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고고학자들

물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데요, <인디아나 존스>라는 제목은 안 쓰면 안 됩니까?”

멀리 바다가 보이는 2층 건물에서 남자가 물었다.

“네?”

“<인디아나 존스>는 도굴범입니다. 저희가 하는 건 발굴인데,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얼마든지 없앨 수 있어요.”

남자와 나 사이에 일본 영화에 나올 법한 침묵이 흘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연구원들. 위부터 양순석, 허문녕, 노경정이다. 양순석은 보존 처리 전문가에서 시작해 지금 한국 최고 경력의 수중 발굴 전문가다. 허문녕은 이곳으로 발령을 받아 수중 발굴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맑은 바다에서는 다이빙을 해본 적이 없다. 노경정은 수중 발굴에 뜻이 있어서 이 연구소에 들어왔다. 곧 외국의 수중고고학 연구소와 교류를 하러 간다.

내 맞은편에 앉아서 이 이야기를 한 남자의 이름은 노경정이었다. 머리를 짧게 잘라 단정해 보이는, 왠지 공무원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인상도 말투도 헤어스타일도 모범생 사무직 느낌이었지만 일반 사무직 직장인과 하나가 달랐다. 피부색이었다. 그는 늘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많이 탔다. 그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그랬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서 잠수를 직업 삼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한 군데가 해경이다. 해경의 인명 구조를 담당하는 곳에 직업 잠수부가 있다. 다른 한 조직은 의외로 문화재청 소속이다. 문화재청 책임 운영 기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가 그 주인공이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교육을 받고 바다에 들어가 발굴 활동을 한다.

노경정은 수중고고학을 하고 싶어서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수중고고학이라는 고고학 분야를 알게 된 후 수중고고학으로 석사 논문을 쓰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수중고고학 발굴 활동을 하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왔다. 그도 이제 잠수 베테랑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셈이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보통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망설이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느낌이 없다. 그렇다고 초조하게 눈앞 50cm만을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느낌도 없다. 그냥 해오던 일을 자기 속도에 맞춰서 해나갈 뿐이다. 노경정은 그 기운으로 우리를 만나 이야기해주고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러다 일 이야기를 할 때의 노경정은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수중 발굴의 위험성을 말하면서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아직 외부에 아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해도.

노경정의 자부심은 이해할 만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자랑스러운 일을 충분히 많이 했다. 신안 앞바다와 태안에서 수만 점의 문화재를 발굴했다. 갯벌 속에 잠겨 있던 옛날 유물을 찾아내 소중한 고고학적 증거를 일반인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특수한 환경 아래의 수중고고학적 유물 중에는 땅 위에서는 보존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들은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실수의 씨앗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한반도 서쪽 바다 지형의 특징인 갯벌 덕분이다.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에 가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유물을 볼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은 그 자체로 드문 볼거리다. 보통 박물관에 가면 접시나 도자기가 하나씩만 놓여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 제2전시실 신안선실에는 그 귀한 청자가 이케아 매장처럼 포개져 있다. 보통 박물관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수중고고학이 시작되었다. 이 도자기들을 발굴한 곳은 신안 앞바다, 1970년대의 신안 앞바다가 한국 수중고고학의 수원지다.

그때 유물을 가져온 사람들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자들이 아니라 해군 잠수부였다. 처음부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사들이 바다로 내려갔던 건 아니다. 그 시절의 사진이 신안선실에 아직 붙어 있다. 몸이 큰 남자들이 갑판 위에 단체로 서 있는데 그 앞으로 도자기 뭉치가 보인다. 어민의 제보를 받고 해군 잠수부들이 파견되어 청자를 발굴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국가직 중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은 해군 잠수부뿐이었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 유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수중고고학 발굴품을 방치하면 바닷물을 머금었던 유물의 수분이 마르면서 여러 안 좋은 일이 생긴다. 나무는 모양을 잃고 주저앉고, 자기류는 바닷물이 마르면서 흰 소금 얼룩이 달라붙는다. 보존 처리를 해야 한다. 목포에 보존 처리장을 만들기로 했다.

조타실 안에 있는 작은 불상. 바다의 변화무쌍함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저도 처음엔 유물보존처리반이었어요. 보존 처리를 전공했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잠수해서 수중고고학 발굴을 하게 된 거예요.” 그 ‘어쩌다 보니’ 때문에 그는 수중 문화재 지표, 발굴 조사라는 아주 희귀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유물보존처리반으로 시작했어요. 그때는 제가 막내였어요.” 역시 머리가 짧고 얼굴이 탄 양순석이 회상했다. 양순석은 지금 10명인 수중발굴과 공무원 중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다. 노경정은 양순석을 일러 ‘한국 수중고고학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했다. 보통 그런 사람 중 정말 훌륭한 공적이 있다면 자기 앞에 놓인 칭찬을 부끄러워한다. 양순석도 그랬다. 그는 일을 해온 것뿐이었다는 투의 말을 많이 했다. “저도 처음엔 유물보존처리반이었어요. 보존 처리를 전공했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잠수해서 수중고고학 발굴을 하게 된 거예요.” 그 ‘어쩌다 보니’ 때문에 그는 수중 문화재 지표, 발굴 조사라는 아주 희귀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양순석은 수중 문화재 지표 발굴 조사를 총괄하려면 관련 경력이 최소 5년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 그 경력을 충족해서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은 3명 정도에 불과하다.

양순석이 줄여 말한 ‘어쩌다 보니’에는 긴 이야기가 있다. 그중 가장 큰 변수는 의외로 북한이다. 북한은 한국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데 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신안선을 발굴할 때는 현장 발굴을 해군에 의뢰했다.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배 위에서 해군이 출토한 유물을 분류하고 육지로 돌아와 보존 처리했다. 그런데 2002년 연평해전이 터지자 해군 측에서 ‘연평해전 때문에 잠수 인력이 모자란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 전부터 (저희 측에서 잠수 인력을 키우는)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을 기점으로 저희가 수중 발굴을 시작하게 된 거죠.” 양순석이 회상했다. 바닷속에 유물을 발굴하러 들어가는 공무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수준인 유물 발굴선 누리안호의 내·외부. 이날은 낙월도 해역 조사를 일부 마치고 잠시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아래편의 큰 닻들이 정박을할 때 쓰는 추가 닻이다. 다이버 장비 역시 모두 선박 안에 보관한다. ‘잠수중’ 현수막이 붙은 배는 소형 탐사선 씨뮤즈호다.

이들을 취재하는 과정은 나 스스로가 다이빙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들이 일하는 곳에 가면 다이빙 슈트나 관련 장비를 바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장비는 다 배 안에 있죠.” 장비가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노경정이 답했다. 얼굴만 보고서는 ‘이 사람들이 다이빙을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본 수중발굴과 사람들은 얼굴이 까만 편이라는 것 말고는 그냥 보통 공무원 같았다. 시계 담당이니까 다이버 시계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시계는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에요. 순토를 찹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 같은 건? “국민 세금으로 그런 시계를 어떻게 사겠습니까.” 이들은 모두 프로 다이버였다.

시계 브랜드를 비롯한 유럽의 미디어와 기업은 다이버를 낭만적인 과학자 집단으로 묘사한다. 프랑스의 장 자크 쿠스토나 <그랑 블루>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세계 수중고고학계에서 가장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프랑스는 로봇 등을 이용해 심해 유적 발굴까지 시도합니다. 저희도 프랑스와 교류하고 있고요.” 처음 취재하러 간 날 노경정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 놀랐다. 수중발굴과 분들께는 죄송한 고백이지만, 이렇게 세계 수준의 이야기를 목포의 바닷가 근처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나를 비롯한 서울 거주자 중에는 ‘괜찮은 건 다 서울에 있다’는 몹쓸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그게 편견이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들은 세계 수준의 수중고고학 발굴 성과를 내며 여러 나라와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당장 노경정만 해도 이달 말에 스리랑카로 발굴 조사를 떠난다. 활발한 국제 교류의 결과 아주 수준 높은 전시도 진행한다. 해외 수중고고학 연구소와의 교류전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16년에 중국 광둥성 박물관과 공동 주최로 명나라 시대의 청화백자를, 2017년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과 <대항해시대, 베트남 난파선> 전시를 열었다.

도자기는 동서양 교류의 직접적인 흔적이자 당시 무역 현황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사료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잘 만들어졌다면 보자마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물건이다. 몇 세기 전만 해도 중국과 유럽이 무역을 하면 중국은 서양에 팔 게 많고 서양은 중국에 팔 게 없었다. 그때 중국이 서양에 팔았던 대표적인 게 도자기다. 지금의 중국인이 서양 명품을 사듯 그 당시의 유럽인은 동양의 고급 도자기를 샀다. 한때 중국은 무역 제재 조치로 유럽을 상대로 도자기 생산과 판매를 중단한 적이 있다. 그때 중국의 빈자리를 대신해 베트남이 청자를 만들어 팔았다. 이 전시는 이렇게 도자기를 통해 당시의 세계 교류 상황을 알려주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전시된 유물. 위와 아래의 청자가 보물 제1738호 청자 상감 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무늬 매병이다. 작은 사진 속 줄이 매달린 대나무가 당시의 택배 송장 역할을 하던 죽찰이다. 이 외에도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고려 시대의 아름다운 청자를 많이 볼 수 있다. 무료 입장.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쉰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처음부터 이렇게 풍부한 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건 아니다. 공무원 조직은 엄격하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예산도 없다. 양순석이 말해준 초기 해양 문화재 발굴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열악했다. “농약 호스 물고 들어갔어요. 산소를 공급하는 파이프가 좋은 건 몇백만원씩 해요. 비싸면 산소 케이블과 통신 케이블 등등 다양한 기능이 붙거든요. 그런 걸 살 돈이 없으니까 아쉬운 대로 호스라도 물고 들어갔죠. 배도 어민들이 쓰시는 어선을 빌려서 갔어요. 위험했죠.” 이들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중요한 발굴을 여러 차례 해냈다.

“많이 나갔어요. 2008년에 태안선 발굴할 때 뽑은 인원은 지금 아무도 없어요.” 양순석이 힘든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표정은 좀 특이했다. 그 표정에는 분노도 억울함도 없이, 그냥 ‘힘들었으니까 나간다’는 사실만 있었다. 일이 어렵고 바다가 무서우면서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안 보여요. 바닷속에서는 앞이 하나도 안 보여요.” 지금 진행 중인 낙월도 해역 조사를 지휘하는 허문녕이 말했다. 그 역시 얼굴이 까맸다. 허문녕은 손을 들어 얼굴 앞으로 올리며 말했다 “시계가 안 좋으면 이렇게 해도 제 손이 안 보여요. 서해가 갯벌이잖아요. 시계가 굉장히 안 좋아요. 발굴 난도도 높은 편에 속해요. 지금 서해에서 쓰는 장비는 전 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어요. 서해가 그 정도로 안 좋아요.” 노경정도 덧붙였다. “예전에는 육지를 따라가는 연안 항해를 많이 했죠. 그런데 서해는 조수 간만이 크고 다니기에 어려운 해역이 많았습니다. 해양 유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난파된 배가 많다는 거고, 그건 그만큼 이쪽 바다가 물살이 세고 발굴하기 어렵다는 거죠.” 허문녕은 수중고고학을 잘 모르다가 문화재청 학예연구원으로 합격해 이쪽으로 발령을 받아 다이빙을 하게 된 경우다. 그 전에는 다이빙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물이 맑은 곳에서의 레저 다이빙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다이빙은 직업이다.

초기 해양 문화재 발굴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열악했다. “농약 호스 물고 들어갔어요. 산소를 공급하는 파이프가 좋은 건 몇백만원씩 해요. 비싸면 산소 케이블과 통신 케이블 등등 다양한 기능이 붙거든요. 그런 걸 살 돈이 없으니까 아쉬운 대로 호스라도 물고 들어갔죠. 배도 어민들이 쓰시는 어선을 빌려서 갔어요. 위험했죠.”

양순석 같은 사람이 고생하는 동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꾸준히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지원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 유일의 해양 유물 탐사선인 씨뮤즈호를 거쳐 누리안호가 만들어졌다. 두 배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특수 선박이다. 씨뮤즈호는 잠수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스크루 없이 빨아들인 물을 분사해서 나가는 ‘펌프 제트’ 방식으로 건조했다. 씨뮤즈호에 실려 있는 해양 탐사 장비는 선박의 건조 가격보다 고가이다.

마침 취재를 간 날, 낙월도 해역에서 돌아온 누리안호가 정박해 있었다. 누리안호는 2012년 취항한 수중 발굴 인양선이다. 290톤의 무게에 길이가 36.4m로 꽤 컸다. 대형 버스로 분류되는 고속버스가 11.6m니까 버스 세 대의 길이보다 조금 더 길다고 생각하면 된다. 누리안호는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 안에 각종 선실과 기관실을 두고 있었다. 누리안호 역시 감압 체임버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특수 잠수 장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누리안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수중 발굴 인양선이기도 하다.

특별히 허가를 받아서 관공서 부두에 정박해 있는 누리안호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배 안 벽에 장착된 이동통신 3사의 간이 기지국이었다. 기지국이 필요할 정도로 먼바다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고된 일을 뜻했다. 취재 현장에서 함께 촬영한 사진가 표기식은 맨 위 조타실 구석에 있던 엄지손가락만 한 불상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21세기에도 어둡고 무서운 바다 위에서는 뭔가 보고 기댈 것이 필요하다는 듯 불상은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굴 조사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 누리안호 오천석 선장에게 물었더니 “저희는 묘박을 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배 주변으로 닻 다섯 개를 쳐서 배를 고정시키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주 닻 하나를 내리고 나머지 닻을 들어서 고무보트에 실은 후에 그걸 배의 각 사방으로 가져가서 고정시키는 겁니다. 무거운 걸 들고 가는 일이니까 위험한 면이 있죠.” 말하자면 석유 시추선처럼 배를 고정시키는 셈이다. 탐사에 나간 사람들이 머무르는 숙소도 보았다. 선장과 탐사단장을 제외한 일반 선원의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여기서 보통 일주일씩을 보내다가 육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발령받아서 왔고 일도 어렵지만 허문녕은 긍정적인 사람 같았다. “바닷속에서 (탐사할 때) 시간이 더 잘 가요. 배 위에서는 오히려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잘 안 가는데. 그리고 한국에서 수중 발굴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뿐이에요.” 허문녕은 농담 같은 말 뒤에 깊은 뜻을 감춘 사람이었다.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이유를 들려주었다. “제가 그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그랬겠지만 사학은 증거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똑같은 걸 보고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고학은 제가 사료를 찾아내는 거잖아요. 제가 찾기 전에는 세상에 없던 물건인 거고.” 이렇게 모두 각자 일의 이유를 만들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5만원 줍니다.” 위험수당의 액수를 양순석에게 듣고 나니 사람들이 이 일을 돈 때문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에 5만원을 주는 걸까? “아니요, 한 달에 5만원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수당을 준 지도 얼마 안 됐어요. 잠수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어요. 잠수는 저승에서 돈을 벌어와서 이승에서 쓰는 거라고. 잠수 일이 그만큼 위험해요. 우리도 봤잖아요. 세월호 침몰했을 때 탐사하다가 잠수사 돌아가시는 거.”

해양 문화재 발굴 조사는 실패할 때가 더 많다. 역사가 오래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어민 신고를 받고 탐사를 나가는 것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망망대해에 바닷속에 파묻혀 있는 유물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 무엇이 나올지도 모른다. 문화재라는 특성상 사람들의 관심도 높지 않다.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할까? 취재 내내 이해하면서도 궁금해했던 일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고 고되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굳이 그 일을 할까? 왜 어떤 사람은 고고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도굴꾼이 될까?

도굴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아픈 손가락이다. “어떤 학자는 한국 청자의 50%가 해양 도굴품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육상에서 가져갈 건 이제 다 가져갔으니까.” 양순석은 도굴 이야기를 하자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도굴 사건에 휘말린 적도 있다. “두 번 있었어요. 외부 잠수사를 고용했을 때. 저희는 바닷속에 그리드를 쳐두고 작업해요. 그 그리드 안에 있는 걸 다 갖고 올라오는 개념이에요. 잠수사가 그 그리드 밖에 도자기를 두고 나중에 가서 몰래 갖고 올라온 거예요. 제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해도 안 보이니까 모르거든요. 저도 옆에 있었으니 오해를 받아서 검찰 조사도 받았어요.” 놀라우면서도 씁쓸한 이야기다. 그 도굴꾼이 잡힌 경위는 더 놀라웠다. “바다에서 갖고 올라온 도자기를 사겠다는 사람이 국정원 직원이었어요. 그 사람이 경찰에 넘긴 걸로 알고 있어요. 한번은 들고 올라와서 집에 뒀다가 적발됐고요.” 국정원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국은 예상외로 시스템이 훌륭한 국가인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상식. 발굴과 도굴의 차이는 뭘까? 하나는 시행 주체다. 수술 자격을 법적으로 받은 사람이 의사이듯 발굴도 허가를 받은 단체만 진행할 수 있다. 아까 수중 발굴과 직원들이 잠깐 언급한 것처럼 현재 국내 수중 발굴 자격이 있는 단체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뿐이다. 조사 자격을 가진 단체는 조금 더 많다고는 하지만, 발굴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행정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보존 여부다. 도굴은 물건만 가져가면 끝이다. 발굴은 발굴된 유물 근처의 모든 맥락과 현장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만약 도산공원 안에 샤넬 가방이 떨어져 있다 치자. 그 가방을 그냥 가져오면 도굴이다. 그 가방의 지문과 그 가방이 떨어진 위치와 그 가방에 묻어 있던 성분 등을 찾아내서 그 가방 주인의 생활 양식을 파악하는 게 발굴이다. 그러니 만약 도굴 개념으로 물건을 가져가면 그 물건 주변의 맥락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도굴범에게 유물은 단순한 재화일 뿐이니까.

누리안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잠수복 걸이 옆에 붙어 있던 문화재 헌장이었다. 묘박을 했다고는 하지만 바다 위에 멈춰 있는 배는 늘 출렁인다. 그 위에서 잠수하기 전에 사명감에 찬 다이버들이 문화재 헌장을 읽으며 자존감을 고취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그건 우리에게 슬픈 기억이에요. 도굴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읽고 들어가자는 거예요.” 양순석이 말했다.

양순석과 지금은 은퇴한 그의 선배들이 그렇게 하나씩 유물을 걷어 올렸다.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예산을 받아내고, 때로는 도굴꾼과 휘말리기도 하고, 더는 못 하겠다는 동료들을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이들은 아시아에서도 최고 수준의 유물 발굴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이들이 2017년 12월에 펴낸 <2018년도 주요업무계획>에 따르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5만92점의 보존 유물을 처리했다. 작년에 발굴한 유물도 171점이나 된다. 수중 문화재 발견 신고 해역에서 수십 년간 들어온 민원 307건 중 이들은 259번 답사를 나갔다(현재 미탐사는 6건뿐이다. 42건은 위치가 불명이거나 수심 40m 이상인 ‘대수심’이다). 유물의 보존 처리에도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세척을 하고 소금기를 제거하는 일련의 절차를 거치면 1년씩 걸린다. 이렇게 바다에 나가서 유물을 가져오고 바닷속 보물을 끌어 올린 당사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힘들었죠. 공무원 조직에서 임무를 받았으니까 그냥 한 거예요.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임무, 그냥,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양순석은 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양순석의 투철하고 윤리적인 임무 완수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의무적으로 해야 해서 했던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지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에는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경정이 그런 경우이며, 가장 최근에 수중발굴과에 합류한 맹세환도 수중고고학을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한번은 초등학생에게 연락이 왔더라고요. 수중고고학을 하고 싶다고요.” 허문녕이 떠올렸다. “저는 처음에 뭔지도 몰랐고, ‘수중고고학’을 인터넷에 치니까 ‘극한 직업’이 나오고 이랬는데요. 그래도 ‘힘드니까 하지 마라’ 이럴 수 없잖습니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된다고 말해줬죠.” 이렇게 말하는 허문녕의 표정은 꽤 즐거워 보였다.

허문녕만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자기의 일을 말하는 수중발굴과 사람들의 표정에는 모두 좋은 기운이 있었다. 입으로는 ‘위험해요, 힘들어요, 지루하죠’ 같은 단어를 말하면서도 다들 본인의 일 이야기는 열정적으로 즐겁게 말해주었다. 나도 면구스럽지만 남의 말을 듣는 게 직업이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 사람은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문화재를 찾는 일이고,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보람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누리안호 2등 항해사 남상수가 배 곳곳을 보여주며 지나가듯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취재하며 생각한 건 이들의 뛰어난 업적이나 도자기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은 다이빙 슈트를 입고 서해 바다의 개펄을 헤치며 귀한 유물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일을 할까? 일의 보상은 무엇일까? 왜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고 티도 안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손바닥도 안 보이는 바다에 뛰어들까? 의무감 때문일까? 의무감은 사람에게 짐 같은 것 아닌가?

“청자가 물속에서 보면 정말 예쁜 빛깔을 띠어요.” 양순석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의무가 가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물속에서는 빛이 굴절되잖아요. 그래서 청자의 푸른빛이 육지에서 볼 때랑은 달라요. 정말 예뻐요.” 그럴듯한 수식어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다가오는 말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양순석은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살면서 뭔가를 떠올렸을 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뿌듯해 보였다.

현재의 의무에 충실하며 살아온 양순석에게도 보물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선실에는 보물 제1738호 청자 상감 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무늬 매병 및 죽찰이 있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의 바닷속에서 양순석이 가지고 올라온 도자기다. “사실 그 매병이 가장 무늬가 아름답다거나 보존 상태가 좋은 건 아닙니다. 더 세공이 잘된 매병도 많아요.” 양순석은 자기를 꾸밀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매병의 중요성은 미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한국 서해의 가장 큰 특징은 극심한 조수 간만과 바닷가의 개펄이다. 개펄 속으로 유물이 들어가면 일종의 진공 보관 상태가 된다. 육지에서라면 부패하거나 산화했을 유물도 역설적으로 물속에서는 보존될 수 있다. 그 결과 양순석은 병 목에 매달린 걸 함께 들고 올라왔다. 그게 저 보물 이름 맨 끝에 있는 ‘죽찰’이다. 죽찰은 ‘어디의 누가 어디로 무엇을 보낸다’라고 써둔 대나무 표찰이다. 지금으로 치면 택배 송장 같은 것이다. 양순석이 바닷속에서 들고 올라온 것이 그 죽찰 달린 청자 매병이었다.

양순석이 죽찰 달린 청자 매병을 바다에서 가져오기 전까지 청자는 그냥 물건일 뿐이었다. 미적으로 분석하고 가치를 매길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진짜 이걸 어디에 썼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매병 목에 걸려 있던 죽찰 덕에 이 청자의 맥락이 함께 알려졌다. 

양순석이 죽찰 달린 청자 매병을 바다에서 가져오기 전까지 청자는 그냥 물건일 뿐이었다. 미적으로 분석하고 가치를 매길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진짜 이걸 어디에 썼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매병 목에 걸려 있던 죽찰 덕에 이 청자의 맥락이 함께 알려졌다. 죽찰에 따르면 아름다운 청자 매병의 용도는 참기름 병이다. ‘중방의 도장교 오문부에게 참기름을 보낸다(앞면 重房都將校吳文富, 뒷면 宅上眞盛樽封)’는 내용이 병목에 매달려 있었다. 청자 매병은 그 맥락을 인정받아 죽찰과 함께 보물로 등재되었다. 양순석의 그간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걸까? 그에게 보물을 출토한 고고학자라는 자부심도 있을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초연한 자세가 이 팀의 업적을 만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목포는 거쳐 가는 사람이 많아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목포역으로 우리를 데려가던 어느 택시 기사가 말했다. “(목포가 목적지가 아니라) 목포를 거쳐서 섬으로 가지. 흑산이나 신안에 있는 데를.”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포항 앞에는 큰 식당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목포를 여행의 목적지로 삼아도 좋겠다. 목포에는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일제강점기의 멋진 근대건축물이 있다. 유달산 아래에는 토요일에만 문을 여는 비밀의 정원도 있다. 금메달식당의 홍어와 성식당의 떡갈비와 우리장어탕의 장어탕과 덕인관의 남도 요리가 있다. 그리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있다. 겸허하고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해온 사람들이 어두운 바닷속에서 가져온 도자기가 있다. 그 도자기는 두말할 것 없이 무척 아름답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본다면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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