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리랑카 외국인 노동자는 죄가 없었다.

에스콰이어 - 풍전등화

풍등이 문제가 아니었다. 고작 풍등 불씨 하나로 폭발해버릴 거였다면 처음부터 저유소의 안전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맞다. 고양저유소는 수도권에 휘발유를 공급하는 국가 기간 시설이다. 풍등 불씨로 인한 화재가 저유소 대폭발로 이어질 때까지 아무런 예방도 방지도 대응도 대책도 없었다.

폭발 이전의 무대응도 문제였지만 폭발 이후의 대응은 더 큰 문제였다. 고양경찰서는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국적의 노동자를 긴급 체포해버렸다. 중실화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 결과적으로 국가 기간 시설의 구조적 실패를 일개 외국인 노동자의 탓으로 돌린 꼴이었다.

그렇게 사건이 뻔하게 종결되나 싶었다. 역풍이 불었다. 대한송유관공사의 실패를 외국인 노동자의 실수로 돌리지 말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솔직히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환영받기 힘든 존재다. 여론의 희생양으로 삼기에 제격이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여론은 집요하게 책임자를 찾아 헤맨다. 사람들은 원인이 없는 사건을 두려워한다. 원인이 없으면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불안하다. 싫다. 세상을 끊임없는 인과관계로 설명하고 싶어 한다.

정작 가장 설명하기 쉬운 사건의 원인은 또 사람이다. 구조적 복합적 원인 같은 건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이 어렵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끝나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대중은 눈에 보이는 원인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를 찾았다. 풍등이나 풍등을 날린 사람이 아니라 더 큰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사회적 약자를 손쉽게 여론 재판하는 것도 거부했다. 한국 사회가 조금씩 진보해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앞으로도 손쉬운 원인에 만족하는 대중의 습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더 큰 원인을 탐구하고 원인이 없는 결과를 납득하는 성숙된 자세도 배워나갈 것이다. 폭발이 유발한 진화다.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