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성폭력에 시달려온 한국 여자들에게 듣는 한국 남자들의 끔찍함과 추함에 대하여.

지난 2017년 10월 29일 오전 3시 19분,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강간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글이 게재됐다. 입사 3일 만에 신입 사원들의 입사 교육을 맡았던 교육 담당자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 사건에 개입했던 해당 기업의 인사팀장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글은 일파만파 공유되며 글 속에 밝히지 않은 대기업의 실체까지 공개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해당 기업은 한샘이었다. 한샘의 최양하 회장이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건 포털 사이트의 글이 세상에 공개된 지 정확히 일주일째인 2017년 11월 4일이었다. “회사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임직원에게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직원을 적극적으로 돌보지 못해 뼈아프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직원을 제2, 제3의 피해에서 보호하는 일이다. 확실하게 진상이 파악되는 대로 엄중한 책임을 묻고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겠다.”

지난 12월 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한샘 성폭행 사건’을 다뤘다. 한샘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출연해 당시 상황을 진술했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엄중한 책임을 묻고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겠다는 회장의 의지는 큰 효과를 발휘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보도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교육 담당자의 고소 취하 요구에 시달리는 가운데 사내 인사팀장의 진술 번복 요구로 진술을 번복했으며 이로 인해 해고 처분을 받았던 1차 가해자의 징계 수위는 정직 3개월로 낮아졌다. 그리고 피해자는 풍기문란이란 이유로 감봉 처분을 받았다. 2차 성폭행 미수를 저지른 인사팀장은 결국 해고됐는데 공식 사유는 성폭력이 아닌 횡령이었다. 사내에서는 피해자가 꽃뱀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퇴사를 결심했던 피해자에게 사내 법무팀은 두 달간의 휴직을 권유했다. 그 과정에서 법무팀으로부터 ‘입단속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결국 피해자는 휴직 기간이 끝나가고 복직을 앞둔 상황에서 괴로움을 느꼈고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어 절박한 마음으로 글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한샘 성폭행 사건을 통해 우리가 환기해야 할 사안이 있다. 남자가 여자를 힘으로 제압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건 단순한 해석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봐야 할 부분이 있다. 한샘 사태의 본질은 조직의 남자 상사가 여자 부하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1차적인 가해를 당한 피해자가 2차적인 가해를 당하는 상황으로 악화되는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조직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한샘뿐만이 아닌 것 같다. 한샘 성폭행을 폭로하는 글이 게재된 이후 현대카드 사내 성폭행 폭로 글이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왔다. 씨티은행에서는 차장급 직원이 지속적으로 여직원의 신체 일부를 촬영해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DB그룹의 전신인 동부그룹의 김준기 회장은 여비서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뒤 체포 영장이 발부됐으나 신병 치료차 머물고 있다는 미국에서 언제 돌아올 것인지 소식이 요원하다.

얼음의 밀도는 물보다 10% 낮다. 빙산이 전체 부피의 10%만 물 위에 드러나는 건 그래서다. 이것을 빙산의 일각이라 부른다. 한샘 성폭행 사건으로부터 가시화된 대기업 성범죄 스캔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 사회라는 수면 아래를 거대하고 단단하게 지배하는 한국 남자들의 추한 내면을 마주 보기 위해선 그 수면 아래로 발목을 잡히듯 끌려 내려가 허우적거려야 했던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트위터를 통해 남자들로부터 성적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의 제보를 구했다. 스물세 명의 여성이 이에 응답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바로 그들 덕분에 알게 된 추한 남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샘 성폭력 사건은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조직 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고 음흉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취재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A가 말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가게에서 만난 점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A는 그가 종종 어깨동무를 하거나 실수인 척하며 신체로 가슴 부위를 스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래서 불쾌함을 표현하면 “내가 널 여자로 보고 그러겠냐? 참 예민하네”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순진하고 어린 나이라 그랬는지 그때는 제가 정말 예민한 건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뻔한 행동과 말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점장은 A가 가게를 그만둔 뒤에도 가끔씩 만나자고 연락했다고 한다.

B는 오래 알고 지냈던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보인 추태를 종종 떠올린다고 했다. 원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였는데 종래에 자신과 선생님만 남게 된 술자리에서 B는 믿기 힘든 말을 듣게 됐다. “대뜸 키스를 해도 되느냐고 묻더라고요. 거절했는데도 입술을 갖다 대려고 하길래 뿌리치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 사과를 하면서도 ‘예쁜 여자랑 술 마시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눙치는데 그냥 알고 지낸 세월이 있어서 넘어갔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생각이 나요. 애초에 단둘이 남는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내가 여지를 준 걸까? 이런 생각이요.”

C는 직장 상사와 함께 외부 업체 사람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 나갔다가 2차로 노래방에 갔다. 잠시 후 상사로부터 옆방으로 따라오라는 말을 들었다. 비어 있는 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사가 얼굴을 들이밀더니 입을 맞추려 했고 강간까지 시도했다. 안간힘을 써서 버티자 상사가 말했다. “내가 첫 남자여도 돼.” 다행히도 노래방 직원이 들어왔다. 결제하지 않고 빈 방을 쓰는 손님이 있다는 걸 알고 따지러 온 덕분이었다. 다음 날 상사에게 따져 묻자 그는 ‘기억이 안 난다’며 잡아뗐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한 달 뒤에 퇴사했다는 사실이었다.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스님들과 ‘떡치러 갔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던 인간이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들었는데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까 정말 경멸스러운 인간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죠.”

출장 업무가 많은 상사의 직속 비서로 근무했던 D는 상사의 출장에 언제나 동행해야 했다. 그런데 출장을 갈 때마다 만만치 않은 긴장에 시달려야 했다. 업무의 과중함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출장에 동행했을 때 상사는 자신의 방으로 D를 불렀다. 방에 찾아갔더니 상사가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전 비서들은 내게 모든 걸 다 바쳤어.” 너무 노골적이라 공포스러웠다. 그 뒤로도 출장을 갈 때마다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상사의 방으로 불려가야만 했다. D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모든 걸 다 바쳤다던 비서들도 이미 다 퇴사한 지 오래였죠.”

네 명의 여자가 제보한 경험은 하나의 공통분모 위에 있었다. 자신에게 업무를 지시할 권한이 있는 남자 상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왔다는 점이다. 매일같이 사무실에서 마주 봐야 하는 직장 동료가 하루아침에 성폭행범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성폭행을 감행하고도 다음 날 뻔뻔한 얼굴로 인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심지어 업무적인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피해자들에게 약자의 억울함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당하고 나면 도움받을 길이 요원하고, 모면하면 끊임없이 피로한 괴롭힘이 이어진다. 결국 피해자 입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한샘 성폭력 사건은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조직 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고 음흉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놀랍도록 당당한 그 남자들의 태도는 업무를 책임지고 지시할 수 있는 조직 안에서의 권력을 악용해 사석에서 폭력을 부리겠다는 추악한 야심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보다 악랄하고 추접하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은 비단 직장 내에서만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F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13세 무렵 학교 벤치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체육 시간에 등받이가 없는 교내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등 뒤에 무언가가 바짝 붙었다는 걸 느꼈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등에 막대 같은 것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늘 들고 다니던 지휘봉인 줄 알았죠.” 그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된 건 성인이 될 무렵이었다. G는 중학교 시절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맹점들 사이에서 종종 물자를 주고받을 일이 생겨요. 일회용 컵이나 뚜껑이 모자라서 다른 가맹점에 지원을 요청하는 거죠. 그럼 아르바이트생이 택시를 타고 다녀오는데, 일을 땡땡이치는 기분이라 어린 애들끼리 서로 가겠다고 나서요. 그러다 헬게이트가 열리는 거죠.” 그러니까 지옥문이 열린다는 건데, 여기서 입장하게 되는 지옥은 바로 택시다. 유니폼을 입은 어린 학생에게 택시 기사들은 폭격하듯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거다. “몇 살이야? 시급 얼마 받아? 돈 줄 테니까 아저씨랑 데이트할래? 다리 좀 더 벌려봐. 열이면 열 다 이런 식의 성희롱을 당하죠.”

H는 지하철역에서 만났던 한 남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러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제일 끝 칸 쪽으로 걸어가는 H의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정면으로 H를 응시하고 걸어오던 남자는 갑자기 H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너 먹고 싶다.” H는 너무 놀라서 5분 정도 가만히 서 있었다고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피해자들이 왜 가만히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어요. 심지어 주변에 사람도 많았던 오후 3시쯤이었는데.” I는 대학교 1학년 무렵에 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집에 들어가려다가 갑작스럽게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몸을 더듬는 추행을 당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달아난 뒤에도 집에 들어가 방에 가만히 앉다가 저녁쯤 돼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어머니도 왜 바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정신이 멍해졌어요.”

지하철을 탈 때 주변에 선 남자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에 대해 남자는 모른다. 택시를 타고서는 택시 기사가 어떤 말을 할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을 남자는 모른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와 단둘이 남았을 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남자는 모른다. 결코 모를 일이다.

성범죄는 강자가 약자를 사냥하듯 벌어진다. 약한 여자를 노리는 남자들의 시야에는 어린 여자도 포착된다. 그리고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사냥감으로 전락한 대상에게 이는 재앙처럼 다가오는 일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매뉴얼이 없기에 무력해지는 일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성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배우지도 못했다. 막상 배웠다 해도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추행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아서 무안을 주거나 소리를 질러서 제압하라는 얘기를 계속 들으며 자랐는데도 성추행을 당하게 되니까 그냥 정신이 아득해지더라고요. 대부분 그럴 거 같아요.” I의 말이다. 게다가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서 모든 사건이 순탄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곤혹스러운 과정을 겪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J는 지자체가 주관하는 축제를 준비하는 팀에서 근무할 때 사무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매일같이 팀원들을 술자리로 불러내던 사무장은 그날 J를 술자리에 불러냈고 J의 업무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 단둘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J의 몸을 더듬었다. J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경찰에 신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카톡으로 성추행 사실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해 사과를 받았고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물어서 인정한다는 답을 받았다. 그리고 변호사를 찾아가 고소를 진행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쾌한 말을 듣게 됐다. “혹시 사무장과 승진이나 연봉과 관련해서 딜을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억하심정으로 고소한 거 아니에요? 5월 말에 계약이 끝나는 걸로 아는데, 계약 연장이 안 될 거 같아서 성추행 신고를 하는 건 아니죠?” 그 뒤로도 불쾌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고소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추가 조사를 위해 경찰서를 방문할 일이 생겼던 J는 사무장과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대를 적절히 조절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번번이 마주치는 일이 생겼다. 피해자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 자체가 무시된 셈이다. K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만지는 성추행범을 잡아서 함께 경찰서에 갔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조사를 받긴 했지만 이동하는 과정에서 서로 마주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자 성추행범이 K를 보고 소리 질렀다. “내가 네 얼굴 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나가면 죽여버릴 거야!” 앞에 앉은 경찰이 지금 했던 말로도 입건할 수 있다고 하자 입을 다물었다. “경찰서에 가서 이런 과정을 겪게 되면 성추행범을 신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신고를 고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애써서 더 모욕당하는 느낌마저 들거든요.”

사실 성범죄를 신고해도 가해자를 처벌하기까지의 과정은 만만찮다.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리가 되는 경우가 많고, 무혐의 처리를 받은 가해자가 역으로 무고죄로 고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리적 고통을 받은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이 되레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국내에서 성범죄 피해를 판단하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피해자의 저항 여부에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문제는 저항이라는 기준 자체가 모호할뿐더러 성범죄에 노출된 여성이 받아들일 폭력적 상황을 온전히 무시하는 처사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작년 11월 13일 포항의 한 노래방에서 일하던 노래방 도우미가 성폭행에 저항하다 목이 졸려 숨진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법부는 성폭력의 피해자가 예측할 수 없는 폭력의 수위를 온전히 감당하면서까지 성폭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원칙이 역설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을 배려하는 가이드라인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여성 혐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불과 몇 년 사이다. 여전히 남녀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키는 이 말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서 인지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실제로 여성들은 여성 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 빼라는 얘기도 성희롱이 된다는 기사까지 나와서 그런지 요즘은 회사에서 여자들에게 함부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거 같아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통통한 여자한테 살 빼라는 말을 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거든요.” L의 말처럼 그러한 사안에 개인적으로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사회적 인식이 어떤 방향을 가리키면 개개인의 시선도 그쪽을 바라보게 돼 있는 법이다. “사실 성추행과 강간은 여성운동만으로 막긴 어려워요. 애초에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이나 여성운동이 촉발될 때 같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거죠. 결국 여성운동이 해내야 하는 건 성추행과 강간을 일삼는 이들이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이런 일그러진 성 의식이 결코 멋지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M의 말이다.

M은 유년 시절에 어머니와 재혼한 양아버지와 살았다. 양아버지는 종종 자신의 몸을 어린 M의 몸에 비볐다고 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이 된 M은 양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그때 알았죠. 그 이전에 있었던 일도 일종의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그 뒤로 집을 나가 두 달간 바깥을 전전하던 M은 세상이 더욱 끔찍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잘 곳이 없어서 지하보도 같은 곳에 앉아 있을 때 정말 많은 남자들에게 성매매 제의를 받았어요. 갈 데 없으면 10만원 줄 테니까 자기 집에 가자고. 그리고 PC방이라도 가서 의자에서 잠을 자고 있으면 사장님이 자기 집에 가자고 하기도 하고. 정말 이상한 일이 많았죠.” 결국 두 달 만에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양아버지의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양아버지와 다툰 어머니는 딸과 함께 집을 나왔다. M은 그때 양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네 딸이 나를 유혹한 거라고 했어요. 내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는 듯이 상세하게 말을 지어냈죠.”

시골은 도시와 달리 어느 집이 어떤 숟가락을 쓰는지 알 정도로 이웃끼리 왕래가 많고 소식도 빠르다. M이 살던 시골 마을에서 M이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은 발 빠르게 퍼졌다. 어른들은 M을 보며 수군거렸고, 또래 남자 중에서 M을 보고 이상한 웃음을 짓는 애들도 생겨났다. 그런 어느 날 M은 동네에서 조금 안면이 있는 고등학생이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불려나간 자리에서 강압적으로 술을 먹게 됐다. 그들에 대해서 워낙 안 좋은 소문을 많이 들었던 터라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고, 처음 술을 마신 탓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기를 느꼈다. 그리고 결국 그 자리에 있던 고등학생들에게 윤간을 당했다. 그 뒤로 학교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M은 자퇴를 했고, 그 지역을 떠났다. 다행히도 지금은 타 지역에 잘 정착해서 살고 있지만 그 뒤로 평범한 연애를 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가 남자를 일방적으로 혐오하게 됐기 때문이라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소유욕에서 시작돼요. 그런데 누군가의 몸에 삽입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가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 그릇된 인식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이런 성범죄가 계속될 거 같아요. 그런 인식과 싸워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인간이 잘못된 건 아니라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믿음이 없이 싸운다면 이 싸움도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라는 거죠. 결국 남자들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공격적인 말만 던지는 건 무의미할 거예요. 어떻게든 상대가 변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계속해서 그 변화를 요구해야 이 운동이, 이 사회가 빨리 자정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비록 남자로 인해 끔찍한 일들을 겪었지만 그런 믿음만은 가지려고 해요.”

나는 M의 말에서 필연적인 숙연함과 역설적인 숭고함을 느꼈다. 남성들에 의해 인생을 유린당한 여자로부터 남성에 대한 믿음을 듣게 된다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남성의 입장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어느 여성에게 끔찍한 존재가 된 적은 없는지 곱씹어보게 됐다. 스물세 명의 여성들이 겪은 남성들의 폭력담은 너무 방대해서 지면에 모두 다 옮길 수 없지만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감내해야 할 폭력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와 같은 남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하철을 탈 때 주변에 선 남자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에 대해 남자는 모른다. 택시를 타고서는 택시 기사가 어떤 말을 할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을 남자는 모른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와 단둘이 남았을 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남자는 모른다. 결코 모를 일이다.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라는 무지한 방관에서 안주하는 것도 이제 덜 떨어진 일임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말처럼, “무지는 순수가 아니라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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