 욕심이 생겨버리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신에서 8 정도 연기했다면, 모니터를 보고 나면 10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확 생겨버려요.

신_ 모니터를 보면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일단 보이고 나면 그걸 채우고 싶어진단 말씀이군요.

김_ 그랬을 경우, 나중에 보면 진짜 오버액팅의 극치를 보게 되죠.

신_ 현장에선 백점짜리 연기가 영화에선 빵점짜리 연기가 되는 거군요.

김_ 현장에선 모르죠. 그 신만 보니까. 나중에 다 붙여놓고 보면 못 봐줘요. 이게 풀어줄 때 풀어주고 잡아줄 때 잡아주면서 물 흘러가듯 해야 하는데, 매 신을 잡으려고 하면 안 되거든요. 욕심 때문에 큰 그림을 놓치게 되죠.

신_ 현장에선 감독하고만 얘기하는군요? 스스로 연기의 톤&매너를 계속 유지하면서.

김_ 네. 감독님만 오케이하면 저는 무조건 오케이고. 저는 머릿속으로 그린 대로만 제 연기를 풀어내는 거예요. 그냥.

신_ 그렇지만 모니터를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건 안 느끼나요? 내가 잘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인간인데. 뭔가 실수한 건 없는지 걱정되니까.

김_ 많이들 확인하고 싶어 하죠. 내 눈빛이 이상한가. 앵글이 어색하진 않은가. 솔직히 이런 걸 다 확인하고 싶어 하거든.

신_ 인지상정.

김_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 딴에는.

신_ ‘딴에는’이라뇨? 그게 김명민의 연기론인 거죠. 실제로도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김_ 좋은 결과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제 고집이죠. 모니터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욕심이 더 생겨요. 모니터를 보면 뭔가 어색하거든요. 음악도 안 들어가 있어, 편집도 안 돼 있어, 오로지 내 얼굴만 찍어놓은 모니터를 보는 순간 누구라도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더 하고 싶다. 어색하다. 잘할 수 있는데 싶죠. 솔직히 더 잘할 수 있다는 욕심을 버리는 게 연기자로서는 가장 대단한 용기예요. 그 경지에 오르는 게 연기자로서 목표라고 봐요. 전 항상 모자라게 연기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어요. 적정선과 오버는 정말 한 끗 차이거든요. 그런데 조금 모자라게 연기하면 집에 와서 찝찝해서 잠도 잘 못 자요. 그렇다고 이걸 넘어서는 게 정답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찜찜하고 하루 종일 그 연기 때문에 시달리고 몇날 며칠을 잠 못 이뤘는데, 나중에 화면을 통해서 보면 생각보다 괜찮고 자연스럽거든요. 반면 오늘 내가 뭔가 쏟아부었다 싶은 경우가 있어요. 오늘 정말 속 시원하게 했다. 오늘 나를 다 보여줬다. 너무 잘 나올 것 같다. 나중에 보면 못 봐주겠어요. 너무 못 봐주겠어요. 오버액팅의 끝이죠. 왜 저렇게 했지 싶고. 막 잘하려고 욕심부리는 게 너무 보이는 거예요.

신_ (잠시 침묵) 그런 깨달음을 언제 얻었나요?

김_ 한 10년 전쯤이었나, <소름> 찍고 윤종찬 감독님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버리는 작업을 하라고.

신_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 연기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김명민의 화두였군요.

정_ 10년 전이면 드라마 <하얀거탑>을 찍을 무렵이었네요.

김_ <하얀거탑>의 안판석 감독님도 계속 말씀하셨어요. 배우는 모자라게 연기해야 된다고.

신_ 배우의 연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 것 같네요. 인생 역시 가득 차서 넘치기보단 모자란 듯이 해야 하고.

김_ 맞아요. 그 전에는 연기도 인생도 꽉 채우려고만 했던 것 같아요. <소름>이 대표적이죠. 그 즈음에 했던 영화들도. 그 무렵에 제가 출연한 영화가 줄줄이 엎어지는 바람에 배우를 그만둬야 하나 싶은 적도 있었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긴 했습니다만. 돌아보면 그 시기가 저를 비우게끔 도와줬던 것 같아요.

신_ 배우 김명민한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텐데요. 중도에 촬영이 중단되는 영화가 3편이나 이어졌으니.

정_ 비워내는 연기를 했을 때 그걸 알아봐주는 감독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 입장에선 과장된 연기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김_ 그게 어려워요. 제가 비워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워내는 연기를 했을 때 감독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감독과 현장 스태프들. 솔직히 현장에서 제 연기를 눈으로 보고 느끼는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그 연기가 스크린을 뚫고 관객에게까지 가 닿을 리가 없거든요. 이게 슬픈 감정이면 사람들을 울려야 하고, 사람들을 유혹해야 하는 신이라면 사람들을 혹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게 배우의 몫이잖아요. 그런데 분위기를 보면 알잖아요. 내가 연기를 했는데 다들 딴짓하고 있고. 몰입도 못 하고 있고. 반면에 어떤 때는 다들 내 연기에 빠져서 감독이 컷을 했는데도 촬영 기사마저도 그걸 못 느낄 정도인 경우도 있죠. 그럴 때 배우는 정말 큰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솔직히.

신_ 그렇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모자란 듯 연기해야 한다는 거네요? 그런 유혹을 이기고.

김_ 그렇죠. 솔직히 저는 비주얼로 승부하는 배우가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어떤 카메라가 나를 어떤 각으로 비쳤을 때 내가 잘나고 예쁘게 나올까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보통 배우들은 촬영 기사님에게 이런 질문도 해요. “이 정도로 봐도 되나요?” “이 정도가 좋나요?” 전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왜 저런 질문을 할까 싶었어요. 그냥 자기가 카메라 앞에서 편하게 연기하면 다들 알아서 잡아줄 텐데. 오히려 내 뒤통수만 나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연기만 제대로 하면 그게 진심으로 보일 텐데. 저는 그런 주의예요. 그래서 모니터를 보는 순간 창피해요, 한마디로. 내 연기를 내가 보고 있으면 너무너무 민망하달까?

신_ 혹시 안 잘생겨서?

정_ 휴, 이런 분이 우리 편집장님이십니다.

김_ (웃음) 전 진심으로 연기할 뿐이라는 거죠. 혹시나 연기가 부족하다고 느껴도 또 한번 가자고 할 자신도 없어요. 왜냐? 더 잘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보통 배우들은 자기 연기를 보고 그래요. “감독님 마음에 안 드시면 한 번 더 가볼게요.” 그럼 감독은 이미 오케이했는데도 그러죠. “아, 예. 한 번 더 가시죠.” 그런 게 다 로스 타임이에요. 그렇게 연기를 다시 하잖아요. 그럼 1분 연기였던 게 1분 30초가 나와요. 그게 뭐냐? 힘이 들어갔다는 거예요.

정_ 사족이 붙었다는 거죠?

김_ 그렇죠. 사족이 무진장 붙은 거야. 억지 표정을 만들어낸 거고. 감정을 막 인위적으로 끌어낸 거고. 그러니까 1분짜리가 1분 30초가 되지. 그럼 감독은 슬쩍 스크립터한테 그러죠. “야, 전에 거 써.”

신_ 배우 앞에선 ‘이번도 너무 좋았다’고 하고?

김_ 그렇죠. 그래놓곤 백 프로 이전 버전을 써요. 그게 다 현장에선 로스 타임이에요.

김명민 - 에스콰이어

정_ 정작 김명민은 촬영 현장에서든 영화 속에서든 스스로를 혹사하는 배우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늘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받아요.

김_ 모든 배우가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거라고 전 생각해요. 자신을 혹사시키면서도 그 역할을 해내려는 배우 정신이 다들 있어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엔 <내 사랑 내 곁에>를 한 다음에 스스로를 혹사시킨다는 인식이 각인된 것 같아요. 너무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인 거죠.

정_ 몸무게 때문이었죠.

김_ 바로 그것 때문에. 10kg만 뺐으면 괜찮았는데 21kg을 빼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죠. 제가 배우를 언제까지 할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자기만족으로 배우를 하는 경향이 크거든요. 어떤 연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열을 얻는 스타일이에요. 내가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도전해보는 편이죠. 그래서 작품 선택도 결과적으로 안전한 것보단 도전적인 걸 좋아하고.

신_ 흥행할 만한 작품보단 도전할 만한 작품을 선택한단 말씀이네요?

김_ 어차피 흥행은 제작사나 투자사가 보잖아요. 배우까지 그쪽을 보고 갈 필요는 없다고 봐요. 흥행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다들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영화를 대하는데 배우까지 그래야 하나? 저는 안전빵으로 세팅된 것보단 조금 더 모험적인 것을 선택하고 싶어요. 저를 찾는 영화를. 꼭 김명민이어야 한다는 영화. 김명민이어도 되고 아니어도 된다는 영화보다는.

신_ 솔직히 모두가 겉으론 이 영화는 꼭 김명민이어야 한다고 말은 하잖아요. 아닌가요?

김_ 그런데 진짜인지는 딱 보면 알죠. 두세 가지 정도의 재료만 놓고 저한테 연기하라는 시나리오가 있단 말이에요. 보면 감독도 대단한 분이야. 배우들도 대단해. 투자 제작진도 대단해. 그럼 이걸 구태여 내가 들어가야 하나 싶어요. 다른 사람이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신인 배우 누가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그런 영화는 안전빵으로 모든 게 흥행 공식에 맞춰져 있어요. 결국 대박 흥행이 나죠. 천만까지도. 전 솔직히 그런 영화는 잘 안 당겨요.

신_ 그런 시나리오를 받아본 적도 있고 거절한 적도 있다는 말씀이네요?

김_ (씨익 웃으며) 그렇죠.

정_ 무슨 영화인지 되게 물어보고 싶네요. 구체적으로 ‘김명민이어야 된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뭘까요?

김_ 캐릭터가 한 열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재료로 요리해야만 할 때.

신_ <하루>는?

김_ <하루>는 재료가 무척 많죠.

신_ 결국 김명민이어야 하는 캐릭터는 복잡다단하고 다층적인 내면을 가진 인물이란 말씀인데. <하루>만 해도 영문도 모른 채 하루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죽자 살자 딸을 구해야 하고. 분명 김명민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김_ <하루>는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결국 인물의 감정이 센 영화거든요. <엣지 오브 투모로우>만 해도 보여줄 것이 많잖아요. 미래에 전쟁에. <밴티지 포인트>도 그랬죠. 반면에 <하루>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끈적거리는 유기적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 감정이 아주 세죠.

신_ 김명민적 인물. 이런 표현에 동의할 수 있나요?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알 파치노의 인터뷰집을 슬쩍 읽었어요. <뉴요커>의 기자가 알 파치노를 책 한 권 두께로 인터뷰한 책이죠. 조금 예전 책이라, 알 파치노가 실베스터 스탤론을 신인 배우라고 불러요. 거기서도 알 파치노는 알 파치노적 인물이라는 표현에 동의하더군요. 운명의 사슬에 걸려 내파되는 인물. 운명에서 벗어날수록 계속 수렁에 빠지는 캐릭터. 그걸 김명민적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김_ 어떤 배우든 그런 캐릭터에 대한 도전 욕구는 다 있을 거예요. 전 첫 영화 <소름>에서부터 그런 인물을 연기해왔고. <소름>으로 영화판에 얼굴을 알린 다음엔 정말 스릴러 시나리오가 물밀듯이 들어왔어요. 50편쯤 받았나? 윤종찬이라는 걸출한 감독이 <소름>에서 저를 심리적으로 이끌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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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_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혼의 상처인 거죠?

김_ 그렇죠.

정_ 영혼에 상처받았는데 그 무렵 들어갔던 영화는 줄줄이 엎어져.

김_ 한 편은 85% 촬영하고 엎어졌어요. 다른 영화는 6회 차 남겨두고. 또 다른 영화는 1회 차 촬영하고.

신_ 현실은 더 황폐했네요.

정_ 김명민은 연예계 인맥이 거의 없다던데 사실인가요?

김_ (웃음) 네. 전 연예계 인맥이 정말 꽝이에요.

정_ 이순재 선생님하고 유지태 씨 정도?

김_ 정작 지태도 만난 지 오래됐네요. 다들 만날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기에 대한 고민 같은 걸 나눌 사람이 별로 없어요.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죠. 왜냐하면 배우들도 각자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만의 연기관이 확실해지거든요. 본인들 각자의 기준치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통할 것 같으면서도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신_ 이젠 김명민적인 색깔이 너무 분명해졌으니까요.

정_ 혹시 <하루>에서처럼 과거로 돌아가면 뭔가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은가요?

김_ 물론 제가 했던 선택에서 후회하는 지점은 좀 있어요. 저는 늘 급행보단 완행버스를 탔던 것 같아요. 다들 성공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려고 하죠. 저는 자꾸 돌아가는 버스를 탔어요. 대신 그 버스 안에서 하고 싶은 걸 했고,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죠.

정_ 다시 돌아간다면?

김_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어떤 기자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비주류 배우냐고.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답했어요. 다만 주류 쪽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런 건 술 한잔하면서 할 얘기지만. 근데 술자리 모임을 저는 진짜 싫어하거든요.

정_ 조바심이 나서 그런 모임에 가는 사람이 많거든요. 크루를 만들고.

김_ 그러니까요. 물론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각자가 대단하죠.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분들이고. 그런데 정작 그런 분들조차 항상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언제 내가 직행버스를 못 타게 될까 싶어서. 전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정_ 그래서 다들 같이 기다리는군요. 직행버스를. 그 모임에서.

김_ 저는 완행버스를 타더라도 제가 원해서 타고 싶어요. 저 스스로 언제든지 가서.

정_ 김명민은 심지어 버스도 타지 않고 맨발로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김_ 그것도 좋아요. 때로는 걸을 수도 있고. 어떻게 매번 직행버스로 갈 수 있겠어요? 저는 아직 어떤 단계를 거치진 않았지만 저를 원하는 감독과 함께 일하는 게 좋아요. 그런 분이 저를 원하면 저는 언제든지 갈 거예요.

신_ 나한테 뭘 원하는지 뻔한 사람보다 나한테 뭘 끌어낼 수 있을지 나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는 작업을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분명 그건 모험일 테고.

김_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그러죠. 김명민한텐 연기력을 주고 시나리오 보는 눈을 주지 않았다. TV에서는 흥행했는데 영화에서는 기대만큼 흥행이 안 된단 얘기. 김명민은 왜 영화가 다 기대만큼 흥행이 안 될까.

신_ <베토벤 바이러스>만큼?

김_ 솔직히 전 신경 안 씁니다. 저는 흥행의 달콤함을 다 느껴봤어요. 안 믿으시겠지만.

정_ 어때요?

김_ <하얀거탑>과 <베토벤 바이러스> 하면서 일본으로 팬 미팅을 다녔거든요. 정말 여고생 수백 명이 저한테 몰려왔어요. 당황스러웠죠. 그게 결코 좋은 게 아니에요. 한 번쯤은 이런 기분이구나 느껴볼 만은 한데, 그거 피곤해서 못살아요. 난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뿐인데 왜 이런 업보까지 감당해야 하나 싶죠. 나는 그저 연기가 좋아서 한 건데 왜 자유를 박탈당해야 하나. 왜 내가 인생에서 이런 불편함을 겪어야 하나. 그런 걸 다 겪어봤어요.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벗어나서 좋죠. 지금 너무 행복해요, 솔직히.

신_ 그런데 여고생 수백 명이 나한테 달려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정_ 편집장님은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요.

신_ 두 팔 벌려 안아줘야 하나?

김_ (무시하며)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죠. <베토벤 바이러스> 할 때였나, 교보문고에서 팬 미팅을 했거든요. 정말 바리케이드까지 무너지고 교통이 마비되고. 저도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봤어요. 사람들이 왜 나한테 이러지? 왜 이러는 걸까? 다시는 이런 드라마 하면 안 되겠다. 진짜 그랬죠. <불멸의 이순신> 할 때는 공천 제의도 많이 받았어요. 높으신 분들과 식사 자리도 많았고.

정_ 그런 건 어떻게 거절하나요. 김명민은 어떻게 거절하는지 궁금하네요.

김_ 고사할 때?

정_ 공천 제의를 고사한다면?

김_ 부탁할 때보다 열 배는 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나 자신을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놓고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부탁보다 거절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신_ 맞다, <리니지2 레볼루션>은 종종 하나요?

김_ 게임 안 해요, 전.

신_ 뭐죠, 이 깔끔하게 거절당한 기분은?

김_ 광고주도 알고 있어요. 저 게임 안 하는 거. 그냥 솔직하게, 안 합니다.

신_ (당황해서 횡설수설) 영화 <조선 명탐정>을 패러디한 광고가 장안의 화제였잖아요. 저와 정우성 에디터의 관계가 딱 <조선 명탐정>의 두 주인공 사이 같죠.

정_ (애써 수습하며) 그럼 여유로울 땐 뭘 하나요?

김_ 혼자 있을 때 더 바빠요. 책을 많이 읽어요. 집 안 곳곳에 책이 놓여 있거든요. 화장실에도 있고 식탁에도 있고. 책을 여기저기 던져두고 잡히는 대로 읽는 스타일이에요. 바빠서 책을 완독은 못 하는 편이에요. 그렇게라도 틈틈이.

신_ (<리니지2 레볼루션> 이후 여전히 횡설수설) 이번 영화 <하루>는 하루가 처음부터 다시 반복되는 얘기잖아요. 자,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정_ 인생을 <하루>로 보면 지금 하루의 어디쯤 와 있는 걸까요?

김_ 제가 마흔여섯이니까, 한 15년은 잠만 잔 거 같네요. 눈 뜨고 생활한 게 30년 정도. 그래서 저는 잠을 많이 안 자요.

정_ 역시 스스로를 되게 많이 괴롭히는 사람이라니까요.

김_ 괴롭힌다기보다는… 자신을 최대한 만족시키면서 살다 죽는 게 제 목표거든요. 전 전생이나 후생도 믿지 않으니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좀 더 확실하게 살다 가는 게 목표죠.

정_ 김명민의 안식은 어디에 있나요?

김_ 그게 안식이에요. 그 자체가.

신_ 김명민의 행복은 어디에 있나요? 행복하세요?

김_ 행복합니다. 일을 쉬지 않고 있으니까.

정_ ‘쉬지 않고’에 작은따옴표를 하고 싶네요.

신_ ‘자지도 않고’가 아닐까?

김_ 잠은 자죠. 언제 쉬게 될지 모르잖아요. 제가 어느 순간에 어떤 계기로 인생의 걸림돌을 만날지 모르니까요. 본의 아니게 쉴 수도 있는 거죠. 제 직업은 항상 미래가 불안하니까. 당장 내일을 모르는 직업이고. 그래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고. 제가 지금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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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KIM CHAM
스타일링신 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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