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히어로 시대가 올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히어로가 필요하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우주의 여왕 쉬라>(1985)는 <우주의 왕자>(1983)의 스핀오프였다. 바비 인형으로 여아 피겨 시장은 꽉 잡았으나 남아 피겨 시장에서는 <스타워즈> 프랜차이즈 상품에 밀려 힘을 못 쓰던 장난감 회사 마텔이, 그 시절을 풍미한 보디빌딩 열풍에서 영감을 받아 출시한 남아 피겨 라인 <우주의 왕자> 시리즈 말이다. 마텔사의 여아용 장난감 부서는 <우주의 왕자> 시리즈 소비자의 20%가량이 여아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평소에는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있던 주인공이 악당을 만나면 마법의 힘으로 변신해 자신의 진정한 힘을 발휘하고 우주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내용인데, 성별을 떠나 그 어떤 어린아이가 이런 내용을 싫어하겠는가.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영웅도 만들어주면 매출이 더 증가하겠지. 물론 마텔사에는 이미 바비 라인이 있었지만 바비가 칼을 휘두르고 모험을 떠나긴 어렵지 않은가.

이렇게 축약해놓으니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데, 사실 순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쉬라 피겨를 더 큰 사이즈로 만들려던 여아용 장난감 부서의 시도는 그랬다간 히맨이 약해 보여서 남성성을 위협당하니 안 된다는 남아용 장난감 부서의 저항에 부딪혔다. 쉬라를 히맨만큼 강력한 영웅으로 만들려던 작가진의 시도는 여아용 애니메이션에서 폭력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당대 교육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우주의 왕자> 시리즈가 무리한 확장 끝에 매출이 급감하자 <우주의 왕자> 팀은 <우주의 여왕 쉬라> 팀에게 ‘쉬라 때문에 히맨이 더 이상 강해 보이지 않게 돼서 인기가 떨어진 것’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우주의 왕자> 시리즈는 몇 차례 리부트를 시도했으나 원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히맨과 쉬라는 더 이상 새로운 세대의 소년, 소녀들을 매료시키지 못한 채 옛 추억에 잠겨 살며 피겨를 수집하는 성인 팬들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신세가 됐다. 드림웍스가 제작해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한 리부트판 애니메이션 <우주의 전사 쉬라>(2018)가 공개될 때까지는.

<우주의 여왕 쉬라> 시리즈는 당대 기준으로 최대한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담아내려 노력한 작품이었다. 여자아이들에게 히맨만큼 강인한 여성 영웅을 안겨주자는 지점에서 출발한 작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부트 작 <우주의 전사 쉬라>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32년간의 변화를 작품 안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더 이상 쉬라는 히맨의 쌍둥이 여동생이 아니며, 잘록한 허리나 윗가슴까지 노출하는 의상 등으로 육체를 전시하는 대신 전신을 감싸는 전투 의상으로 무장한 전사가 됐다. 비슷비슷한 체형을 지니고 있던 캣트라나 글리머, 머미스타와 스콜피아 같은 다른 등장인물 또한 저마다 다른 체형의 인물로 새롭게 디자인했다.

소년처럼 마른 몸을 지닌 캣트라, 통통한 체형의 글리머, 덩치가 좋은 머미스타, 근육질의 거구 스콜피아까지, 작품 안의 여성 캐릭터들은 현실 속 여성들이 그런 것처럼 각기 다른 몸과 스타일을 지닌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덕분에 <우주의 전사 쉬라>는 평단의 극찬 속에 무사히 시즌 1을 마치며 프랜차이즈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충성도 높은 신규 팬들 말이다. 쉬라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새 세대의 여성 시청자들이 프랜차이즈에 합류했다.

역사가 오래된 프랜차이즈에 여성주의적인 리터치를 더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오래된 팬보이들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리기 십상이니 말이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를 싫어하는 일부 남성 팬들은 레아 오르가나 사령관(故 캐리 피셔)이 포스를 사용해 우주 공간을 날아가는 장면을 보며 설정을 파괴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레아는 명실공히 세계관 내 포스 최강자인 루크(마크 해밀)와 쌍둥이 남매인데, 포스가 부계 유전이 아닌 바에야 그동안 레아만 포스를 활용하는 장면이 없었던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원작의 주인공들을 전원 여성으로 바꿔 리부트한 <고스트버스터즈>(2016)의 사례는 어떤가? 원작자인 댄 애크로이드와 아이반 라이트먼이 제작자로 참여했고, 원작의 출연진인 댄 애크로이드와 빌 머레이, 어니 허드슨, 애니 포츠, 심지어 시고니 위버까지 카메오로 출연해 작품을 축복해줬다. 로튼토마토 지수도 원작 <고스트버스터즈>(1984)가 기록한 97%보다는 낮은 74%이지만 속편 <고스트버스터즈 2>(1989)가 기록한 53%와 비교하면 준수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2016년판 <고스트버스터즈>는 올드 팬보이들과 소모적인 입씨름을 하느라 관객들에게 제대로 평가받는 데 실패했다.

<우주의 전사 쉬라>와 2016년판 <고스트버스터즈>의 성패를 가른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제작하는 이온 프로덕션스의 수장 바버라 브로콜리의 말이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의 말을 듣기 전에 배경 설명부터 하자. ‘대니얼 크레이그의 뒤를 이을 차기 본드는 누가 될 것인가’는 오랫동안 많은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하는 질문이었는데, 전통적인 영국인 백인 남성 배우들 사이로 유색인종 배우나 여성 배우를 거론하는 팬들도 종종 있었다.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는데 본드 캐릭터도 재해석의 대상이 되지 말란 법은 또 어디 있나.

게다가 2018년 초, 자의와는 상관없이 툭하면 ‘최초의 유색인종 본드’ 후보로 거명되느라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데 진절머리가 난 이드리스 엘바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여성 본드는 어떤가요?”라며 공을 옆 코트로 걷어내며 ‘여자 본드’라는 상상이 보다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마침 시기도 좋았다. BBC <닥터 후>는 55년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여자 닥터를 선보였다. <오션스> 프랜차이즈의 최신작 <오션스 8>(2018)은 도둑들부터 빌런까지 전원이 여성이고, 마블사의 코믹스 <캡틴 마블> 또한 원조 ‘마벨’에서 여성 ‘캐롤 댄버스’로 세대교체가 끝났다. 이런 마당에 제임스 본드라고 여자가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러나 이 논의는 바버라 브로콜리 앞에서 멈췄다.

지난 10월 그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이다. “본드는 남자입니다. 남자 캐릭터로 쓰였고, 아마 앞으로도 남자일 겁니다.” 바버라 브로콜리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일단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본드는 1950년대의 산물이에요. 그의 DNA에는 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요. (중략) 남성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기보다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그들에게 걸맞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냅시다.”

바버라 브로콜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만하다. 앞서 호명한 <닥터 후>나 <오션스 8>, 캡틴 마블과 제임스 본드는 다소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닥터 후> 속 닥터는 육신의 수명이 다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육신과 성격으로 재생성하는 외계인이니 여성의 육신으로 재생성하는 게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다.

<오션스 8> 속 데비 오션(샌드라 불럭)도 그렇다. 그는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의 여자 버전이 아니라 대니의 여동생이다. 영화판에서는 설정이 다소 다른 모양이지만 캡틴 마블 캐릭터 또한 남성 캐릭터가 여성 캐릭터로 성 전환한 것이 아니라, 1대 캡틴 마블이 퇴역하면서 그 옆에서 조력자로 활약하던 ‘미즈 마블’ 캐롤 댄버스가 2대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설정이다.

본드는 다르다. 1952년 첫 소설 <카지노 로얄> 이래 60여 년간 쌓여온 설정은 본드를 ‘스코틀랜드인 앤드루 본드와 스위스인 모니크 들라크루아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가 고아가 된 뒤 기숙학교에 들어간 바람둥이 난봉꾼 스파이’로 못 박아두고 있다. 결국 설정을 뒤트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랬다가 자칫 영화 자체로 평가받기보다는 ‘성별 전환이 적절했는가’라는 불필요한 논란이 작품을 집어삼킬지 모른다.

<고스트버스터즈>가 겪었던 악몽이 아직 생생하지 않은가. 에밀리 클라크가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보드카 마티니를 손에 쥐고 카지노를 활보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만, 프랜차이즈의 올드 팬들의 비난 때문에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거란 상상까지 짜릿하지는 않다.

물론 남성 배우들이 도맡아 해오던 아이코닉한 배역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벤딩 캐스트는 그 자체로 전복의 의미를 지닌다. 필리다 로이드가 모든 배역을 여성으로 캐스팅한 <줄리어스 시저>와 <햄릿> <템페스트>를 연이어 연극 무대에 올리며 영국 연극계를 뒤흔든 사례처럼 말이다. 젠더벤딩 캐스팅은 연기에 남성적인 연기와 여성적인 연기의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여성이 주연으로 설 만한 작품의 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하지만 무대에 올릴 때마다 매번 캐스팅을 바꿔가면서 새롭게 해석되는 연극과 오랜 세월 팬들을 조련하며 연속성을 이어온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가 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고스트버스터즈>처럼 준수한 결과로 이어진다 해도 ‘원래는 남자 배역이었으나’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으면 그 자체로 평가받기 어려워진다. 오리지널리티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여성 배우를 위한 캐릭터와 서사를 많이 만들어 오리지널리티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향이 더 안전하고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전사 쉬라>의 성공이 암시하는 바도 이와 같다. 스핀오프 시리즈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작 <우주의 여왕 쉬라>는 쉬라에게 온전히 그만의 시리즈를 부여해주고 그가 주인공으로 활약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열어주었다. 새로운 디자인과 설정 변경에 분개하는 일부 올드 팬보이들의 반감에도 과감한 재해석을 거친 리부트 <우주의 전사 쉬라>의 성공이 가능했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조지 밀러가 자신이 창조한 가장 마초적인 세계인 <매드 맥스> 유니버스 안에 맥스만큼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 전사인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와 부발리니 전사들을 출연시켜 여성주의적 리터치를 성공시키고, 오랫동안 잠재적 ‘여성 본드’ 후보로 거론됐던 샤를리즈 테론이 여성 슈퍼 스파이 영화인 <아토믹 블론드>(2017)를 제작해 성공시킨 것처럼. 우리에게는 더 많은 독립된 여성 영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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