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 논란으로 비춰본 한국 그리고 힙합

도끼를 향한 손가락질은 한국에서 힙합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을 남긴다.

시작은 마이크로닷이었다. 마이크로닷의 부모가 논란의 중심이 됐다.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사기가 다시 화두로 떠올랐고 자식인 마이크로닷이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러나 휘말린 건 마이크로닷뿐이 아니었다. 도끼와 그의 부모 또한 새로운 사건의 당사자가 됐다.

먼저 밝혀두건대 이 글에서 도끼와 그의 부모를 둘러싼 일의 과정과 종결을 세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고 만약 모른다면 기사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대신 내가 주목하는 것은 마이크로닷 논란과 도끼 논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다. 물론 둘은 두루뭉술하게 보면 비슷하다. 그러나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마이크로닷 논란에는 없지만 도끼 논란에는 있는 그것, 바로 힙합이다.

도끼 논란에서 도끼가 사적 개인이자 부모의 자식으로서만 존재한다면 굳이 이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아니, 쓰면 안 된다. 하지만 도끼 논란에서 도끼는 사적 개인이자 부모의 자식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래퍼이자 힙합으로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맥락은 일정 부분 도끼 자신이 만들어냈다. 해명을 위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동영상에서 ‘나(우리)는 힙합’임을 여러 번 강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전 기자님들 소송할 마음도 없고 그냥 해명만 하는 거예요. (중략) 고소 이런 건 다 필요 없어요. 우린 그냥 힙합이기 때문에. 할 말은 하고 아닌 건 아닌 거고.”

하지만 이것이 대중의 스위치를 건드렸다(고 대중은 주장한다). 사람들은 곧바로 도끼의 힙합을 다른 것과 편의적으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천만원 한 달 밥값’ 발언이 대표적이었다. 일단 해명 동영상 전체를 보면 이 말이 다음 맥락 속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와 가족이) 잠적했다고 기사가 나왔는데 우리는 잠적한 적이 없다. 나는 이 일에 대해 몰랐고 그 금액은 나에게 잠적할 만큼 크지도 않다.’ 동영상 후반부에서 도끼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천만원, 당연히 큰돈이에요. 그런데 제가 잠적할 만큼의 액수는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맥락이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당연히 동영상도 보지 않은 채 기사 한 줄만 읽고도 분노할 수 있지만 너는 한국 전체에 너의 가족이 도매금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도 감정을 추스르고 올바른 표현을 신중하게 골라 써야 당연하다’는 것이 한국 사회가 타인 혹은 유명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대상이 힙합이었기 때문이다. “눼눼. 그것이 힙합 스왜그군요? 힙찔이에 대해 잘 알고 갑니다~”

인터넷을 뒤덮은 이런 댓글을 보며 나는 올해 들어 가장 큰 아찔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힙합과 래퍼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이번 기회를 통해 조롱과 비아냥으로 꺼내놓고 있었다. 힙합이 대세라는 말은 이 앞에서 공허하고 무력했다. 여전히 한국에서 힙합은 이런 존재였던 것이다. 아마도 도끼를 향한 이 같은 조롱의 언어는 한국과 힙합의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앞으로도 남게 될 것이다. 8년 전 타블로에게 향했던 ‘힙합이나 하고 다니고’ 발언, 그리고 6년 전 ‘컨트롤 대란’ 때 래퍼들에게 향했던 도덕적 손가락질과 함께.

물론 도끼를 둘러싼 이 광경은 힙합이라는 특수한 맥락을 제외하고도 설명할 수는 있다. 실제로 <분노사회>의 저자 정지우는 나와의 통화에서 이번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연예인의 일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소비하려고 한다. 그들은 비난하고 증오할 대상을 늘 기다린다. 일상에서 쌓인 감정을 분출하고 해소할 기회로 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연예인이란 내가 주는 관심으로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이란 공간의 성격도 중요하다. 인터넷이란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허용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이것은 꼭 힙합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힙합의 특수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과 힙합의 충돌처럼 비친다는 뜻이다.

조금 거창한 이야기를 해보자. 힙합은 미국 흑인에게서 탄생했고 미국 흑인 사회는 예로부터 개신교가 지배해왔다. ‘신 앞에 모든 성도는 동등하다’고 말하는 개신교는 흑인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복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소셜 패브릭>에서 스타일 역사학자 유이지 시어도어(Ouigi Theodore)는 이렇게 말한다. “예로부터 흑인들에게 교회에 가는 일요일은 평소보다 당당해질 수 있는 날이었다. 일요일만큼은 자신이 열등한 계층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개신교도인 동시에 힙합 문화를 연구하는 이창수 전도사 역시 이에 동의를 표하며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해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신 앞에 모든 성도는 동등하다고 말하는 개신교 정신은 힙합 문화에 강하게 녹아 있다. 이는 곧 인간 평등의 다른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투팍의 노래 ‘Only God Can Judge Me’는 힙합에 뿌리 깊게 내재돼 있는 태도를 상징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누가 날 판단할 수 있어? 오직 신만이 나를 심판할 수 있어.”

맞다. 힙합은 자기 확신에 찬 1인칭들이 수평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세계다. 또 힙합은 언행의 불일치와 거짓말에 엄격하며(‘Keep It Real’) 남의 잣대나 시선보다 나의 주관과 소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힙합 문화를 어릴 적부터 내면화한 도끼는 이번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힙합에서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겠다’, ‘잠적하지 않았고 떳떳하다’, ‘고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밥값이란 단어만 머릿속에 남긴 뒤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맥락에도 관심 없고, 어쨌든 네가 표현에 신중했어야지!”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진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랩 스타와 연예인이라는 두 개념은 한국과 힙합이 충돌함을 보여주는 더 극명한 예다. 도끼는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예능하는 사람 아니에요. 전 연예인이 아니에요. 연예인처럼 돼버렸지만, 유명인이지만, 저는 힙합이에요.” 이번 일을 겪은 후 도끼가 발표한 싱글 앨범 <말조심>에도 이런 가사가 있다. “난 먼저 랩 스타가 된 후 출연했지 방송.” 즉 도끼는 자신이 연예인이 아니라 랩 스타라고 주장한다.

도끼에게는 한국에서 힙합은 안 된다는 편견 속에서 오랜 시간 음악적 타협 없이 힙합다운 힙합을 지킨 끝에 성공을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힙합의 세계에서는 태도를 지킨 것이고, 증명해낸 것이며, 성공 중에서도 가장 멋진 성공이다. 처음부터 방송의 힘을 빌려 쉽게 이름을 알린 다른 연예인 래퍼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에게 이 둘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사람들에게 도끼는 그저 유명한 래퍼이자 연예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끼가 거둔 성공은 한국적인 것과 무관한 성공일까?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끼의 성공에는 지극히 한국적인 이유가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인 오구라 기조는 자신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성선설의 사회다. 성선설은 상승 지향의 철학이다. 성선설의 사회는 낙천적이다. 상승이 허용되지 않는 인도 같은 비관적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의 일생이란 ‘놈’에서 ‘님’이 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극기의 지속이다. 이것이 유교 사회의 내재적 원동력 중 하나다.”

또 오구라 기조는 한국을 일본과 비교한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와 지금 실제로 자신이 있는 자리의 거리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한국인의 일생이다. 지금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는 일본인과는 크게 다르다.”

물론 도끼의 성공은 힙합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해석 가능하다. 도끼는 힙합의 사회문화적 핵심 코드인 셀프메이드(selfmade)를 한국에서 최초로 실현해낸 래퍼다. 바닥에서 정상으로, 한국에서 힙합으로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을 해낸 존재.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것은 한국인의 지극히 한국적인 가치관을 관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이 도끼를 향해 이렇게 훈계할 때 한국과 힙합은 다시 갈라진다. “개천에서 용 난 것까지는 좋아. 아주 기특해. 그런데 너 말이야, 겸손하게 안 굴래?”

오구라 기조는 한국을 도덕 지향성 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덕 지향적’과 ‘도덕적’은 다르다. 한국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은 사람의 모든 언동을 도덕으로 환원하여 평가한다. 한국에서는 운동선수나 연예인도 실력만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대신 홈런을 칠 때마다 기부를 한다거나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지를 납득시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포츠경향>의 이 기사 제목은 너무나도 상징적이다. ‘신곡 ‘말조심’ 발표한 도끼, 힙합 정신으로 덮을 수 없는 인성’. 한국에서 힙합이란 무엇일까. 아니, 그 이전에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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