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아이러니

미국은 지금이라도 트럼프를 버려야 한다.

에스콰이어 - 트럼프, 미국, 경제

약 1년 전이다. 그러니까 작년 <에스콰이어> 10월호에 파산에 대한 글을 썼는데 첫 번째 스토리가 바로 ‘네 번 파산한 트럼프, 그런데 재산은 4조원?’이었다. 반응이 꽤 좋았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는 개인 파산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회사는 네 번 파산 신청을 했고 무려 여섯 번이나 기업 회생을 신청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트럼프를 부동산 개발 전문가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애틀랜틱시티의 타지마할 호텔과 카지노, 트럼프 플라자와 카지노, 트럼프 캐슬, 뉴욕의 플라자 호텔,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등은 모두 파산의 희생물이었다. 해당 부동산 사업이 짧은 기간 전성기를 누렸을지는 몰라도 대부분은 파산으로 귀결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35억 달러, 4조원이 넘는 그의 재산은 어떻게 모았을까. 그가 진짜 잘하는 일은 허풍과 바람 잡기, 그리고 고액 연봉(나중에는 고액 출연료)을 챙겨 받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트럼프의 재산 4조원의 대부분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에다 연봉과 TV 출연료, 그리고 트럼프 타워 관련 브랜드 로열티로 모았다(그는 20년 가까이 CEO로서 평균 1200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았다). 그런데 이 ‘파산의 귀재’가 패권국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이제 우리는 트럼프 리스크를 걱정해야 한다. 이 트럼프 리스크가 무서운 건 트럼프 역설(아이러니)과 이중 나선 구조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미국 경제를, 자신과 미국 달러화를, 자신과 중국을, 자신과 북한 비핵화를 단단히 엮어놓고 ‘어디 한번 나를 무너뜨려봐라’면서 배짱을 부리고 있다. 모든 걸 망쳤지만 자기 혼자 살아남았던 트럼프 특유의 ‘파산 기술’을 우리는 이번에도 멍하게 쳐다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트럼프는 싫은데 401K 계좌는 좋네요”

2016년 말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예상을 깬 건 당선만이 아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 경제는 망할 것’, ‘트럼프가 당선되면 세계 증시는 30% 넘게 폭락할 것’, ‘트럼프는 바로 북한을 폭격할 것’ 등의 전망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완전히 틀렸다.

그런데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통해 중요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 세계 정치가 요동을 칠 수 있다. 트럼프의 명운을 가를 미국 중간선거는 11월 6일 실시된다. 연방 상원 의원 전체 100명 중 35명, 연방 하원 의원 전체(435명), 그리고 50개 주 중 36개 주 주지사가 선출된다.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를 장악한 현 상황에서 민주당이 주도권을 찾아올지가 핵심이다.

바로미터는 하원 의원 선거 결과이다. 현재 하원은 공화당이 241석, 민주당이 194석이다. 민주당이 하원에서 230석 이상 탈환하면 완승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이번 중간선거는 2020년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차기 미국 대선 이슈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세계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우리에게는 북미 비핵화 협상 속도와 방향이 결정되는 엄청난 이벤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트럼프의 공화당이 선전한다면 트럼프식 경기 부양은 계속될 것이고 무차별적인 무역 전쟁도 힘을 더할 것이다. 금리 인상도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다. 물론 미국 기준 금리는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트럼프는 통화 정책에 개입해왔다. 2017년 1년간은 특유의 약달러 정책을 몰아쳐 세계 증시와 부동산 시장에 거품을 만들었다. 올해에는 연준의 금리 인상을 통한 강달러 정책을 용인했는데 터키, 아르헨티나,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신흥국의 금융시장은 초토화됐다. 그런데 만약 계속되는 연준의 기준 금리 인상에 본토인 미국 경제까지 흔들린다면 트럼프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연준을 짓누를 것이다. 트럼프니까 가능하다.

반면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다면 미국 경제는 재정비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인위적 부양을 멈추고 기반을 다지는 데 힘쓴다는 것. 연준은 2008년 말 이후 찍어낸 천문학적인 미국 달러화를 거둬들이는 긴축 작업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증시와 부동산에 끼었던 거품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 미국인들은 ‘트럼프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가령 미국 샐러리맨들은 대부분 퇴직연금을 주식에 투자한다. 일명 ‘401K’라고 불리는 퇴직연금 계좌이다. 그런데 트럼프 당선 이후 미 증시 폭등에 대부분 401K 계좌는 폭발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싫지만 401K 계좌를 보면 트럼프가 한 번 더 버블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맘을 갖게 된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역설이다. 우리 국내 금융시장에도 ‘트럼프의 역설’이란 말이 나돈다.

“트럼프? 최악이죠. 하지만 주식, 부동산 시장, 외환 시장 그리고 경제 전반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트럼프가 힘을 유지하는 게 좋죠. 남북문제도 그렇고 말이죠. 그래서 트럼프가 정말 싫지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역설적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파산 전문가 트럼프의 전략은?

실제로 이번 중간선거는 ‘경제 호황’ 대 ‘반트럼프주의’ 프레임으로 전개되고 있다. 트럼프와 공화당의 최대 선거 호재는 유례없는 경제 호황이다. 실업률은 3%대에서 움직이며 50년래 고용 상황이 가장 좋고, 미국 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4%를 넘었다. 실제 체감 경기도 뜨겁다. 미국의 지난 8월 임금 상승률은 2.9%로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국민들도 경제만큼은 공화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공화당이 이번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내주고 패배한다면 금융과 부동산은 불확실성에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반면 민주당은 반트럼프에 포커스를 맞춘다. 트럼프의 비상식적 언행과 섹스 스캔들, 여기에 러시아 스캔들도 숨겨진 시한폭탄이다. 트럼프는 이런 구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서 트럼프를 파산 전문가라고 했다. 자신의 기업, 부동산 프로젝트는 파산했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은 억만장자가 됐다. 먼저 민주당이 압승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솔직히 트럼프는 이번 중간선거에 패배해도 나쁘지 않다고 볼 것 같다. 민주당은 약진할지 몰라도 증시가 하락하고,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 이건 결국 자신에게는 호재라고 본다는 뜻이다.

물론 일국의 대통령이 자국 자산 시장이 요동치는 걸 좋아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지만 트럼프는 가능하다. 당장 선거 다음 날부터 “내가 끌어올린 경제를 민주당이 다 망쳐놓았다”는 말을 무한 반복할 것이다. 하나만 잘못돼도 다 민주당에 뒤집어씌우는 짓을 부끄러움 없이 자행할 거란 이야기다.

반면 공화당이 선전한다면? 트럼프는 기다렸다는 듯 2개의 타깃(적)을 전면에 내세울 것으로 본다. 하나는 중국,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연준이다. 일단 미중 무역 전쟁에 쐐기를 박으려 할 텐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미중 무역 전쟁은 중국도 파멸이지만 중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미국도 엄청난 내상을 입게 된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몰아치는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중국도 엄청난 반격에 나설 거다. 이 과정에서 음모론 경제 서적에 나오는 ‘미국 국채 투매’도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닐 수 있다.

실제로 시장에 미국 국채가 쏟아지면 미국 국채 가격은 급락하고(미국 국채 금리는 급등),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칠 것이다. 혹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싼값에 미국 국채가 나오면 시장에서 바로 소화될 것이라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무리 고가 명품이라 해도 가격이 일단 떨어지기 시작하면 더 싸게 사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 물량이 더 나올 게 확실하다면 최대한 매수 타이밍을 늦출 테고 이 과정에서 미국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세계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의 몰락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트럼프는 이런 상황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미국이 망해간다 해도 트럼프는 ‘중국이 나쁜 놈’이라는 명분 하나만 붙잡고 자신의 살길을 찾는 스타일이니까. 아예 군 산업체를 등에 업고 전쟁 준비를 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타깃, 연준을 보자. 지난 10월 초 증시가 폭락했을 당시 트럼프는 (금리 인상을 이어가는) 연준이 미쳤다고 했다. 과연 세계 어디에, 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에서 중앙은행을 보고 ‘크레이지(crazy)’라고 한 대통령이 있었나. 하지만 트럼프는 지금도 연준을 몰아세우고 있다. 왜 이러는 걸까.

현 상황은 누가 봐도 지난 10년 동안 이어진 빚잔치를 점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한다. 금리를 조금씩 올려서 사람들에게 어서 빨리 빚 갚으라는 신호를 줘야 하고, 모래성 위에 지은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빚잔치는 파산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정 작업은 너무나 아프다. 생각만 해도 치과의 잇몸 주사처럼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연준은 지금 기준 금리 인상을 통해 이 긴축 사이클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입장에서 이건 절대 안 될 말이다. 적어도 2020년 대선까지는 경제가 버텨줘야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계속 연준을 걸고 넘어질 것이다. 뭐라도 잘못되면 연준이 금리를 올려서 그런 거라며 모든 책임을 몰아가는 전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가 말한 ‘연준이 미쳤다’는 훌륭한 논리다. 경제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머리에 마치 정으로 때려 박는 코멘트였기 때문이다. 증시가, 부동산이 폭락할 때 사람들은 무슨 말을 떠올릴까. ‘트럼프가 미쳤다’가 아니라 바로 ‘연준이 미쳤다’이다. 모든 게 미친 연준 때문이라는 거다.

차라리 지금 트럼프를 버려야 한다

솔직히 말해 난 트럼프를 믿지 않는다. 좋다, 싫다의 관점이 아니다. 신뢰의 문제이다. 기자 시절 트럼프 스타일의 인간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리고 많이 당해도 봤다. 나쁜 놈은 차라리 상대하기가 쉽다. 나쁜 놈이니까 멀리하면 되고 싸우면 된다. 하지만 선악이 불분명하고,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 이너서클에 들어가 리더 역할을 하는 스타일의 인간은 대응하기가 너무 힘들다.

지금 많은 미국 국민들은 눈을 감고 있다. 트럼프의 대규모 감세 정책으로 주식과 부동산은 급등했을지 몰라도 이 과정에서 미국 재정 적자는 30% 이상 늘어났다. 미국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빚은 20조 달러가 넘는다. 2경원이 넘는 부채.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액수이다. 그러니까 트럼프가 뭘 잘해서 경제가 좋아졌다기보다 빚으로 흥청망청했다고 평가하는 게 더 정확하다.

하지만 빚을 더 당겨서 한판 더 놀아보겠다는 트럼프에게 사람들은 맘이 끌린다. 눈앞에 닥칠 긴축이 두려워, 내 펀드 수익률이 떨어질 게 걱정돼서, 집값이 떨어지면 엄청난 모기지론을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공포스러워서, 겉으로는 트럼프를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트럼프가 좀 더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체면 때문에 난 못 하지만 트럼프 같은 좌충우돌이 대신 변태 쾌락 파티를 열어주기를 은근 기대하는 거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이미 과거 그의 파산 경력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미국은 지금이라도 트럼프를 버려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혹독한 긴축과 부채 줄이기 작업을 3년 정도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파산은 없고 패권도 지킬 수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로마 제국이, 스페인 제국이, 대영제국이 파산할 때는 전 세계가 흔들렸다. 트럼프 리스크와 트럼프 아이러니. 최소 2020년까지 세계가 받아놓은 어려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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