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볼 시간이 없는 세대

지금 한국에 사는 20~30대에게, TV를 보던 여유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37세 회사원 정기상이 말했다.

“TV를 없앴어요. 몇 년 됐어요.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고, 회사 다니니까 볼 시간도 없었어요. 야근하면 술 마시고 주말에는 운동하거나 캠핑 가거나 해요. 쉬는 날까지 집에 있을 순 없으니까. TV 없어도 괜찮던데요?”

그는 대학생 때만 해도 TV 마니아였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시작할 무렵부터 TV는 습관이자 취미였다. 방에 들어오면 일단 TV부터 켰다.

TV에선 사람 소리가 났다. 혼자 있어도 외로움이 덜했다. TV는 정서적 안정과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생필품이었다. 그게 200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은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클립을 보는 정도다.

“<굿와이프>? 요즘은 그거만 보는 것 같아요. 그거랑 <라디오스타>. 몇몇 장면만 봐도 알겠던데?”

28세 회사원 김정은도 TV를 멀리한 지 오래됐다.

“안 봐요. 아니, 못 본다고 해야 하나? 일단 볼 시간이 없어요.”

출근은 7시 반에 하고 퇴근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정시에 퇴근할 땐 데이트를 하고 야근을 마쳤을 땐 동료와 짧은 술자리를 갖는다. 그렇게 일주일이 다 간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맥주 한 잔, 칵테일 한 잔 정도예요. 회사에서 종일 일했는데, 무능하고 꼴 보기 싫은 상사랑 종일 같이 있었는데, 잠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 정도는 해야 삶이 좀 덜 억울하니까요.

친구들도 다 이렇게 살아요. TV 볼 시간 같은 건 굉장히 사치스럽게 느껴져요. TV는 진짜 여유 있을 때 볼 수 있잖아요. 되게 옛날 얘기 같아요. 그나마 학교 다닐 때쯤?”

TV를 볼 시간이 없는 세대

TV 앞에 가족이 모여서 웃다 싸우다 하던 시간은 이제 뿔뿔이 흩어졌다. 프로그램도 낱낱이 흩어져 각자의 손바닥 위에 있다. 시간은 불평등하고,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어떤 개인의 사정은 집단을 대표하기도 한다. 30대 정기상 씨와 20대 김정은 씨가 말한 대로 TV를 보는 시간과 인구는 실제로 쪼그라들었다.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시청률은 상징적이다. 지난 8월 5일 금요일 KBS 2TV <뮤직뱅크>, 6일 토요일 MBC <쇼 음악중심>, 7일 일요일 SBS <인기가요> 시청률은 모두 2퍼센트 미만이었다. <뮤직뱅크>는 1.2퍼센트, <쇼 음악중심>과 <인기가요>는 각각 1.5퍼센트였다.

이런 프로그램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대도 있었다. 그땐 그 가수들을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에서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오만 가지 방법으로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가수의, 보고 싶은 장면만 볼 수 있다.

방송사도 안다. 음악 프로그램은 본방만을 위해 제작하는 게 아니다. 내로라하는 아이돌 그룹은 아직도 지상파 음악 방송을 1순위 컴백 무대로 삼는다. 한국에서 본방을 마치면 각각의 무대로 쪼개진 동영상 클립을 전 세계에서 본다. 그 클립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이 더 클 수도 있다는얘기다.

올림픽을 보려고 밤을 새우거나 새벽을 기다리는 것도 추억 같은 얘기가 됐다. 박상영 선수의 에페 금메달 확정 순간의 시청률은 지상파 3사를 모두 합쳐 8퍼센트였다. KBS2가 2퍼센트, MBC가 3퍼센트, SBS가 3.3퍼센트였다. 리우 올림픽이 유난히 시들한 탓도 있지만…. 올림픽 특수도, 광고 특수도 없는 새벽이었다.

하지만 방송을 쪼갠 영상 클립의 조회 수는 선전했다. 8월 14일 당시 유튜브 채널 SBS NOW에 올라와 있는 “박상영, 펜싱 에페 최초 금메달…‘제다이 마스터를 봤다’”의 조회 수는 45만9801회였다.

같은 채널의 예능 클립과 비교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다른 올림픽 영상이나 드라마 클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치다. 역시 제시간에 본방을 챙겨 보는 건 별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올림픽 생방송이나 음악 프로그램을 손꼽아 기다릴 때 방송국이 정말로 독점한 건 시간이었다. 그래야 콘텐츠를 누릴 수 있었고, 1990년대에는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7시에 퇴근해서 7시 반에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8시에는 드라마를, 9시에는 뉴스를 보던 시간. 뉴스를 보다가 잠든 아버지 배에 손을 얹고 “아빠, 들어가서 주무세요” 했는데 “아빠 안 잔다” 하시곤 다시 코를 골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대학 졸업 이후의 20~30대가 이루는 가구 형태는 대부분 1인 가구 혹은 맞벌이 부부일 것이다. 그들에겐 시간이 없다.

28세 회사원 김정은은 친구와 한잔하는 날이 아니면 중국어 학원에 간다. 37세 회사원 정기상은 주말에 가족과 캠핑을 가지 않으면 독서실에 간다. 자격증과 승진을 위한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TV는 짬이 날 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잠들기 전에 조각조각 나눠 본다.

각종 디지털 디바이스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지상파 시청률 하락을 촉진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본방송을 제때 챙겨보는 시청자는 은퇴 이후의 장년, 노년층이다.

<인기가요>와 같은 날 방송한 <전국노래자랑>의 시청률은 12.5퍼센트였다. 그 전에 방송한 <가요무대>는 10.1퍼센트였다. 통계청의 2016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2014년 20~64세의 평균 TV 시청 시간은 1시간 43분이다.

65~69세는 3시간 18분, 80세 이상은 4시간 37분이다. 시청률은 노년층이 좌우하는 시대다.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과 더불어 <생로병사의 비밀>이 지상파 시청률 시장의 영원한 강자인 이유다.

1980년대엔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그 앞에선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바꿔 생각하면, 응당 그래도 괜찮은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늘 같은 시간에, 익숙한 사람과, 어제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넋 놓고 즐길 수 있는 시간.

그때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지금 20~30대가 돼서 혼자 혹은 둘이 산다. 그때 가장이고 장년이자 부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은퇴한 노년이 되었다. 누군가에겐 있는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없다.

TV 앞에서 넋을 놓을 수 있는 시간, 가족이 모여서 싸우다 웃다 하던 시간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서 없다. 프로그램도 낱낱이 흩어져 각자의 손바닥 위에 있다. 시간은 불평등하고,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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