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보의 위기

미국 보수와 진보 사이 균형의 한 표가 사라졌다.

미국 대법관 앤서니 케네디가 은퇴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이후 30년 동안 대법관을 지낸 앤서니 케네디는 역대 대법관을 통틀어 14번째로 오랜 기간 대법관을 한 사람이다. 

그동안 미국의 대법원은 진보와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같은 수를 이뤄왔다. 그 사이에서 2006년 은퇴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중도 보수로서 스윙 보트(누구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중요한 한 표’를 의미) 역할을 했고, 앤서니 케네디 역시 그러했다. 앤서니 케네디는 보수 성향이지만 때론 진보의 편을 들어주며 이념적 결정이 필요한 굵직굵직한 판결에 진보적인 결정을 내렸다. 전부 진보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순 없지만 동성 결혼 합법화, 낙태권을 헌법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영장 없는 도청에 대한 판결, 선거 후원금 상한선을 없앤 판결, 미국인의 총기 소지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판결, 소수 인종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선거권법의 약화 같은 판결이 앤서니 케네디가 대법관으로 지내는 동안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다. 중도 보수 성향으로 때론 진보의 편에, 때론 보수의 편에 섰기 때문에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의 기사에 나온 대로 ‘(스윙 보트라는 위치의) 앤서니 케네디는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스윙 보터로 함께 있던 18년의 기간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앤서니 케네디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미국 대법원의 인원 구성을 알아야 한다. 미국 대법원은 총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그중 존 로버츠,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얼리토, 닐 고서치는 보수 성향,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스티븐 브라이어,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은 진보 성향으로 구분된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앤서니 케네디는 중도 보수로 5 대 4의 판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6년 2월 보수 성향 대법관이었던 앤터닌 스캘리아가 사망했을 때 당시 대통령이던 오바마는 진보 성향 인사로 후임 대법관을 임명하려 했지만 상원에서 공화당의 반대 때문에 결국 후임 대법관을 임명하는 일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넘어갔고, 트럼프는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를 임명했다. 그로 인해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동수를 이루는 상황이었는데 앤서니 케네디의 은퇴로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후임을 임명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선택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즉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깨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대법원에서 발표하는 판결에 따라 미국 사회가 크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낙태권을 헌법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나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판결은 한국 사회에도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안타깝게도 앞으로 그런 진보적인 결정이 내려지는 일을 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복스>는 앤서니 케네디의 은퇴가 미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리한 ‘앤서니 케니디 이후의 미국’이라는 기사에서 이런 전망을 내놓았다. “대법원에서 내렸던 굵직한 판례로 인한 미국 사회의 변화가 일부는 번복될 수도 있고 일부는 약화될 수도 있다.” 물론 선례 구속력의 원칙에 따라 판례들이 전부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복스>의 예상에 따르면 케네디가 없는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고 주 정부가 대부분의 낙태를 금지하게 할 것이다. 또한 수형자 인권에 관해서 사형제와 독방 수감에 반대하는 의견을 거부할 것이고, 종교적 이유로 차별 금지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 인종을 고려한 적극적 우대 조치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제한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인권 보장을 확대해왔던 그동안의 많은 변화가 멈추거나 뒤집힐 수 있다는 말이다.

먼저 미국 대법원의 판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힐 가능성을 살펴보자. 로 대 웨이드는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의 권리가 낙태의 권리를 포함한다는 미국 대법원의 가장 중요한 판례 중 하나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여성이 임신 후 6개월까지 낙태를 선택할 헌법상의 권리를 가진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미국의 모든 주는 낙태를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모조리 폐지해야 했다. 로 대 웨이드만이 아니라 앤서니 케네디가 진보의 편에 섰던 홀 우먼스 헬스 판례도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텍사스에서 낙태를 어렵게 만드는 규제를 만들자 그 규제가 낙태하려는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며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판례들이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5명으로 늘어나면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장 일어날 변화는 아니다. 대법원에서 판례가 나오려면 먼저 주 단위에서 낙태를 어렵게 만드는 법을 만들어야 하고, 그 법에 대한 이의 제기가 대법원까지 올라가야 한다. 당장 걱정할 일이라기보다는 몇 년 후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대중의 비난을 받으며 선례를 뒤집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도 있지만 미국 법조계의 전문가들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낙태권이 점진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것으로 전망한다. CNN의 법률 분석가 제프리 투빈은 앤서니 케네디의 은퇴로 “낙태가 18개월 안에 20개 주에서 불법이 될 것”이라고 트위터에 썼다. <워싱턴 포스트> 또한 보수주의자들이 로 대 웨이드를 뒤집으려 할 것은 당연하고, 문제는 어떻게 뒤집을지에 대한 것뿐이라고 전망했다. 대법관들을 보수 성향으로 구성한 후 공화당에서 낙태를 어렵게 하는 연방법을 만들고 트럼프가 서명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낙태권에 대한 위협은 실재한다.

수형자 인권에 대한 미국 대법원의 결정도 보수 성향으로 기울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사형에 대해 심사했던 데이비스 대 아얄라 케이스에서 앤서니 케네디는 독방 수감의 잔혹함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현재 UN에서 권고하는 것은 ‘15일 이상 독방 수감에 대한 완전한 금지’다. 현재 미국에서는 약 8만 명에서 10만 명의 수감자가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주는 독방 수감을 ‘최대 수년까지’로 연 단위에서 제한하고 있다. 미국의 대법원이 UN에서 권고하는 수준까지 나아갈 것 같진 않지만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수형자 인권에 관해서 진보 의견을 냈던 케네디의 은퇴는 아쉬움이 많다.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5명이 되면 수형자 인권 면에서 좀 더 철저한 제한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차별받는 소수자를 우대하기 위한 적극적 우대 정책도 앞으로는 쉽지 않아질 것이다. 앤서니 케네디가 적극적 우대 정책의 열렬한 찬성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 학생이 미시간 대학교가 인종을 이유로 백인이나 아시아계에 비해 흑인, 히스패닉, 인디언 출신에게 더 많은 입학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상 평등 보호 조항 위반이라며 소송을 제기한 그루터 대 볼린저 사건에서 학교의 정책이 위헌이 아니라는 다수 의견에 케네디는 반대했다. 2009년 리치 대 디스테파노 사건에서는 백인 소방관들이 승진 시험에서 역차별을 당했다는 소송에 백인 소방관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케네디의 가장 큰 유산이라면 LGBTQ의 인권을 크게 늘린 것이다. 1996년 로머 대 에반스 사건에서 “동성애자들을 지목하여 악의적인 차별을 자행하는 법은 위헌”이라는 판결의 주문을 썼고, 2003년 동성 간의 구강과 항문 성교를 금지하는 텍사스의 소도미 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2013년 미국 정부 대 윈저 사건에서 연방 결혼 보호법(DOMA)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동성 결혼 합헌 판결의 발판을 마련했고, 2년 후 오버거펠 대 호지스 사건에서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모든 법이 위헌이라고 해 미국을 동성 결혼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선례구속의 원칙, 미국 50개 주 중 44개 주에서 다수의 미국인이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는 대중 의식의 변화 등은 LGBTQ에 관한 케네디의 유산을 당장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 대법원이 케네디가 있을 때의 대법원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새삼스레 다시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듯싶다.

도널드 트럼프는 앤서니 케네디 후임으로 브렛 캐버너 워싱턴DC 연방 순회 항소법원 판사를 지목했다. 브렛 캐버너 판사는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당시 특검이었던 케네스 스타 밑에서도 일했다. 정치 성향으로 따지자면 명백한 보수이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가 임명한 또 다른 대법관인 닐 고서치보다는 좀 더 진보 쪽에 가깝지만 1980년대 이후 지명됐던 모든 연방 판사들 중에서는 꽤 보수적인 편이라고 한다. 미국의 통계 미디어 ‘파이브서티에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오히려 닐 고서치보다 좀 더 보수적이라는 얘기도 있다. 일관되게 기업과 고용주의 편에서 판결을 내리고, 주로 정부의 규제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린다는 통계다. 물론 임명이 되려면 단순히 트럼프의 지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이지만 낙태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임명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공화당 의원이 있는 상황이기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브렛 캐버너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결국 대법관의 자리에 앉는다 하더라도 진보는 한동안 어려움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윤지만(칼럼니스트)
출처
36957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