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웨딩 2.0

영국 왕실의 결혼식은 확실히 예전과 달랐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일생을 그린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크라운>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 중 남편인 필립 공에게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 서약을 하라고 요구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남편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1950년대의 결혼에 관한 인식과 군주제의 정점인 여왕이라는 지위가 충돌하는 것에 착안한 에피소드다. 실제 역사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로 왕실의 의식에 익숙했던 필립 공이 무릎을 꿇는 일에 크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와 결혼 생활에서의 남녀 관계를 떠올려보면 어쩐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만약 드라마 제작진이 대관식 대신 결혼식을 소재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 왕자의 결혼식에서는 드라마와 역전된 상황이었지만 비슷하게 느껴지는 갈등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순종 서약’에 대한 얘기다. 194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식을 다룬 <타임>지 기사를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이 필립 공에게 혼인 서약을 할 때 ‘순종(obey)’하겠다고 말한 것이 사회적 논란이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군주는 그게 남편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도 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공 사이에 특별한 갈등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다른 일반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낀다며 순종 서약을 하기로 선택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로열 웨딩인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서 메건 마클은 1947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다른 선택을 했다. 혼인 서약에서 남편인 해리 왕자에게 순종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신 마클과 해리 왕자는 서로 사랑하고 돕고 존중하고 보호하며 서로에게 충실하겠다고 서약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로열 웨딩이라고는 하지만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는 메건 마클이 남편에게 순종하겠다고 서약했다면, 전통을 지켰다는 칭찬보다는 낡은 구습이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어울렸을 것이다. 물론 마클이 로열 웨딩에서 순종 서약을 하지 않은 최초의 신부는 아니었지만 마클과 해리 왕자의 결혼은 지금까지의 로열 웨딩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도 언론에 기사화되어 크게 알려졌다. “로만 가톨릭 학교에 다녔고 이혼 경력이 있는 할리우드의 혼혈 여배우가 다음 왕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문장 또한 영국의 보수 성향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지적하듯 ‘한 세대 이전이라면 쓰일 수 없는 문장’이었다. 참고로 처음으로 순종 서약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건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다이애나 비였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비롯한 다양한 국내외 언론에서 다루는 것처럼 이번 로열 웨딩이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크게 끄는 부분은 신부인 메건 마클이 이혼 경력이 있으며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영국의 로열 웨딩에 환호했던 미국은, 그래서인지 이번엔 특히나 더 두 사람의 결혼식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마클은 남편인 해리 왕자보다 연상이고, 해리 왕자와 연애하기 전에도 이미 배우로 유명했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복스>에서 버밍엄 시티 대학교 사회학 교수 케힌드 앤드루스는 “영국 왕족은 제국과 식민지주의, 순수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영국에서 왕족은 “아마도 우리에게 내재된 백인주의의 가장 주요한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을 때, 2018년 영국 왕족과 결혼하는 여성의 프로필이 백인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환호받을 만한 일이었다.

영국 왕족이 백인주의의 상징이라는 앤드루스의 말은 역사를 되짚어볼 때 분명 타당하다 싶은 근거가 있다. 브렉시트(Brexit) 시대에 영국의 왕실 가족들은 제국주의를 떼어놓고는 얘기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브렉시트란 ‘영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Britain great again)’에 가까운 구호 같은 것이었고, 군주제는 이를 지탱하는 큰 동력처럼 여겨질 만한 것이었다. 앤드루스의 말대로 영국 왕족은 인종차별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실제로 인종차별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찰스 왕세자는 피부색이 어두운 영국 작가에게 맨체스터 출신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의 아버지인 필립 공의 인종차별적인 언행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해리 왕자도 과거에 나치의 상징인 스와스티카 완장을 차고 파티에 참석했던 이력이 있다. 그런 집안의 남성이 혼혈 여성과 결혼한다는 건 어쩌면 그 자체로 꽤나 상징적이다.

이번 로열 웨딩의 상징적인 부분을 더 짚어보자면 크게 두 가지에 집중하게 된다. 첫 번째는 인종에 관한 부분이다. 왕자와의 결혼은 분명 어느 정도는 동화 속 판타지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미국인들이 영국의 로열 웨딩에 환호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그런 판타지를 현실에서 본다는 만족감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왕자의 결혼식이라는 판타지에 등장하는 공주가 흑인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장르적 시도인 것이다. 특히 흑인 여성들에게는 닮고 싶은 흑인 공주가 생기는 셈이다. 일례로 <틴 보그>에서는 2017년 11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이 약혼했을 때 흑인 공주가 생기는 것은 멋진 일이라며 장문의 기사를 올렸다. 온라인 매체 <버슬>은 좀 더 엄밀했다. 메건 마클이 확실한 흑인은 아니지만 스스로 혼혈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영국 왕실로 상징되는 또 다른 유리 천장을 깼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클은 스스로 2015년 <엘르>에 기고한 칼럼에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했으니 영국 왕실로 상징되는 순수성을 깼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흑인 공주라는 발상이 순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루어>에 기고한 글에서 발레리 웨이드는 흑인 공주라면 이미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스와질란드의 시카니소 들라미니 공주나 나이지리아의 키샤 오밀라나 공주, 에티오피아의 왕족과 결혼한 미국인 흑인 여성 아리아나 오스틴 같은 이들이 그 예다. 또한 메건 마클의 존재가 영국의 인종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관여한 영국 왕족의 역사적인 역할을 지우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로열 웨딩에서 인종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결혼식 자체만 봐도 그렇다. 주례는 영국 성공회 수장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맡았으나 설교는 흑인 주교인 마이클 커리 신부가 맡았다. 그가 영국 왕족을 앞에 앉혀두고 흑인 노예를 암시하는 얘기를 꺼낸 대목은 트위터상의 수많은 촌평처럼, 메건 마클이 영국 왕실을 현대화시키는 첫 번째 장면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설교만이 아니다. 흑인이 다수 포함된 잉글랜드 합창단이 벤 E. 킹의 대표 곡 ‘Stand by Me’를 불렀고, 흑인 첼리스트 세쿠 카네 메이슨은 신랑과 신부가 떠난 자리에서 하객들을 위해 연주했다.

다이애나 비가 결혼하기 전에 ‘처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메건 마클은 그런 일로 골머리를 앓지 않았고, 이혼 경력이 있다는 사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징적이라 여길 만한 두 번째 부분은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다. 과거 영국 왕족이 여성의 역할을 얼마나 구시대적인 수준으로 제한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메건 마클이 영국 왕실의 공주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라 할 만한 사안인 것이다. 다이애나 비가 결혼하기 전에 ‘처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려 AP에서 나온 기사 제목이 ‘영국 왕실 신부의 처녀성은 이제 더는 논란거리가 아닙니다’였다. 적어도 메건 마클은 그런 일로 골머리를 앓지 않았고, 이혼 경력이 있다는 사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Miss’가 아닌 ‘Ms’라는 호칭이 찍힌 청첩장 덕분에 마클에게 이혼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언급됐다는 것이다. 신부가 신랑보다 연상이라는 점, 스스로가 성공한 커리어를 가진 배우라는 점 역시 페미니스트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일지 모른다. 다만 결혼과 페미니즘이 양립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듯 로열 웨딩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다. 성공한 여성인 메건 마클이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커리어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떤 페미니스트에게도 반가운 일이 될 수 없다. <복스>의 표현에 따르면 ‘변화를 상징하는 신부와 식민지주의와 가부장제의 전통’이 부딪히는 결혼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이 내포하는 젠더 정치학은 때때로 끔찍하다. 결혼이란 대체로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혼식 자체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동반되지만 결혼 생활이 야기하는 삶의 변화는 많은 부분에서 걱정을 수반한다. 로열 웨딩은 개인이 느끼는 이런 감정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떠올려보게 만든다.

여기에 해답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베스트셀러 작가 재스민 길로리는 이런 논란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많은 여성은 자기모순을 다루는 데 전문가들이다. “결혼식, 화장, 하이힐 등 이 모든 것에는 끔찍한 젠더 정치학이 내포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많은 여성이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평생 그것들 사이에서 줄타기합니다.” 로열 웨딩은 여성들이 매일 고민하는 이런 모순의 단순한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혼식에서 설교를 맡은 마이클 커리 신부는 마틴 루서 킹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사랑의 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의 힘이 주는 구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 방법입니다.” 어쩌면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도 사랑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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