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마음

사람 입에 들어가겠다고 태어난 생명은 없다.

얼마 전 한 뉴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앞으로 랍스터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넣으면 처벌받는다, 뭐 이런 뉴스였다. 선장이 크루즈선을 버리고 튀었다든가(어딘가 비슷한 일이 벌어진 나라가 떠오르는데), 지중해 앞바다에서 표류하는 난민선을 구해주느냐 마느냐 논쟁을 벌이는 나라에서 말이지. 사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그럴듯하게 사는 나라 중에 시민권을 가진 흑인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다. 유명한 축구 선수 마리오 발로텔리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원숭이라고 야유를 퍼붓는 나라도 바로 이탈리아다. 놀랍게도 그는 이탈리아 시민인데도. 로마 시대에도 공을 세운 흑인에게 이런 대우는 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랍스터와 관련한 이탈리아의 결정은 옳다. 그들이 흑인이나 난민에 대해 싸늘하게 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일 뿐이다. 

랍스터를 산 채로 뜨거운 물에 넣는 건 결코 찬성할 일이 아니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그 녀석들에게는 뇌가 없다지만 분명히 고통을 느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일부 과학자도 있으니, 랍스터 역시 아플 수 있다는 건 당연한 발상이다. 그래서 요리사들은 그 갈림길에서 살짝, 정말 살짝 망설인다.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꺼림칙한 느낌 때문이다. 굳이 생명과 관련된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게 버겁기 마련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그랬다가는 일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셰프의 호통을 들을 것이며, 가게는 매출이 줄고, 손님들은 음식값을 더 지불해야 한다. 행여 이슬람식 할랄 같은 의식을 가져도 좋겠지만 그에 들인 시간과 비용만큼 음식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 유통 구조 중간에 ‘업자’ 하나가 더 끼는 셈이니까. 

랍스터까지는 아니라 해도 비슷한 형제들이 지금도 한국에서 수난당하고 있다. 그래야만 맛있는 내장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 채로 발랑 뒤집힌 채 찜솥에 들어가는 대게와 꽃게가 얼마나 흔한가. 게다가 우리는 랍스터를 접시에 반듯하게 담기 위해 별짓을 다 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랍스터가 익은 후에도 휘지 않도록 젓가락을 꼬리에서 가슴팍까지 푹 찔러 넣는 조치를 수없이 취했다. 만약 랍스터의 피가 무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면 요리사들은 좀 더 피곤했을 것 같다. 피를 철철 흘리는 짐승의 뱃가죽에 꼬챙이를 끼우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피가 무색이든 붉은색이든 그것은 그들의 고통의 무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무색이라고 해서 고통을 덜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도 결국은 순전히 인간의 처지에서 대상을 바라볼 뿐이다. 죽여야 산다! 랍스터가 요리사에게 말을 걸지도 않으므로.

그럴 때마다 변명거리도 충분하다. 기독교 신자라면 신이 주신 권력이라고 말할 것이며,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무언가를 죽여서 먹는 건 보편적인 권리 내지는 운명이라는 논리로 방어막을 세울 것이다. 나도 그렇다. 죽여서 취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좀 더 윤리적인 방식을 고민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이탈리아 경찰이 우리 주방에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만약 오더라도 랍스터 한 마리와 바롤로 와인 한 병으로 어찌어찌 ‘쇼부’를 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여서 취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좀 더 윤리적인 방식을 고민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고 믿는다.

사육과 도살, 요리 과정에 윤리의 덧옷을 입히는 일이 시작되고 있다. 이게 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살 만해지니까 그런 것이다. 분명하다. 서로 평화협정을 맺고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자 사절을 보내던 종족들도 살기 위해 전쟁이 벌어지면 상대방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귀를 잘라 소금에 절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인간이란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쨌거나 다행인 일이다. 먹고살 만해졌다는 것 자체가. 그래서 노동자에게도 더 윤리적인 조건을 제공하고, 죽어야 하는 팔자를 타고났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기술을 쓰도록 감시하게 되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가축을 잡을 때 칼을 써서 목을 치는 것보다 정수리를 내리쳐서 기절시키는 게 낫다는 걸 우리는 알았다. 물론 그것이 보다 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고기 맛이 더 좋다는 이유에서였지만. 그러고는 전기 충격기를 쓰다가 이제는 가스실에 넣어 안락사를 시키듯 도살한다. 그리고 돼지가 씩 웃으며 쾌감에 잠이 들었다가 도살 도중에 깨어나 머리 없는 몸뚱이로 도살장을 돌아다니는 걸 방지하는 기술도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기왕이면 가스 대신 품질 좋은 코카인 같은 걸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돼지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보슈.”

어쨌든 랍스터든, 문어나 낙지든, 닭이나 돼지나 소든 잡을 때 덜 아프게 하는 일은 필요하다. 소의 마블링이 덜 나오더라도 가끔 운동도 시키고(운동장도 최소 공간을 법적으로 만들고), 돈벌이가 되도록 27일 안에 출하하지 못하더라도 기름 솥에 들어갈 운명으로 태어난 닭에게 좀 더 넓은 곳에서 뛰놀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인격적, 아니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한 것 아닌가. 지금까지 늘 해왔듯이 “사람은 잡식동물이니 별수 없어”라는 변명을 또 늘어놓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낙지를 해물탕 냄비에 넣으면서 박수를 치는 오락 프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정말 구역질이 나게 엿 같다. 다 떠나서 스스로가 그 낙지라고 한번 생각해보시라.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는 전해야겠다. “먹기 위해 죽인다. 기왕 죽이면 알뜰하게 먹는다. 다음에 덜 죽이기 위해.” 소설가 한창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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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박찬일(로칸다 몽로 셰프)
출처
3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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