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라스베이거스

사막의 인공 낙원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그러고 보니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본토에 온 건 처음이군.’ 공항 출입국 사무소에 억류되어 생각했다. 입국 심사장에서 취재하러 왔다고 하니 아시아계 미국인 공항 직원이 별도의 비자가 없다며 나를 대기실로 집어넣었다. 맞은편에는 몇 시간째 억류된 듯한 젊은 라틴계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젠틀맨스 트래블 가이드.” 내 여권을 들고 억류실의 백인 직원이 천천히 말했다. 신분과 목적을 알리려고 라스베이거스 관광청에서 준 취재 일정표에 써놓은 말이었다. 그는 ‘어이구’ 같은 느낌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도장을 찍어주었다. 두 번째 라스베이거스였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한국 사무소가 이 자리를 만들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여행 상품을 알려주고 체험시키는 취재 출장이었다. ‘젠틀맨스 트래블 가이드 투어’의 일정은 실제로 굉장히 화려했다. 쇼 관람. 최고의 식당에서의 한 끼. 슈퍼카를 타고 트랙 한 바퀴. 헬리콥터를 타고 그랜드캐니언 구경. 황송할 정도였다. 다만 시차를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일행 모두 시간 날 때마다 졸았다. 나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주는 식당에서도 잠든 적이 있었다.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흑인 여가수는 내가 깰 때까지 내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데 네가 잠들다니” 같은 애드리브를 했다고 들었다.

첫날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까지 잠깐 걸었다. 이때 걸은 길이 스트립(strip)이라고 부르는 라스베이거스의 중심가였다. 우리가 아는 라스베이거스의 거의 모든 호텔과 시설은 스트립 양쪽으로 몰려 있다. 라스베이거스 기반의 토착 거대 자본인 MGM 계열과 시저스 계열 그룹의 호텔이 스트립 옆의 중심 지역을 나눠 가진다. 그래서 스트립에 면한 길에서는 힐튼이나 메리어트 등 세계적인 호텔을 찾을 수 없다. 다른 도시에서 보기 힘든 라스베이거스만의 특징이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초행이어도 편해서 좋다. 큰길에 유명한 호텔이 다 있으니 스트립 안에서라면 지도 없이도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다.

이번에 묵은 호텔 이름은 델라노였다. MGM 계열의 고급 호텔이다. 실내는 도시의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새하얗고 청결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호텔인 것만은 확실한 게 엄청나게 넓었다. 침대도 유럽 침대보다 1.3배쯤 높았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거의 모든 호텔은 각자 공연장에서 특징적인 공연을 한다. 그걸 보러 다니는 것도 라스베이거스 여행의 재미다. 이번에 묵은 델라노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원(one) 쇼를 했다. 호텔마다 잘하는 쇼가 다른 것도 라스베이거스의 특징이다. 시저스는 음악 공연에 강하다. 라스베이거스의 디바 셀린 디온이 시저스 무대에 선다.

이번 일정에도 쇼 관람이 있었다. 미라지 호텔의 ‘러브 시어터’에서 하는 공연 ‘러브’였다. 태양의 서커스 팀이 비틀스의 명곡을 배경음악 삼아 만든 쇼다. 라스베이거스 쇼 콘텐츠에는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 등 유명인에게서 모티프를 가져온다. 시각적으로 화려하다. 말이 필요 없는 공연이 많다(그러니까 영어를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자극적이지만 불건전하지는 않다. 서커스니까 아슬아슬하지만 밝고 즐겁다. 그늘이 없다.

밝다. 그늘이 없다. 규모가 압도적이다. 라스베이거스 여행이라는 콘텐츠의 전반적인 특징이 그랬다.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콘텐츠가 그랜드캐니언 투어였다. 라스베이거스에서 20분쯤 떨어진 볼더시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그랜드캐니언을 보고 오는 여행이다. 도시를 지나면 네바다주의 사막이 펼쳐지다가 곧 거대한 사암 지대가 나타난다. 그야말로 ‘그랜드’한 광경이다.

헬리콥터 안은 무척 시끄러워서 모두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한국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저기 보이는 게 후버 댐입니다. 이 댐이 터질 경우 뉴욕주 전체가 물에 잠길 거라고 합니다.” 한국어 안내 멘트가 있다는 건 라스베이거스에 한국인 여행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특히 이렇게 한국어 프로그램이 지원되는 코스는 단체 여행자나 중장년층이 많이 온다.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여행사 앞에도 “세계 7대 불가사의 그랜드캐니언 투어 즉시 예약 가능” 같은 말이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예전에는 단체 관광객이 많이 왔죠.” 이번 취재를 물심양면 도와준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임세정 부장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유 여행객도 많이 와요. 정해진 프로그램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알아서 원하는 걸 찾아가는 분들이에요.”

그렇게 알아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스피드 베가스 같은 곳에 간다. 포드 머스탱 셸비부터 람보르기니 우라칸에 이르는 세계의 명차 9종을 서킷에서 타볼 수 있다. 레이스 트랙에서 전문가에게 교육을 받고 나서 달리니 안전하고 짜릿하다. 다만 영어로만 설명하니까 여행 상품 입장에서는 난도가 높다. 그런데 요즘 여행자들은 이런 여행 코스도 즐기고 온다. 여행이라는 콘텐츠뿐 아니라 한국 여행자의 수요 역시 다양해진 셈이다.

보통 여행지에서 상상하기 힘든 것도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스베이거스에는 ‘톱골프’라는 시설이 있다. 술 마시는 볼링장의 골프 버전이다. 클럽 근처에 대형 맞춤 정장 가게도 있다. 코즈모폴리턴 호텔 안의 ‘스티치드’는 화려해 보이는 외양답게 세븐 폴드 타이까지 판매한다. 여기서 잘나간다는 시그너처 셔츠를 입어보기도 했다. 폴리에스테르와 스판덱스가 섞인 검은색 셔츠였다. 구겨지지 않고(구겨질 리가 없다) 잘 늘어나서 입기 편하며 은은한 광택도 났다. 에어컨 바람이 면 셔츠를 뚫고 들어온다. 울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입기에 너무 덥다. 검은색 폴리에스테르 셔츠야말로 라스베이거스의 에어컨 기후와 잘 어울리는 복장이다.

라스베이거스는 놀라울 정도로 인공적인 도시다. 스트립 한가운데에서 라스베이거스를 내려다보는 관람차 하이 롤러를 타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관람차가 올라가며 호텔 높이를 넘어서면 호텔 뒤로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보인다. 시야 끝에 있는 건 아메리칸 인디언의 피부색처럼 붉은 모래색을 띤 사막 뒤로 보이는 마른 산뿐이다.

스트립을 따라 걷다 보면 라스베이거스만의 인공 미학이 더욱 잘 느껴진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모양의 건물 옆으로 라스베이거스 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을 기준으로 걸어서 10분 안팎 거리에 베네치아 곤돌라와 에펠탑도 있다. 피라미드도, 심지어는 사막 한가운데에 파도가 치는 풀장도 있다. 이 모든 게 한곳에 모여 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파도처럼 지나갔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미국인은 거래가 확실하다. 여기서 거래되는 품목은 즐거움이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사러 라스베이거스에 온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즐거움을 위해 돈과 시간을 라스베이거스에 지불한다. 그걸 받은 라스베이거스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자극을 되돌려준다.

“라스베이거스는 날씨가 따뜻해요. 사람들도 좋지.” 자극과 즐거움이라고 해서 무조건 강렬한 게 아니다. 은은하고 조용하고 기분 좋은 즐거움도 있다. MGM 리조트에서 얼굴 스파를 해준 우피 골드버그를 닮은 마사지사는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브루클린에서 왔어요. 오, 거기는 추워요. 겨울에는 꽁꽁 얼어요. 브루클린에 살던 노토리어스 BIG를 좋아했죠. 하지만 라스베이거스가 더 좋아요. 늘 따뜻해요.”

그러게 말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자연적 기후와 인공적 환경은 사람을 늘어지게 한다. 밖은 건조하고 뜨겁다. 안은 시원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말 그대로 코너를 돌 때마다 있다. 반짝이는 것들, 달콤한 냄새. 적당히 들뜬 손님들. 친근한 상인들. 길거리의 분위기. 아주 밝은 태양. 자연과 인공의 반사광. 번쩍이는 것들.

그리고 게임이 있다. 라스베이거스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것 말이다. 카지노가 있는 도시의 관광청 중에서는 카지노의 ‘카’ 자도 못 꺼내게 하는 도시가 많다. 라스베이거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덕에 다른 서비스가 저렴하기도 해요” 같은 말을 듣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가격에 비해 숙박비가 저렴해요. 쇼나 여러 가지 즐길 거리도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오신 분들은 ‘이렇게 쓰고도 돈이 남았는데 게임 한번 해볼까’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겠죠.” 그런 면에서 라스베이거스의 여행 콘텐츠들은 조금은 게임의 덕을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보는 곳은 식당계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좋은 식당이 아주 많다. 에펠탑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함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3km 반경 안에 높은 밀도로 모여 있다. 어디에 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도 상관없다. ‘라스베이거스 푸디 투어’에 참가하면 예약이 힘들 정도로 유명한 식당 다섯 군데에서 각 식당의 대표 메뉴를 먹을 수 있다.

2대째 한우 전문 정육점을 운영하는 내 친구 유상이가 말했다. “구울 때는 미국 소가 최고야.” 그 이후로 미국에서는 꼭 소고기를 먹는다. 미국에서 먹는 미국 소고기는 정말 훌륭했다. 시카고풍 스테이크하우스인 바베츠에서도, 시가와 함께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는 올드 홈스테드 클럽하우스에서도 책보다 두꺼운 스테이크를 썰었다. 24시간 한식당 김치에도 혼자 가서 소고기 주물럭을 구웠다.

공연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던 저녁이었다. 거리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둘은 스트립 곳곳에서 사람이 없는 분수대 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말을 걸었다. 신혼여행인지. “맞아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왔어요. 여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게 우리의 웨딩 촬영이에요.” 그들은 내가 사진을 찍어준 후에도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계속 셀카로 사진을 찍었다. 옆의 사람들이 계속 말을 걸었다. “여, 결혼했어요? 잘못 생각한 거야.” “축하해요! 너무 로맨틱하네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웃었다.

그걸 보자 ‘이거면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어디에서 왔든, 여행에 얼마나 익숙하든, 무엇을 보고 싶거나 먹고 싶든, 어떤 종류의 쾌감을 원하든, 라스베이거스는 사람들이 원하는 걸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딱 적당한 정도의 짜릿함을.

들어올 때와는 달리 미국은 떠날 때 굉장히 친절하고 빠르다. E3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항의 수수한 광택 바닥재 위로 뭔가가 번쩍거렸다. 슬롯머신의 반사광이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떠날 때까지 라스베이거스구나 싶었다. 우버 기사와 나눈 말이 생각났다. 내가 물었다. 라스베이거스는 좋은 곳인가요? “그럼요. 당신이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즐긴 것

델라노

라스베이거스에 몇 없는 ‘논 카지노 호텔’이다. 가족 여행객에게 좋다. 바로 옆 만달레이 베이의 풀장도 이용할 수 있다.
www.delanolasvegas.com

러브: 태양의 서커스

미라지 호텔의 전용 극장 ‘러브 시어터’에서 공연한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티셔츠도 귀엽다.
www.cirquedusoleil.com/beatles-love

로즈. 래빗. 라이.

스트립 한가운데에 있는 코즈모폴리턴 호텔 내부에 자리한 식당 겸 바. 계속 공연이 열린다. www.cosmopolitanlasvegas.com/restaurants/rose-rabbit-lie

톱골프

골프와 술과 스포츠 관람을 좋아한다면 여기만 한 곳이 없다. 골프를 못 쳐도 즐겁게 놀 수 있다.
topgolf.com/us/las-vegas

골든 이글 헬리콥터 투어

헬리콥터 투어 전문 여행사는 모두 친절하고 안전하다. 여기는 한국어 홈페이지가 있다.
ko.papillon.com

스티치드

코즈모폴리턴 호텔 2층에 있는 맞춤 정장 전문점. 기성복도 많이 판다.
stitchedlifestyle.com

립 스매킹 푸디 투어

3시간 동안 호텔 안의 고급 식당을 계속 돈다. 미식을 원하는데 정보가 없을 때 아주 좋다.
vegasfoodietour.com

스피드 베가스

영어는 아주 기초 수준만 해도 된다. 대신 국제운전면허증과 한국 운전면허증이 꼭 필요하다.
speedvegas.com

MGM 스파

수염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세심한 수염 관리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www.mgmgrand.com/en/amenities/the-barbershop-at-mgm-gran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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