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의 세가지 그림자

한미 정상회담에서 해결된 건 없다. 단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한미정상회담 - 에스콰이어

지난 6월 30일 오전 11시 40분(한국 시간 6월 31일 새벽 0시 40분). 한국 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 중 단 두 명만이 한미 공동 회견 현장에 함께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나는 그중 하나였다. 현지 기온이 30도를 넘어선 당일, 뜨거운 땡볕 아래 놓인 백악관 로즈가든의 분위기는 묘했다.

일단 공동 회견 이전에 나올 것이라 했던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문이 좀처럼 나오지 않은 탓에 시차로 인해 마감 시간이 임박한 한국 기자들은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전날 밤 청와대는 “공동성명에 대부분 합의했다”고 호언했다. “회담 전 공동성명을 완성하는 게 상식”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실제로도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 상식이 무너진 것이다. 반면 미국 기자들의 지향점은 달랐다. 그들은 MSNBC 앵커와 트위터로 상호 비방전을 벌인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이와 관련한 발언을 얻어낼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에 앞서 입장한 10명가량의 양측 참모진도 특이점을 드러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백악관 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인 매슈 포틴저와 도·감청을 의식이라도 한 것처럼 착 달라붙어 귓속말을 나눴다. 족히 3분가량의 시간 동안 말이다. 정 실장의 ‘진짜’ 카운터파트, 그러니까 정작 제대로 대화를 나눠야 할 상대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허버트 맥매스터는 의자에 앉아 앞만 보고 있었다. 뭔가 격이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 중국 정상과의 만남 때는 빠짐없이 자리를 지킨 트럼프의 ‘심벌’인 딸 이방카 트럼프가 정상회담과 공동회견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정상. 청와대는 “두 정상이 기대 이상의 인간적인 신뢰 관계를 확실히 구축했다”고 자평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표정이 어색했다. 트럼프가 성명에 없는, 아니 성명과 달리 북한 비난, 한미 FTA 맹공,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목청을 높이자 문 대통령은 입을 꼭 다물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딘가 마음에 걸릴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트럼프도 마찬가지. 2년 넘도록 트럼프의 대선 유세장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쫓아다닌 덕분에 그의 습관이나 표정을 대충 감지할 수 있는데, 이날 트럼프도 분명 기분 좋은 표정과 제스처를 보인 건 아니었다.

결국 공동성명은 정상회담이 끝난 지 무려 7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나왔다. 트럼프는 회담이 끝난 뒤 2시간쯤 후에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함께 뉴저지에 있는 하계 휴양지로 골프를 치러 떠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청와대 측은 트럼프도 없는 백악관에서 최소한 5시간 가까이 공동성명 합의문을 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쩌면 양국 간의 대화가 생각보다 원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한 전직 외교 고위 관리는 “일단 회담이 열리면 다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실제로 공동성명문만 보면 이번 회담은 성공 그 자체다.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남북대화를 재개하려는 문 대통령의 열망을 지지했다”고 했고, “북한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올바른 여건하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열린 입장’임을 확인했다”란 표현도 담았다. 청와대는 귀국 후 장하성 정책실장의 위트와 트럼프의 “오! 와튼스쿨! 똑똑한 분”이란 말이 딱딱한 회담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정 국가안보실장의 6월 말 극비 방미로 맥매스터와 사드 뇌관을 사전 제거함으로써 정상회담 성공을 이끌었다는 자가발전성 진단을 친절하게 덧붙였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내면은 훗날 ‘외교 참사’로까지 회자된 2001년 김대중-조지 W 부시 회담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아니, 매우 흡사하다. 16년 전 당시 성명을 보자. “부시 대통령은 대북 포용 정책을 지지했고 남북문제 해결에 대해 김 대통령의 주도적인 역할을 지지했다. 또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대화가 남북 관계와 동북아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통해 정착한 공동성명문에는 기재하지 않은 진짜 할 말을 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놓고 정작 공동 회견에선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다. 북한과의 모든 합의에 대해 충분한 검증을 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트럼프도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회견에선 “무모하고도 무자비한 북한 정권,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이 인내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란 불평이 나올 만하다. 결론은 역설적으로 본심을 담은 ‘말’ 한마디가 수사로 가득한 ‘공동성명문’보다 중요하단 얘기다.

‘미국 배드 캅, 한국 굿 캅’의 조합은 아슬아슬하다. 북한과는 창구 부재 상황이다. 그러니 지금은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이 누구 덕이니 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실제로 부시는 회담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말대로 행동했다. 공동성명문은 모두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이번에도 같았다. 회담 나흘 만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발사됐다.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는 뿌리째 흔들릴 위기에 놓였다. 다시 원점이다. 참으로 운도 없다. 그나마 운이 좋다면 트럼프에게도 현재 딱히 이렇다 할 대북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에게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100일 계획’을 제안했다. 백악관 소식통에 따르면 이와 병행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마찬가지로 100일의 유예기간을 달라’는 요구도 했다. 그리고 유예기간이 끝나가면서 미국은 중국을 향해 무역 보복을 비롯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기업, 기관, 개인에 대한 제제를 가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카드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미국의 중국 압력에 고개를 숙일 만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이 원유 파이프를 조이는 등의 초강경 조치를 할 것 같은 징후도 없다. 미국도 세컨더리 보이콧 조치를 즉각 시행하는 데에는 신중하다. 미국과 중국이 이미 경제적으로 깊이 엮여 있는 만큼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미국 경제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게다가 설령 중국을 겨냥해 세컨더리 보이콧에 나선다 해도 중국이 ‘네,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북한에 압박을 가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일 가능성도 전무하다. ‘주요 20개국 정상 회의(G20)’ 기간 중 열린 한중 단독 회담에서 “북한은 혈맹”이라고까지 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친북파 원로들을 의식해야 할 11월 공산당 대회를 앞두고 대북 강경 노선으로 선회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카드 고갈이다.

그런 트럼프에게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문 대통령이 고까울 리 없다. ‘그래, 한국! 해볼 수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게 솔직한 트럼프의 심산일 거다. 사드 배치 연기를 놓고도 미국에는 ‘환경영향평가라고 하는 국내적 법적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뒤돌아 중국에는 ‘환경영향평가로 시간을 벌었으니 그 기간 동안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다른 말을 하는 한국의 이중성을 뻔히 보면서도 트럼프가 꾹 참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유예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길어야 100일이다. 단기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트럼프의 ‘원초적 본능’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사드, 한미 FTA, 방위비 분담금의 일괄 청구서가 날아들 것이다. 트럼프가 사드 배치를 연기하자는 한국의 주장에 노발대발하면서 ‘트위터에 쓰겠다’고 하는 걸 참모들이 간신히 뜯어말렸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도 들었을 것이다. ‘한국이 싫으면 주일 미군에 우선 배치하자’는 논의가 트럼프 주변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을 것이다. ICBM 발사 직후임에도 문 대통령이 파격적인 대화 제안을 담은 ‘베를린 선언’을 내놓은 것도 그런 절박함 때문일 게다.

한미 정상회담은 확연하게 눈에 잡히는 이견과 갈등이 있었음에도 어쨌든 ‘문정인 배드 캅(악역), 문재인 굿 캅(소방수 역)’ 콘셉트로 선방했다. 회담 직전 “북한 핵 동결 협상을 위해 한미 공동 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며 ‘미국 내 한국 불안론’을 한껏 고조시킨 문정인 교수의 발언이 문재인 대통령의 안정감을 돋보이게 만든 공헌이 크다. 하지만 ‘미국 배드 캅, 한국 굿 캅’의 조합은 아슬아슬하다. 무엇보다 아군이라 할 수 있는 한국과 미국, 보다 좁혀서 문재인과 트럼프 사이에는 신뢰가 부족하다. 북한과는 창구 부재 상황이다. 그러니 지금은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이 누구 덕이니 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앞으로 100일 후 트럼프의 본심이라 할 수 있는 한미 FTA 재협상, 방위비 분담금 인상은 물론 당분간 봉합해둔 ‘사드 어음’까지 돌아온다. 여전히 한미 관계에 드리운 세 가지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혜로운 100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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