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참사 시대

현대인은 미디어 유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요즘 미디어는 마약 판매상 같다.

“지금 보실 영상은 시청자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충격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종 뉴스를 보다 보면 접하게 되는 문구다. 폭발이나 붕괴 같은 충격적인 사고의 순간을 담은 영상, 혹은 폭행이나 납치, 강간 시도 등의 범죄 순간을 담은 영상이 뉴스를 통해 공개될 때면, 방송사들은 저 문구를 내걸어 보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경고이기만 할까? 사건이 누구의 책임인지 알아내기 위해 반복해서 장면을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데 충격적인 장면을 고스란히 내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방송에서 저 문구를 내건 리포트가 나올 때면 한 번쯤은 의심해봐도 좋다. 과연 진실 보도가 목적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구경거리인 싸움 구경, 불구경을 제공해 흥행을 도모하는 게 목적인가.

일찌감치 뉴스 보도를 통해 충격적인 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흥행을 도모한 나라로는 미국이 있다. O.J. 심슨이 흰색 브롱코를 타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던 날, 도미노피자는 기록적인 배달 주문을 받았다. 아무도 TV 앞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직접 밥을 차려 먹으러 주방에 가는 대신 전화로 피자를 주문했던 것이다. 하물며 도미노피자도 그런 마당에 그걸 직접 생중계한 방송사들이 올린 수익은 어땠을까. 미국 본토가 침공당한 첫 사례인 2001년 9·11 테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안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당연히 보도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탈출구를 찾지 못한 희생자들이 끝내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보여줘야 했을까 하는 질문에는 확답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뒤를 이은 제2차 걸프전 보도는, 아예 미군이 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면서 미군의 신무기가 지닌 위력을 과시하는 기술의 전시장으로 전락했다.

모름지기 약도 많이 팔아본 사람이 부작용을 더 빨리 알게 되는 법이다. 뉴스에서 연일 충격적인 영상을 여과 없이 방영하는 나라인 만큼 미국은 미디어가 촉발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에 관한 연구 또한 활발히 일어나는 나라다. 대표적인 예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 정부 청사 폭탄 테러 사건 보도다. 사건의 유가족을 추적해 조사한 결과, 관련 보도를 자주 접한 사람이 표출하는 스트레스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가족들이 지닌 상처의 깊이야 모두가 대동소이하겠으나, 미디어의 보도를 접하는 이들은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반복해서 사건을 경험하는 듯한 충격을 입었다. 테러의 직접적인 피해자나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 결과는 6년 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통해 한층 더 보강된다. 9·11 테러 이후 이뤄진 광범위한 조사는 직접적으로 9·11 테러에 가족이나 지인이 희생되지 않은 이들조차 반복적으로 영상을 접하면 PTSD에 시달리게 됐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반대 집회에 나갔던 사람들이라면, 전투경찰에게 폭행당하다가 안전을 도모하겠다고 버스 아래로 몸을 굴려 피하는 집회 참가자의 영상을 볼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할 것이다. 혹은 용산 참사 현장을 기록한 영상을 보며 “여기 사람이 있어요!”라고 울부짖는 이들의 절규를 들을 때, 평택 쌍용자동차 옥쇄 투쟁을 강제 진압하는 경찰의 영상을 볼 때 고통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와 눈물, 불꽃과 연기, 전투경찰과 경찰 헬기… 이런 이미지를 볼 때마다 나는 숨 쉬기가 어렵고 잠을 설친다. 아마 나 혼자만이 아니리라. 숭례문이 불에 타오르다가 끝내 현판을 떨구며 무너져 내리는 영상, 혹은 더 참담하게도, 진도 앞바다 수면 위에 올라온 세월호의 선미 영상을 볼 때마다 눈물을 떨구는 이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물론 자극적인 줄 알면서도 피치 못하게 봐야 하는 장면들도 있다. 2015년 민중 총궐기 집회에 나선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직사로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가슴 아프고 충격적이다. 그러나 경찰이 시위 진압 매뉴얼을 어기고 물대포를 직사로 조준해 사격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기에 잘잘못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영상을 피할 도리가 없다. 심지어 극우 세력들이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 때문에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 그를 구하는 척 가격하는 빨간 우의 차림의 남자에게 부상을 입은 것이다”라고 우기는 바람에 우리는 부득이하게 그가 쓰러지는 참담한 광경을 반복해서 봐야만 했다. 우리는 참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리는 결정적인 증거이기에 밀려드는 공포와 충격을 견뎌가며 2008년 용산 참사 기록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 봤고, 해경이 구조 작업에 소홀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이기에 세월호가 가라앉던 2014년 4월 16일 아침의 영상을 집요하게 보아야만 했다.

문제는 이렇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닌 사안조차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를 뉴스의 탈을 쓰고 유통시키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미디어 입장에서 할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다. 본디 뉴스라는 게 길게 논리를 풀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장의 이미지가 지닌 설득력이 더 세다. 베트남전 반전 여론을 강하게 이끌어낸 건 AP통신의 닉 우트가 찍은 ‘네이팜탄 소녀’의 참혹한 사진 한 장이었다. 인류의 도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마침내 인간을 달 표면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주는 감격은, 이렇게 길게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닐 암스트롱이 찍은 버즈 올드린의 사진 한 장으로 설명하는 게 더 간단하다. 하지만 뉴스 피드에 쏟아지는 수많은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이 죄다 그만큼 중대한 뉴스의 가치를 지녔는가? 우리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면 뉴스의 시청률과 클릭 수가 오른다. 어차피 “지금 보실 영상은 시청자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충격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경고했으니, 그 이미지를 보고 시청자가 PTSD를 얻든 말든 그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태도다.

리스티클 기사나 바이럴 기사를 생산해 클릭 수 장사를 하는 뉴미디어 언론만 그런 게 아니다. 신문과 방송이라고 하등 나을 것이 없다. 지난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전 원내대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언론은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유명 정치인의 죽음이니 그 죽음의 내막을 소개하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언론은 노 전 대표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 외에도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 그가 죽음을 선택한 장소, 당일 그의 이동 동선과 마지막 행보 같은 정보가 우후죽순 격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망 장소에 쳐진 파란색 감식 텐트와 국립과학수사원에서 나온 감식반원들이 찍힌 사진이 온 인터넷에 퍼졌다. 국가 기간 통신사인 <연합뉴스>부터 진보 언론의 맏형을 자처하는 <한겨레>까지, 모두가 그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송고했다. 어느 선까지가 공익적 목적을 위한 보도이고 어느 선부터가 보는 이들에게 PTSD를 유발할 만한 정보인지에 대한 판단을 그날 언론은 유보했다.

심지어 그날, ‘어느 선까지가 적당한가’를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자극적인 모습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나’를 고민한 언론도 있었다. TV조선과 연합뉴스TV는 노 전 대표가 실린 앰뷸런스를 따라가면서 그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을 생중계했다. 고인에 대한 무례이자 시청자들에게 불필요한 충격을 배가시키는 보도일 뿐 아니라 정보의 가치도 찾아보기 어려운 최악의 보도 참사였다. 특히나 TV조선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앰뷸런스 유리창을 클로즈업하는가 하면, 엄성섭 앵커는 “화면으로 보여드리는 바로 저게 지금 현장 라이브”라고, “경찰차와 함께 지금 보이는 구급차가 사고 현장에서 병원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는 장면을 저희가 보여드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연합뉴스TV 공채 2기 기자들은 성명을 내고 자사의 보도가 ‘한국 저널리즘 역사에 최악의 자살 보도 사례’로 남을 것이라고 규탄이라도 했지, TV조선에는 그 정도의 면피도 없었다. TV조선은 노 전 대표를 처음 발견한 아파트 경비원이 시신의 상태를 묘사한 내용 또한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전했으며, 이와 같은 보도 태도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없이 계속 노 전 대표의 사망을 교묘하게 조롱했다.

사실 언론은 노 전 대표가 사망하기 전부터 사건을 보도하는 대신 보도를 저질렀다. <조선일보>는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인 7월 21일 ‘노동자 대변한다면서 아내의 운전기사는 웬일인가요’라는 제목의 기자 칼럼을 통해 후보 부인 수행을 위해 운전을 한 자원봉사자를 운전기사로 둔갑시켰다. “아내 운전기사까지 둔 원내대표의 당이 ‘노동의 희망, 시민의 꿈’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의당’이라는 당명은 과연 이 상황에 어울릴까.” 잘나가던 진보 정치인의 몰락이라는 이슈의 파급력에 눈이 멀어, 노 전 대표 측이나 당의 공식 채널을 통한 사실 확인 따위는 하지 않고 내보낸 기사였다. 무엇을 어느 선까지 보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슈 파급력이 높은 기사를 생산해 보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걸 언론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이슈가 되는 사안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흥행을 위해 남의 이미지를 몰락시키며까지 자극적인 이슈를 만들어내고, 비극이 터지면 그 비극의 가장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면을 골라 전시한다. 장사가 된다면 타인의 인생이 망가져도, 보도를 접한 이들이 다시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입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언론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윤을 위해 미디어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충격과 공포를 주입하고 PTSD를 유발하는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기에 적당한 용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마약 판매상 같은 단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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