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의 희망고문

한국지엠이 앞으로 펼쳐나갈 사업들은 당장의 허기를 달래는 마음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끝이 났고.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휘발됐지만 조별 예선이 한창이던 당시만 해도 우리는 제법 뜨거웠고 자못 심각했다. 물론 가장 큰 관심은 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였다. 만만한 줄 알았던 스웨덴에 지고, 해볼 만하다던 멕시코에까지 패배한 시점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가 독일을 잡고 멕시코가 스웨덴에 지지만 않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기대는, 애초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고문에 가까운 희망이었다.

두 달여 전 우리는 한국지엠에도 그 같은 희망을 품었다. 무슨 소리인가 할 거다. 한국 철수 가능성까지 불거졌던 한국지엠 이슈는 지난 5월, 산업부와 미국 GM이 자금을 투입하는 걸로 매듭지어진 문제이니 말이다. 크게는 미국 GM이 36억 달러, 산업은행이 7억5000만 달러로 총액 43억5000만 달러를 새로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핵심은 철수 직전까지 갔던 한국지엠을 정상화해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해나간다는 것일 테고. 그러니 16강 진출에 실패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달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둘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딱히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한국지엠이 철수 위기까지 내몰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큰 맥락에서는 딱 하나뿐이다. 한국 내수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미국 GM의 미래 사업 계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2013년까지만 해도 한국지엠은 꽃길을 걸었다. 국내 판매량은 14만~15만여 대에 불과했지만 해외로 수출하는 물량이 꾸준히 60만 대 이상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해 미국 GM이 유럽에서 쉐보레 브랜드 철수를 결정하면서 흙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지엠은 유럽 GM 사업부(쉐보레)의 주력 승용 모델(크루즈, 스파크) 공급원이었다. 공급처가 막히자 당장 한국에서 해외로 수출하는 물량이 뚝 떨어졌다. 2014년 47만여 대로 줄었고 2017년 말에는 39만 대 수준까지 하락했다. 유럽 수출의 전진기지였던 군산 공장도 곧바로 타격을 입었다. 생산량이 빠르게 꺾였고, 연간 26만 대 생산이 가능한 공장이 지난해 겨우 5만500여 대를 생산하는 데 그쳤다. 그중 수출길에 오른 물량은 1만600대가 전부였다. 누가 보더라도 건강한 공장이라 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항간에는 쉐보레 브랜드의 유럽 철수가 한국 사업을 정리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지나친 억측이다. 그보다는 미국 GM에 한국지엠 군산 공장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는 쪽이 차라리 적절한 해석일지 모른다. GM은 2008년 309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월가에서 발발한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6월에는 미국 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을 했고 미 정부로부터 5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까지 받았다.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자동차 회사(General Motors)에서 정부의 자동차 회사(Government Motors)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행보는 예상대로다. 모든 판단 기준을 사업성에 두었고 이에 따라 직원 해고, 브랜드 정리, 생산 능력 감축이 이어졌다.

이 같은 기조는 메리 배라가 CEO에 오른 2014년 이후 한층 강화됐다. 해외 사업부 정리는 그녀가 특히 공들인 작업이다. 전 세계에 휘몰아칠 메리 배라발(發) 칼바람의 명분은 명확했다. “GM이 세계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물어봐야 한다. 특정 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면 그 시장을 떠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것이다.” 결국 쉐보레 브랜드는 유럽에서 철수했고, 호주 사업부인 홀덴은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으며, 유럽 자회사 오펠(독일)과 복스홀(영국)은 프랑스 자동차 기업 PSA에 매각됐다. 이 밖에도 러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공장이 문을 닫고 인도, 남아프리카 사업부가 시장에서 철수했다. GM에 남은 건 실질적으로 자국 시장인 미국과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 정도였다. 하지만 주력 시장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 시장은 돈 되는 차와 안 되는 차의 대접이 판이했다. 저유가와 SUV 인기에 힘입어 판매가 꾸준한 픽업과 SUV는 한층 더 열심히 만들고, 시장의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세단 등 일반 승용차는 없애거나 최소화해갔다. GM은 2016년 이전까지 62%이던 세단 등 승용차 판매 비중을 2020년까지 48%까지 줄여간다는 계획이다.

메리 배라의 계획은 단순히 정리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궁극의 목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신사업 투자와 육성이었다. 때마침 자동차 산업은 전기차와 자율 주행, 공유 경제 등으로 격변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메리 배라의 GM은 부실 사업을 정리해 확보한 자금을 이 같은 미래 신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볼트 EV를 중심에 둔 전기 자동차 라인업 확충에 열을 올렸고 차량 공유업체 리프트, 자율 주행 기술 스타트업 크루즈오토메이션 같은 회사를 인수하는 데 아낌없이 돈을 썼다. GM이 개발생산하는 전기 자동차는 앞으로 5년 안에 18종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2026년까지 전기차 100만 대를 생산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크루즈오토메이션 인수와 함께 준비한 페달 없는 무인 주행 차(크루즈 AV)는 2019년, 그러니까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같은 미국 GM의 체질 변화에 맞물려 생각하면 한국지엠의 경쟁력 약화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한국에서 쉐보레 브랜드의 주력 제품은 말리부와 크루즈 등 중소형 세단과 경차인 스파크, 그리고 소형 SUV인 트랙스 정도에 머문다. 현대자동차가 매달 1만 대 가까이 판매하는 싼타페와 그랜저 같은 고급화된 중형 모델은 존재감조차 없다. 캡티바는 2006년에 출시해 중간중간 부분 변경만 거치며 10여 년을 살아오다 지난해 말 단종됐고, 수입해 판매하는 중대형 세단 임팔라는 월 판매량이 1000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부진하다.

이 중 미국 GM이 각별히 신경 쓰는 모델은 소형 SUV인 트랙스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미국에서조차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세단이거나 오직 한국 시장에서만 유통되는 낡디낡은 절름발이 모델들이다. 볼트 EV, 카마로 SS, 이쿼녹스처럼 미국 GM과 보조를 맞춰 운용할 수 있는 차종이 전무한 건 아니지만 하나같이 미국에서 수입해 들여오는 제품이라 한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고 한국지엠의 자생력 확보에도 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스파크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개발을 주도한 모델도 거의 없어 빠르게 변하는 시장 흐름을 뒤쫓기 어렵다는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지난해 큰 기대를 안고 출시했다가 참담하게 실패한 준중형 세단 크루즈가 대표적이다. 크루즈는 높은 생산원가, 부족한 편의 사양 등 단점이 뚜렷한 모델이었고 한국지엠 역시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 빠르게 개선하고 대응했다면 어느 정도 경쟁이 가능했을 테지만 GM-한국지엠의 설계 프로세스는 한국 소비자의 요구를 기민하게 흡수해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시장 적응도, 연착륙도 실패한 크루즈는 결국 군산 공장 폐쇄의 직접적 빌미로 작용했다.

한국지엠의 CUV와 소형 SUV 상품 전략은 당장의 먹거리일 수는 있지만 미래의 먹거리는 아니다. 그런데도 GM은 전기 자동차, 자율 주행, 무인 주행 차 기술 같은 미래의 먹거리를 한국지엠에 위탁조차 하지 않는다. GM의 글로벌 신차가 등장해도 한국지엠에겐 당장의 허기를 달래는 마음이나 다름없는 까닭이다.

아니다. 군산 공장 폐쇄의 화살을 크루즈에 돌리는 건 부당하다. 애초 한국지엠이 미국 GM의 경쟁력 있는 제품 배정 없이는 생존의 길을 찾기 힘든 ‘수동적이며 생산 기지적’ 제조사인 까닭이다. 한국 정부(산업부)와 미국 자동차 제조사(GM)가 가까스로 짜낸 투자의 조건은 그래서 더욱 반갑기보다 안타깝다. 투자 자금의 규모가 아니라 GM이 배정했다는 신규 차종의 면면 얘기다. 한국과 주요 수출 시장을 위한 CUV 생산, 또 한국과 주요 수출 시장을 위한 소형 SUV의 개발과 생산 계획이 전부다. 요즘 인기인 크로스오버와 SUV라는 점, 트랙스의 경우처럼 수출 시장을 위한 생산에 무게가 실린 점은 반갑다. 하지만 한국지엠의 위기가 쉐보레 브랜드의 유럽 철수 이후 수출 물량이 감소하면서 가속화됐음을 생각하면 글로벌 신차 2종이 한국지엠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관세 전쟁이 한층 격렬해지면 한국지엠이 생산해 (주로 미국으로) 수출할 두 가지 신차 역시 언제 크루즈 같은 처지로 전락할지 알 수 없다.

나아가 CUV와 소형 SUV는 GM에도 당장의 먹거리일 수는 있지만 미래의 먹거리는 아니다. GM이 지금 집중하고 있는 전기 자동차, 자율 주행 기술, 공유 자동차 시대의 구현을 앞당길 무인 주행 차 등은 한국지엠에 위탁조차 되지 않은 채다. 산업부와 GM이 자랑스레 밝힌 글로벌 신차가 한국지엠에도 당장의 허기를 달래는 마음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래도 한국에 GM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를 새로 설치하기로 한 점은 꽤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지엠 관계자의 말이다. 중국을 제외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신흥국 시장을 위한 전략본부 역할을 하게 될 거란 설명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사업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다.

여러 맹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협상 타결과 내용은 불가피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군산 공장의 폐쇄까지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수십만 명의 실직을 막고 일자리 유지는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향후 5년간 지분 매각 제한, 이후 5년간 35% 이상 1대 주주 지위 유지 의무가 부과돼 최소 10년의 시간도 벌어두었다. 하지만 안심하고 넋 놓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2022년쯤 나올 예정인 소형 CUV가 다음 모델로 변경할 즈음이면 10년의 유예기간도 서서히 끝이 보일 터다. 그쯤이면 다시 해당 모델을 한국지엠 공장에서 계속 생산할 것인지, 4년마다 16강 진출의 희망고문에 몸살 앓는 우리 축구계처럼 해당 공장의 유지는 과연 적절한 것인지 같은 문제가 다시 한국을 발칵 뒤집어놓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2018년에 잠시 미뤄둔 한국지엠 생존의 희망고문이 2022년 즈음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당사자인 한국지엠이든 국가 경제를 유지해야 하는 정부든 있는 힘을 다해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10년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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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형준(자동차 칼럼니스트)
출처
3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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