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을 위한 복기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기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꼭 알아둬야 할 외교적 실패가 있다.

한미 정상회담 - 에스콰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 중인 한국의 외교 브레인들이 심도 있게 복기하는 과거가 하나있다. 2001년 3월 8일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바로 그것. 당시 상황을 돌아보자.

부시가 200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관계는 가히 황금기였다. 1999년 9월 발표된 페리 프로세스에 따라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동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큼 다가섰다. 2000년 6월에는 평양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같은 해 10월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성사되며 모든 게 좋은 방향으로 향하는 듯했다. 하지만 당초의 예상과 달리 공화당 후보였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초조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여론은 하루빨리 한미 정상회담이 필요하다 했고, 김 대통령은 부시의 대통령 취임 닷새 뒤인 2001년 1월 25일에 연결된 전화 통화 중 이를 성사시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김 대통령은 평소 스타일대로 ‘강의’식 설명을 하면서 부시에게 햇볕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트럼프만큼이나 집중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던 부시는 바로 짜증을 냈다. 당시 전화 통화 과정에서 부시 옆에 배석해 있던 찰스 프리처드 미국 대북 특사의 증언을 담은 책 <실패한 외교>에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할 필요성을 부시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부시) 대통령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 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기 힘들군’이라 말했다.”

이로부터 40일 후인 2001년 3월 7일 새벽 5시경, 그러니까 한미 정상회담을 불과 5시간 앞두고 일찍 기상한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는 헤드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시, 클린턴(대통령) 시절 북한과의 미사일 회담을 계승키로!’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대체로 전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이 물려준 부분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준비할 계획이다. (협상)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희망적인 옵션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그런 요소를 검토할 것”이란 발언을 중심으로 소개돼 있었다. 외교 문외한이었던 부시는 발끈했다. 자신의 본심과는 다른 내용인데 다 자신이 주로 의지했던 딕 체니 부통령이 ‘주입’했던 내용과도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는 바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워싱턴포스트> 읽어봤어요?” “아니요, 아직….” “당장 보세요.” 그리고 부시는 라이스에게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까요, 아니면 당신이 해결할래요?” 라며 압박을 가했다. 전화를 끊은 라이스는 즉각 파월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본인이 시정하세요”라고 주문했다. 결국 파월은 정상회담 당일 ‘북한과의 협상이 곧 시작될 것이란 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하기에 바빴다. 이를 계기로 파월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왕따로 전락했다. 당시 상황은 <뉴욕타임스>의 백악관 담당 선임 기자였던 피터 베이커의 저서 <불의 날들(Days of Fire)>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이런 막후 분위기에서 정상회담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김대중 대통령의 ‘강의’였다. 회담 중 양복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든 김 대통령은 북한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을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열이 받은 부시는 회담이 끝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불신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난 북한이 전 세계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는 것에 깊이 우려하고 있다. 북한이 앞으로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 해도 이에 대한 검증 장치를 마련해야만 한다. 북한을 상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투명성이다. 비밀에 싸인 국가와 협정을 맺으면 그 나라가 협정 내용을 준수할지 어떻게 자신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부시는 회견 도중 김 대통령에게 ‘이 양반(this man)’이라고 말해 큰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 언론은 이날의 정상 회담에서 큰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당시 기사 제목도 ‘부시,대북 포용 정책 지지’,‘한미 대북 포용 정책 계속’ 같은 것이 었다. 이는 미리 만들어놓은 발표문에 가까웠다.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 지지’,‘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 ‘한미 동맹의 유지, 발전’,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 정부의 주도권 존중’,‘김정일 위원장의 한국 답방 지지’, ‘억지와 방어를 위한 새로운 접근에 합의’ 등 기사 제목만 보면 그리 보였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강경 기류를 간파한 <뉴욕타임스>는 다음 날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클린턴 집권 후반기의 (북한과의 협상)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북한과 미사일 회담도 재개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하게 전했다”고 보도했다. 또 “이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분명한 퇴짜”라고 해석했다. 이후의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아는 그대로다. 부시는 이듬해 ‘북한은 악의 축’이라며 한국의 햇볕 정책에 대한 불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국과의 관계도 냉각됐다. 16년 전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현 상황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최근 들어 “조건이 충족된다면 북한과 대화할 준 비가돼있다”고 말하고 있다. 언뜻 봐선 대화에 방점을 두고 있는 문재인 행정부의 스탠스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16년 전 ‘북한과의 계속적 대화’를 강조했던 파월 국무장관이 연상된다. 하지만 ‘지존’인 트럼프 대통령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6년 전 부시 행정부 시절처럼 정상회담 당일에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처럼 진지하고 긴 강의식 설명을 하기 시작 한다면 트럼프는 부시 못지않게, 아니 몇 배나 더 이를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미 정상회담 - 에스콰이어

정상 간에도 궁합이라는게 있다. 하지만 외교는 생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궁합은 맞춰가는 것이다.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어떻게든 맞게 되는 것이 또 외교다.

상대에 대한 신뢰 부족도 16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부시는 한미 정상 회담 다음 달 일본 총리로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탁월한 궁합을 보였다. 두 사람에겐 공통분모가 있었다. 야구광인 데다 성격이 직선적이었다. 둘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지했다. 고이즈미는 점퍼를 입고 부시의 별장에서 캐치볼을 했다. 현재 트럼프와 아베 총리에게도 ‘골프광’이란 공통 분모가 있다. 게다가 오바마식의 ‘차가운 논리와 냉철함’에 곧잘 반감을 드러냈던 아베는 오히려 트럼프의 화끈함과 무모함에 인간적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한마디로 ‘케미’가 잘 맞는다. 반면 논리와 이성으로 접근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와 물과 기름에 가까운 사이다. 여러 정황에서 볼 때 이번 문재인-트럼프의 정상회담도 100점짜리 발표문에 가려진 재앙 같은 내막을 드러낸 2001년의 김대중-부시 한미 정상회담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두 사람 사이에서 뚜렷한 공통 분모를 찾기 힘들다는 점도 그런 예상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두 정상의 궁합을 단순히 개인적인 스타일로만 판단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상황이긴 하다. 일단 한국의 외교 역량이 16년 전보단 많이 향상됐다. 대통령 개인의 역량이나 스타일보다는 상황에 대처하는 종합적 외교력이 성장했다. 많은 경험도 축적됐다. 상대방의 전략을 분석하는 전문가도 다수다. 게다가 현재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로 내치에선 궁지에 몰려있어 외교 면에서 점수를 따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유럽, 중동 방문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인 트럼프는 유럽 국가, 특히 나토 회원국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고립됐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로선 중국 무역 적자 개선, 중국의 환율 조작국 지정이란 핵심 공약까지 미뤄가며 ‘올인’한 북핵 문제에서 마저 한국과 틀어질 경우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트럼프의 현 상황은 우리의 접근방식에 따라 예상 외의 성공과 신뢰 구축을 끌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의미다.

정상 간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외교는 생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궁합은 맞춰가는 것이다.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어떻게든 맞게 되는 것이 또 외교다. 결국 그것이 지도자와 외교 당국에 필요한 능력이자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 해야 할 것은 트럼프에게 일방적으로 맞추거나 혹은 튕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공통분모 영역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첫걸음이 될 이번 정상회담에 한국 외교의 5년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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