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환율 패턴’ 이번엔 다를까?

한국 경제의 ‘환율 패턴’ 이번엔 깨지나.

1996년 12월,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844원이었다. 놀라운 ‘원화 강세’에 우리는 한국 경제의 힘이라며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사회는 흥청망청 그 자체였다. 하지만 1년 후인 1997년 12월 23일, 환율이 달러당 1962원까지 치솟았다. 원화 약세. 너무나 잘 알려진 IMF 외환 위기에 원화 가치가 폭락했다. 당시엔 ‘한국이 부도난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들려왔다.

2007년 10월 말,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899원이었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다시 급속하게 달렸는데, 이는 국민 모두가 열심히 일해 원화의 가치를 끌어올린 결과였다. 당시 코스피는 2000포인트를 돌파했고, 부동산 시장도 뜨거웠다. 하지만 2009년 3월, 환율은 다시 1600원까지 급등했다. 2008년 말 미국 부동산 시장의 부실로 터진 세계 금융 위기에 원화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그때 코스피는 무려 890선까지 떨어지는 폭락세를 보였다.

그리고 2018년 1월 말 환율은 달러당 1057원대까지 떨어졌다. 원화 강세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1000원 선도 깨진다면서 과거처럼 달러당 800~900원인 시절이 올 것이라는 말도 한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나오게 될까? 혹시 정반대로 올해 900원은커녕 환율이 1200원대로 오르지는 않을까? 이럴 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한국 경제와 환율의 전형적 패턴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선 한국 경제와 원-달러 환율과의 관계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최근 60년간의 흐름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전형적인 패턴이 반복된 것을 알 수 있다.

사이클은 대략 이렇다. 1달러당 1300~1400원대 고환율(원화 약세) 시기에는 서민들은 힘들지만 대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에 박차를 가한다. 수출 가격은 달러로 바꿔 표기되기 때문에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정 시간이 흐르면 대기업들은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기업들이 벌어온 달러가 국내에 풀리고 국내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원화 약세가 원화 강세로 변하는 시기(환율 하락/달러 약세)가 찾아온다. 한국은행 외환 보유고에 차곡차곡 쌓이는 달러와 개선되는 기업 실적을 보고 외국계 투자자들이 국내로 몰려오며 환율 하락은 가속화된다. 다만 이쯤 되면 우리 사회는 다시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값싸진 달러를 마구 빌려 쓰기도 하고, 원화 강세 혜택으로 해외에서 엄청난 소비를 한다. 특히 달러 약세 시기는 저금리 시기와도 겹치는데 이때는 다들 ‘빚’에 둔감해진다. 은행에서 1억원을 빌리는 데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시기가 계속되는 어느 시점에, 환율로 보면 1달러당 900원 전후로 움직이는 어느 날, ‘느닷없이’ 위기가 닥친다. 이럴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거의 10년마다 매번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난 1997년 가을과 2008년 겨울의 그 공포감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이때부터는 환율이 달러당 1200~1300원으로 가파르게 올라가고(원화 약세), 부실기업들은 부도나고, 부채의 역습을 막지 못한 서민들은 빚의 노예로 전락하는 등 한국 경제는 깊은 불황에 빠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화 약세의 매력이 부각되고 위기에서 살아남았던 수출 기업들이 힘을 내면서 앞서 말한 환율 사이클이 다시 돌아간다.

이런 사이클은 대한민국 증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공식과도 같은 패턴으로 움직여왔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고환율 시기(원화 약세)엔 주식은 바닥을 치고, 이후 원화 강세로 환율이 하락하면서 주식이 상승한다. 뒤이어 환율이 아주 급격히 떨어지면(원화 초강세) 증시가 고점을 찍은 후 순간 급락하며 본격적인 하락장으로 접어든다.

 

1년간 10% 원화 강세, 주가는 30% 급등, 그러나…

그간 통계를 보면 이런 사이클 속에서 환율과 증시의 시간 차는 1년 정도라고 한다. 원화 약세가 증시에 주는 긍정적 효과는 1년 후에 가장 크게 나타나고, 원화 강세가 증시에 미치는 악영향 역시 1년 후 가장 극심했다. 여기엔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행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증시가 저평가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디폴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지체 없이 투자금을 쏟아붓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무조건 1년 동안 대한민국 주식을 산다. 바로 기업 실적 개선과 환차익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달러에 1600원일 때 한국 주식을 산 후 1달러에 800원으로 환율이 떨어졌을 때 되팔면 앉아서 100%의 수익을 올린다. 1달러를 내고 1600원짜리 주식을 샀는데 이후 1600원짜리 주식을 되팔면 2달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

게다가 이들은 원-달러 환율이 1600원에서 800원으로 떨어지는 원화 강세 때는 대한민국 주식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패턴을 꿰고 있다. 한국 기업의 기술과 수출 가격 경쟁력이 더해졌을 때 나오는 실적 개선을 그간 수없이 목도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환율을 바로미터로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들은 지난 2007년 원화가 초강세를 보일 때는 주식을 미리 팔아 차익을 실현했고, 2009년 초에 환율이 달러당 1600원까지 오른 원화 약세 때는 절대 겁먹지 않고 외국인을 따라 목돈을 국내 증시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떼돈을 벌어왔다. 이들은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증시만큼 투자하기 편한 곳이 어디 있어?”라고.

그런데 올 들어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원-달러 환율이 1050~1060원대에서 움직일 즈음 갑작스레 주식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5~8% 정도 하락하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순간 10%대 하락을 보인다면 이건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물론 아직 원화 강세 흐름과 패턴이 무너진 건 아니다. 지난 2016년 말 환율이 달러당 1200원대였을 때부터 1050원대까지 계속 하락해 10% 넘는 원화 강세가 지속됐고, 2000포인트였던 코스피가 2600까지 무려 30%나 올랐으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진행돼온 것이 맞다. 다만 뭔가 뒷덜미가 싸늘한 느낌이란 것이 국내 환율 투자 고수들의 전언이다. 지금까지 공식으로만 보면 분명 달러당 1000원이 하향 돌파되는 원화 강세가 나와야 하고, 그때까지 주가는 승승장구하는 게 전형적이기 때문. 그런데 1050원대에서 원화 강세 흐름이 급작스럽게 멈추고, 증시가 급락하면서 혼란에 빠진 것이다.

 

미 10년물 국채 금리 상승의 의미는?

최근까지 ‘코스피 3000 간다’를 외치던 증권사들도 지금은 머쓱해한다. 이들은 왜 자신 있게 코스피 3000 포인트를 언급했을까?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20년 동안 경험한 것을 보면 향후 원화 강세는 좀 더 지속될 것이고, 주가는 더 올라 버블 영역까지 들어갈 것을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원화 강세와 주가 상승이 순간 멈춰버렸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언급되는 재료는 미국 국채 금리의 상승이다. 2%대 초반에서 움직이던 미국 10년물(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월 말부터 요동치더니 갑자기 2.6%, 2.8%, 나아가 2.9%까지 급등했다. 미 10년물 국채는 시중 금리의 선발대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기준 금리를 연 1.5%로 묶어두어도 시장은 이미 3%대 금리를 준비한다는 것이고, 결국 연준도 이제 공식적인 긴축정책의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글로벌 유동성은 굳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위험 자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금리는 한번 상승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1년 넘게 지속적으로 오른다. 그렇다면 많이 오른 주식이나 부동산을 팔아 차익을 실현한 다음, 현금을 들고 있다가 금리 상품에 투입하면 된다. 지금부터는 가만히 앉아 원금 손실 없는 연 3~7%까지 금리(이자율)를 챙기면 그만이다.

원화 강세가 이어지는 현시점에서 많은 투자 고수가 “묘하다”,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상황이 과거 패턴과 유사하지만 전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상황이 조금 묘한 건 인플레이션에 대한 ‘확신’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미 국채 금리가 저렇게 급등했다는 건 이미 시장은 인플레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 국제 유가도 많이 올랐고, 미국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률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지표를 통한 인플레이션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3~4월에는 확연한 물가 상승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거다. 뚜껑을 열었는데 만약 인플레이션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잠깐 덧붙이자면 우리 한국은행도 그렇고, 미국 연준도, 유럽의 유럽중앙은행(ECB)도 자국 국민들을 괴롭히기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 금리 인상에는 반드시 확실한 인플레이션이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저물가 시대가 유지되는데 중앙은행이 먼저 금리를 올린다는 건 좀처럼 예상할 수 없다. 물론 앞서 미 국채 금리가 먼저 올랐다는 건 인플레 가능성을 말한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이걸 보고 주식을 투매한 것이고 주가가 급락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예상과 달리 당장 3~4월에 인플레는 없고 미 국채 금리가 다시 뚝 떨어져버린다면?

 

원화 약세,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확인하라

현시점에서 많은 투자 고수가 “묘하다”,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과거 패턴과 유사하지만 전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인플레이션과 미 국채 금리(또는 시중 금리)의 순서가 그렇다. 과거에는 확실한 인플레이션이 먼저 나왔다. 연 2%, 2.5%, 3% 등 물가 상승이 진행됐고, 이걸 보며 시중 금리가 뒤따라 올랐고, 다시 이걸 확인하며 중앙은행들은 기준 금리를 인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플레 지표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체감 물가가 폭등했지만 미국 소비자 인플레는 아직도 1.9% 수준이다. 게다가 원-달러 환율이 명확한 신호를 주지 않았음에도 시장이 급락한 것 역시 이례적이다. 환율 관련 투자자들은 지금도 원화 강세가 달러당 900원이 아니라 1050원대에서 멈추면서 주가가 급락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

“전 일종의 휩소(whipsaw, 속임수 패턴)라고 봅니다. 다시 원화 강세가 진행될 것이고, 코스피는 결국 2800포인트 이상 계속 오를 겁니다.” (A 증권사 영업총괄센터장)

이들은 이제 다시 급반등이 나올 것이고, 하락이란 이야기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반면, “왜 항상 전형적 패턴이 반복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의견도 있다. 인플레이션을 확인하고 시중 금리가 오르기도 하지만, 시중 금리가 갑자기 올랐다는 건 더 큰 인플레이션을 예견한다는 주장이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꼭 달러당 1000원이 깨지고 900원까지 가는 원화 강세가 나온 후 주가가 조정을 받는다는 자체가 고정관념이라는 말이다.

“앞으로 달러 약세(원화 강세)가 지속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패턴은 깨졌습니다. 당장 3월에 환율이 1100원을 넘으면 어떻게 합니까? 위험관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A 자산운용사 대표)

우린 당분간 크게 두 가지를 보고 대응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원-달러 환율이다. 원화 강세(환율 하락)라면 그간 패턴대로 증시는 다시 급등할 수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원화 약세(환율 상승)로 전환된다면 투자주의보 발령이다. 둘째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다. 공식적으로 2% 넘는 물가 상승률이 확실하게 나와야 긴축정책이 본격화된다. 인플레가 없다면 미 국채 금리도 떨어질 것이고, 금리 인상이란 단어도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패턴’이란 게 꽤 쓸모 있지만 이번처럼 ‘깨진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닌’ 그런 묘한 국면에서는 오히려 부담을 더 키우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예단은 금물이다. 답답해도 기다려야 한다. 패턴은 내가 억지로 꿰맞추는 게 아니라 시장이 자연스럽게 맞춰 움직이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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