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전쟁일까? 패권 전쟁일까?

미국이 지나친 보호무역주의로 세계경제를 뒤흔드는 이유가 있다.

1987년 10월 19일 미국 다우지수가 하루에 무려 22.6% 폭락했다. 그 유명한 ‘블랙 먼데이’ 였다. 시장이 20% 넘게 떨어졌으니 개별 종목들은 모두 반 토막이 났다. 단 하루 만에 말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블랙 먼데이의 원인은 높은 관세에서 출발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닉슨 대통령에서 레이건 정부로 이어지며 미국은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펼쳤고 10% 넘는 고율 관세 정책을 이어왔다. 그러자 유럽에서도 이에 맞서는 움직임이 나왔고 결국 무역 전쟁으로 확산됐다. 그런데 이처럼 각국이 모두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자 물가로 불똥이 튀었다.

1만원짜리 가방이 고율 관세로 순식간에 1만1000원이 되면서 한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5%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 상황까지 도달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런 높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했는데 결과적으로 기업과 가계 모두 버텨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이런 와중에 10월 셋째 주 월요일, 주식시장이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며 공포의 블랙 먼데이가 출현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당시 보호무역주의와 무역 전쟁의 상황이 3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재현되고 있다. 1980년대와 비교해 전 세계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 무역 전쟁이 확산될 경우 그 충격은 블랙 먼데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바나나와 자유무역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때 바나나 한 송이는 1만원이 훌쩍 넘었다. 개당 가격으로 2000원 정도였는데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쯤 했으니 얼마나 최고급 과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상당수 독자들은 최고급 과일 바나나를 인정할 수 없을 것도 같다. 난 요즘도 바나나를 먹을 때마다 아들에게 “아빠 어릴 때는 부자들만 먹는 거였어”라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건 ‘뭔 소리?’라는 듯한 멀뚱멀뚱한 표정뿐이니까 말이다.

그때 바나나가 그렇게 비쌌던 건 우리 정부가 국내 과일 농가를 보호하려고 엄격한 수입 규제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보호무역주의이다. 그래서 필리핀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바나나가 넘쳐나지만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없었고 바나나는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바나나 가격이 왜 떨어지게 된 것일까? 바로 세계화를 표방한 자유무역 때문이었다.

1970~1980년대에 혹독한 보호무역주의를 경험해본 결과 각국 모두에게 역효과가 더 크다는 걸 깨닫자 상황이 반전됐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세계는 자유무역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1991년 우루과이라운드가 시작되면서 일부 농산물에 대한 수입 규제가 철폐됐는데 바나나가 여기에 포함됐다. 자유무역 정책으로 결국 바나나의 운명이 바뀌었고, 이제 저렴한 과일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의 비교 우위론은 자유무역의 토대를 만든 이론이다. 세계 각국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재화로 특화해 무역하면 모두 잘살 수 있다. 심지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국가라도 상대적 우위의 것으로 무역하면 남는 장사라고 했다. 그렇게 세계는 1990년대부터 다자간,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무관세 무역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물론 자유무역에 대해서는 아직도 반발이 많고 태생적 모순도 존재한다. 가령 자유무역에서는 반도체 잘 만드는 나라는 반도체를 수출하고, 가만히 있어도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국가는 파인애플을 팔면 모두가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재화마다 부가가치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와인과 자동차를 같은 가치로 비교할 수는 없다. 바나나를 파는 국가와 반도체를 수출하는 국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마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패권국 미국이 주도했기에 세계 각국은 자유무역이 절대 선인 것처럼 다들 따랐다. 패권을 갖고 휘두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고, 더 이상 무역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기도 싫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렇게 자유무역을 외치던 미국이 이제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마지노선 넘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정확히는 대선 후보 때부터 ‘미국 우선주의’를 선봉에 내세웠다. 그 어떤 정책도 미국에만 좋은 쪽으로 실행하겠다는 건데, 이것이 경제 분야에선 보호무역주의로 나타났다. 보호무역주의는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전략이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벤츠나 BMW 같은 유럽산 자동차에 20%의 관세를 매기면 미국 내 판매 가격이 높아지고 소비자들은 가격 부담 때문에 사지 않는다. 그리고 트럼프는 지난 3월 초 철강을 다시 재물로 삼았다. 무역확장법 232조를 빌미로 미국에서 수입하는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 부과를 결정한 것이다(캐나다와 멕시코, 호주는 ‘진정한 친구’라는 이유로 제외시켰다). 철강 산업에 주력하는 국가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철강업계는 아예 초상집 분위기다. 국내 철강업체들은 작년에 이미 반덤핑 관세 명목으로 최대 80%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25% 관세를 맞는다면 1년 새 가격이 2배가 되는데 그러면 한국산 철강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어진다. 벌써 수조원대 경제 손실과 사라지는 일자리만 1만 개가 넘을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호무역주의에 맛들인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의 70%를 수출이 차지하는 한국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에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세이프 가드(긴급 수입 제한) 조치를 당했고, 개정 협상 중인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선 자동차가 쟁점이 되고 있다. 원산지 조항 규정 강화로 멕시코 공장에서 만드는 우리 자동차에도 엄청난 관세가 부과되면 속수무책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최대 수출품인 반도체에 대한 공격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충격이 남아 있으니, 바로 미국 보호무역주의가 무역 전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다. 지금 미국은 완전히 마지노선을 넘었다. 여기에 유럽연합(EU)과 중국이 보복관세 등으로 맞선다면 세계경제는 한순간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미 EU는 미국의 할리 데이비슨, 리바이스 청바지 등에 보복관세를 외치고 있으며 중국 역시 미국산 농산물부터 보복의 시동을 걸고 있다.

지금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전쟁을 표방한 패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역 흑자를 위해서 세계 각국에 태클을 거는 게 아니라 큰형님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다잡기 위한 포석이라는 뜻이다.

무역 전쟁은 끔찍한 공포이다

세계경제는 1930년대 미 대공황 시절, 그리고 1970~1980년대 경제 쇼크를 통해 이미 무역 전쟁의 파국을 경험했다. 무역 전쟁이 발발하면 즉각적으로 교역 축소가 나타난다. 서로 수입품에 온갖 규제를 가하니 교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이라고 해도 실적이 30% 넘게 악화되고 세계 경기 침체는 불 보듯 뻔하다.

과거 사례를 보면 무역 전쟁의 충격은 먼저 주식시장에 찾아왔다. 1930년대 미국 대공항 때를 보자. 당시 미국은 최고 59%라는 기록적 관세를 부과한 ‘스무트-홀리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유럽 전역이 이에 맞서 관세 폭탄을 던졌다. 결국 무역 전쟁으로 확산됐는데 이 기간 동안 미국 다우지수는 10분의 1토막이 났다. 게다가 지금 무역 전쟁은 금리 인상과 연결돼 있어 우려가 더 크다. 세계 각국이 모두 높은 관세를 물리면 제품 가격이 올라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고 중앙은행은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릴 것이므로 가계 부채가 1450조원에 달하는 우리에게는 큰 타격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지금 미국이 취하는 초강력 무역보호주의가 정말 미국의 무역 흑자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말 이렇게 모든 수입품을 규제하면 8000억 달러(약 866조원)에 달하는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일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가령 세탁기를 보자. 세이프가드 때문에 미국 소비자들은 한국 세탁기를 20% 정도 비싸게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산 세탁기를 사는 것도 아니다. 철강도 비슷하다. 미국 언론에서는 벌써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고관세의 최대 피해는 미국 근로자가 될 것’이라고 전한다. 모든 수입 철강에 25% 관세가 붙으면 당장에 일부 미국 제조업체들은 원가 부담에 공장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아예 ‘자동차 가격의 대부분은 철강 가격’이라면서 ‘미국으로 돌아온다는 자동차 공장이 다시 해외로 옮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걸까? 정말 트럼프가 무식해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걸까? 워낙 호전적이라 무역 전쟁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무역이 아닌 패권 전쟁이라면?

내 생각엔 지금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전쟁을 표방한 패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본다. 무역 흑자를 내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 태클을 거는 게 아니라 큰형님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다잡기 위한 포석이라는 뜻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항상 무역 적자였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아왔다. 세계 원톱 국가로서 패권을 갖고 있었고 미 달러화라는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어서 그렇다. 힘들면 달러를 찍어내 사용하면 되고, 일정 시점에 풀어놓은 달러를 급격하게 회수해 신흥 국가들의 부를 빼앗아가며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중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에게도 미국 패권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다.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2008년 말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세상이 어지러울 때를 틈타 세 번의 양적완화를 했지만, 이제 또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겠다고 하면 엄청난 반발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큰형님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책략으로 보인다.

철강 관세 부과에서 호주를 제외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주를 빼주면서 트럼프는 ‘미국에 잘 보이면 다른 국가도 (관세) 면제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모습은 마치 궁지에 몰린 동네 골목대장의 행동 같기도 하다. 이 때문에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트럼프가 무역 전쟁 흉내만 낼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나온다. 미국에 이렇게 저렇게 아부를 떨면(패권을 인정해주면) 트럼프도 결국 하나씩 풀어줄 거란 해석이다. 하지만 세계경제는 살아 있는 생물체이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며 당장 중국이 미국에 고분고분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EU의 돌발 행동으로 무역 전쟁이 바로 시작될 수도 있다.

더 치명적인 상황도 있다. 패권을 지키기 위한 무역 전쟁이 아니라 새로운 패권을 쟁취하기 위한 무역 전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이렇게 되면 무역 전쟁은 실제 전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말이다. 현재로서는 무역 전쟁이 ‘무역 경쟁’ 정도에서 멈추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소망과 달리 무역 전쟁으로 들어가면 우리 삶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뀐다. 증시와 부동산 급락, 금리와 물가 상승 외에 세계 패권이 뒤바뀌는 것이니까. 우리 정부도 이제는 무역만이 아니라 ‘패권’이란 또 하나의 변수를 염두에 두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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