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볼까 무섭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왜 '복면가왕'에 나왔을까? 한국 TV 쇼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을까?

홍보 참 희한하게 한다. 영화 <데드풀 2>의 개봉에 맞춰 한국에 들어온 라이언 레이놀즈는 근래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 중 가장 화끈하고 기묘한 일정을 소화하고 갔다. 한강 유람선을 타고 영국 남자 조시와 함께 소주에 파전을 먹고, 에릭 남과 함께 안마 의자에 앉아 뭉친 근육을 풀었으며, 카카오 캐릭터 라이언 인형과 마주 앉아 “너도 라이언이니? 나도 라이언이야!”라는 대사를 천연덕스레 뱉었다. 그리고 MBC <복면가왕>에 출연했다. 잠깐, 뭐라고? 앞의 수많은 기행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나는, 유니콘 가면을 뒤집어쓴 라이언 레이놀즈가 소년 합창단원 같은 창법으로 ‘Tomorrow’를 부르는 클립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형이 왜 거기서 나와? 한국 사람들만 놀란 게 아니다. 영화 홍보차 유튜브 채널 ‘빌드’에 출연한 <데드풀 2> 출연진은 라이언 레이놀즈의 <복면가왕> 출연분을 함께 보며 박장대소했다. 심지어 조시 브롤린은 얼굴이 고추 껍데기처럼 빨개진 라이언 레이놀즈를 앞에 두고 웃다가 지쳐 세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하필 <복면가왕>이었나 하는 궁금증이 풀린 건 며칠 뒤의 일이다. <데드풀 2> 제작사인 20세기 폭스는 몇 개월 전 <복면가왕>의 미국판 라이선스를 구입했다. 그러니 라이언 레이놀즈의 <복면가왕> 출연은 쌍방향 홍보 전략이었다. 한국에는 <데드풀 2>를 홍보하고, 그 영상을 보며 폭소하는 미국인들을 상대로는 미국판 방영에 앞서 <복면가왕>을 한 차례 더 알린다는 일거양득의 전략. 그러고 보니 유튜브나 레딧 포럼에서 라이언 레이놀즈의 <복면가왕> 출연을 보는 사람은 많아도 <복면가왕>이 뭔지 몰라 헤매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어떻게 <복면가왕>이 그런 지위까지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으로든 유튜브 영상으로든 <복면가왕>을 접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 공간에 득시글거렸다. 모르고 보았을 때는 그냥 재미있는 영상일 뿐이었지만, 저간의 사정을 알고 다시 보니 소름이 돋았다. 맞다. 한국에서 만들어서 한국에서 방영하지만 한국 사람들만 보는 쇼는 아니었다.

한국 예능이나 드라마를 찾아 보는 외국 시청자의 규모는 한국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 현지 한인들이 VHS 테이프에 녹화된 한국 쇼 프로그램을 돌려 본다는 건 30여 년 전 이야기이다. 이제 한국 쇼 프로그램은 유튜브나 넷플릭스, 훌루 등의 플랫폼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됐고, 소비자층이 더 이상 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MBC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사극을 해외로 수출해서 현지 시청률이 얼마가 나왔느냐를 놓고 새삼스레 국뽕에 취한 것도 옛날이야기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한국에서 방영된 쇼 프로그램을 이틀이 지나기 전에 볼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 “우리가 만들고 세계가 함께 본다”는 문구에 무덤덤해질 때도 된 것이다. 마치 우리가 미국 CBS의 <레이트 쇼>를 유튜브로 시청하고 일본 TV 도쿄의 <고독한 미식가> 시즌 7을 도라마코리아를 통해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된 것처럼.

“우리가 만들고 세계가 함께 본다”는 문구에 담긴 국뽕이 다 휘발되고 나면 그 빈자리에 남겨진 불안감이 엄습한다. 잠재 시청자층이 5000만 명에서 수십억으로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한국 TV의 인권 감수성은 철저히 한국 시계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자. 백인들이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잡아당기며 동양인을 흉내 내는 건 인종차별이고 동양인 비하라고 입에서 불을 뿜는 사람들이, 한국 연예인이 얼굴에 검댕 칠을 하고 블랙페이스를 하는 건 그냥 유머일 뿐인데 왜 그리 과잉 반응을 하느냐고 어리둥절해한다. 욱일승천기 문양에 치를 떨면서 그 문양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이들이,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엉터리 독일어로 아돌프 히틀러 흉내를 내며 그걸 개인기랍시고 우기는 이들에게는 박수를 친다. TV 속 장애인, 성 소수자, 여성,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꾸준한 혐오와 차별은 끊이지 않는데 그걸 전 세계 사람들이 다 함께 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극의 전개를 위해’ 남자가 여자를 고막이 나가도록 때리는 드라마와, ‘유머 코드로’ 다른 인종을 비하하는 코미디와, ‘보편적인 공감에 기반해’ 성 소수자들을 후려치는 토크쇼가 세계를 향한 한국의 첫인상이 될 판이다.

물론 행동거지를 단정히 해야 할 이유로 “남들 눈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기는 하다. 인권 감수성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보는 눈이 70억이냐 5000만이냐의 문제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건 있다. 보는 눈이 우리끼리로 한정되어 있을 때는 제아무리 쪽팔리고 부당하고 민망한 짓을 해도 우리끼리 문제 제기하고 우리끼리 수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지면 사태 수습과 문제 해결 또한 전 세계적 규모가 되어버리고 만다. MBC <무한도전>과 지코가 촬영하러 왔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촬영장으로 달려갔던 LA 현지 흑인 팬들이, 흑인 문화를 과장되게 재현하는 <무한도전> 팀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보고는 모욕감에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사례를 생각해보라. 우리끼리일 때야 “누가 볼까 두렵다”라고 문제 제기를 하고 고쳐나가면 될 일이었겠지만 이미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 한국인들이 “우리끼리인데 뭐 어떠냐” 했던 예전의 습관대로 쇼 프로그램을 만들 때마다 실제로 모욕감을 느끼고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국어로 제작해 한국 플랫폼을 통해 방송하는 쇼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전 세계인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 콘텐츠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며 자부심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부족한 인권 감수성과 정치적 공정성 수준을 높여야 할 때다.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2017)는 어땠나. 이슬람 국가를 연상시키는 요소인 <코란>과 히잡과 아랍식 이름이 드라마 전반에 박혀 있는 이 작품은, 동시에 히잡을 쓴 채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과 <코란>을 펼쳐놓은 테이블 앞에서 맨다리를 꼬고 앉은 주인공, 이슬람 사회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술을 자유롭게 따르고 마시는 사람들과, 신의 계시로 클럽에 간다고 말하는 따위의 장면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죄다 이슬람 세계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일들(신체 노출, 신성모독, 음주) 아닌가. 세계 57개국 16억 명의 무슬림 인구를 드라마 하나로 모독한 이 작품은, 방영을 중단하라는 무슬림 네티즌들의 항의에 매우 나이브한 자세로 대처했다. 등장인물과 인명, 지역, 지명 등은 모두 픽션이며, 아랍 및 이슬람 문화를 희화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할 의도는 없었고, 부적절한 묘사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문 하나를 달랑 올린 것으로 입을 씻었던 것이다. 악의라는 게 별게 아니다. 잘 모르는 문화권의 문화를 재현할 때 무엇이 결례이고 무엇이 결례가 아닌지 사전에 조사하는 일 따위는 생략하고, 수박 겉핥듯 대충 기호만 가져다 쓰면 된다고 믿는 게으름은 악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해를 아주 못 하는 바는 아니다. TV는 그 사회의 욕망과 인권 수준의 평균치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울이다. 한국 사회가 함께 국난을 극복하자는 결의로 가득하던 시절에는 MBC <칭찬합시다>나 <느낌표!> 같은 공익 예능이 인기를 끌었고, 경쟁을 긍정하고 욕망하던 시절에는 Mnet <슈퍼스타K>를 필두로 온갖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했으며, 어떻게든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은 피로감으로 위태롭던 시절엔 SBS <힐링캠프>나 <땡큐>처럼 힐링을 키워드로 내세운 프로그램이 제작됐다. 뒤집어 말하면 TV는 당대 사회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운 느리고 보수적인 매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이니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욕망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한도전>의 흑인 문화 조롱은 한국 사회가 흑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의 평균치를 착실하게 반영한 결과였고, <죽어야 사는 남자>의 이슬람 문화권 조롱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한국 사회의 빈약한 이해도를 고스란히 옮겨온 결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달라져야 한다. 한국 대중을 위해 한국어로 제작해 한국 플랫폼을 통해 방송하는 쇼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이제 전 세계인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트리밍 기술이 발전하고 국가 간 인터넷 장벽이 사라져감에 따라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은 점점 내수 시장과 수출 시장 사이의 경계가 없어진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다루는 해외 포럼에는 세계 각국의 네티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얹는 중이고, 넷플릭스는 심드렁한 평단의 반응에도 유재석을 앞세운 <범인은 바로 너!>의 시즌 2를 주문했다. 한국 콘텐츠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며 자부심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부족한 인권 감수성과 정치적 공정성 수준을 높여야 할 때다. 우리 집 애가 바지도 안 입고 팬티 바람으로 대문 밖을 나설 판인데, 애한테 바지를 얼른 입히는 게 급선무일까, 아니면 우리 집 애가 이제 바깥출입도 한다며 뿌듯해하는 게 급선무일까? 더 이상 “잘 몰라서”, “악의 없는 무지로”,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어서” 같은 쉽고 편리한 핑계로 정치적 공정성과 인권 감수성을 후순위로 미룰 여유가 없다.

암울한 이야기로 끝을 맺으면 우울하니, 그래도 희망을 모색하며 글을 닫아보자. 첫 촬영지로 오만의 사막을 택한 KBS 예능 <거기가 어딘데??>는 자신들이 잘 모르는 땅에서 결례를 저지르는 일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붙임성 좋은 조세호는 사막의 태양이 피부를 태워 나처럼 검은 피부가 될 것이라는 베두인족 안내자의 말에, 웃으며 “나 그런 피부 좋아”라고 답한다. 반가운 상대와 코를 맞대며 인사하는 베두인들의 인사법을 배우고,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삶을 존중의 자세로 바라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 이역만리에서 대체 누가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볼까 싶어도, 오만 무스카트 국제공항에서 피켓을 들고 차태현을 기다리다가 환호하면서 “다음번에는 아들 수찬이도 데리고 오라”고 말하는 현지 여성 팬들이 있는 걸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가 어딘데??> 팀의 섬세한 태도는 넘치는 게 아니라 필수였던 것이다. <죽어야 사는 남자> 같은 끔찍한 선례를 생각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한국의 방송 산업이 지금부터라도 세계의 이웃 앞에 부끄럽지 않고 무해한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다. 유니콘 탈을 벗으며 웃어 보이던 라이언 레이놀즈를 보며 떠올린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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