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은 누구인가

이것은 헌사가 아니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대한 기록이다.

“이게 이야깃거리가 되나요?” 취재 요청 차 전화를 걸었을 때 김현이 말했다. 그가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에 건 전화였다. 김현은 디자이너다. 디자인 중에서도 CI와 BI 전문이다. CI는 코퍼레이트 아이덴티티(corporate identity), BI는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의 약자다. 각각 기업 이미지, 브랜드 이미지를 통합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미지 통합 작업의 중심은 디자인이다. 심벌, 로고, 마스코트 등 기업과 브랜드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일관되게 디자인한다. 이를 ‘아이덴티티’라 부르는 이유는 명료한 디자인이야말로 대상의 정체성을 견고히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청와대를 떠올려보라. 정직한 선의 청색 기와집이 생각난다. 프로야구단 한화이글스(구 빙그레이글스) 하면 독수리가, BC카드 하면 빨간 풍선을 닮은 로고가 떠오를 것이다. ‘아이덴티티’ 작업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예들은 모두 김현의 디자인이다.

호돌이도 김현이 디자인했다. 1988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그 호돌이 맞다. 1993 대전엑스포 꿈돌이 탄생에도 기여했다. 메이저 CI & BI 전문 회사 디자인파크를 설립하기도 했다. 제주도, 대법원, EBS, 교보, 티머니, 한국은행디자이너로 데뷔한 1969년 이래 김현은 끝없이 디자인을 했다. 김현과 그가 이끈 디자인파크를 두고 전 월간 <디자인> 편집장이자 디자인 전문 칼럼니스트 김신은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김현의 디자인 역사는 한국 디자인 산업의 역사다.”

김현의 개인 디자인과 디자인파크의 작업을 모은 책. 고르고 골라 400여 개의 아이덴티티 디자인 자료를 담았다.

디자이너로 40년, 디자인파크 대표로는 25주년이던 2009년, 김현은 그간의 포트폴리오를 모아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김현 디자인 40년전 + 디자인파크 25년전>을 열었다. 당시 김현은 말했다. “10년은 해야 일하는 법을 배우고, 20년은 해야 제 몫을 하기 시작합니다. 30년은 해야 괜찮게 한다 할 수 있고, 40년은 해야 꽤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년은 해야 자기만의 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고, 60년은 해야 정말 잘하는 경지에 다다르겠지요. 이제 40년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리고 2018년, 김현이 브랜드 디자이너로서의 이별을 고했다. 디자이너로 50년 차가 되는 해, 그의 언어를 빌리면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열었다 할 수 있는 이때. 김현이 이끈 디자인파크는 2세대, 3세대 디자이너들이 디파크브랜딩이라는 새 이름으로 이어간다. 무슨 일일까? 어떤 의미일까? 1세대 디자이너가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고 치부해도 괜찮을까? 반평생 해온 업을 내려놓는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서울대학교 조영제 교수가 한국 내 브랜드 디자인의 초석기를 만들었다고 본다면 김현 디자이너가 전성기와 중흥기, 지금의 변혁기까지 아우르는 모든 시기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죠.” 경성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정한경의 의견이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명예교수 조영제는 한국 CI 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국의 첫 CI 작업으로 치는 1970년대 OB맥주 레이블을 조영제가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김현에게 그의 디자인 역사를 묻기에 앞서 국내 CI의 시작을 물었다. “CI는 1950년대 미국 코카콜라나 IBM을 통해 본격화됐어요.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인데 나라마다 환경이 다르니 조금만 관리를 잘못해도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엉망으로 변하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국적 기업들이 명함부터 유니폼, 간판 등 브랜드와 관련된 수백 가지 것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한 게 CI의 시작이죠. 우리나라에서는 1974년에 조영제 선생님이 알파벳 O와 B를 크게 강조해 디자인한 OB맥주 레이블을 최초로 봐요.” 미국의 상황을 보고 일본에서 CI 붐이 일었고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태동했다. 김현은 그 역사의 시작점에 함께 있었다. 조영제디자인연구소 ‘1호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OB맥주 레이블 작업 이후 조영제 선생님이 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워낙 일이 많고 바쁘니 누군가 회사에 붙박이로 있으면서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해서 제가 일하러 간 거였어요.” 교수 중심의 조영제디자인연구소에서 당시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을 막 졸업한 김현은 그야말로 ‘붙박이’로 CI 업무의 전반적인 과정을 익혔다. 당시 조영제디자인연구소는 제일제당, 신세계백화점, 제일모직 등 국내 주요 기업의 CI 작업을 도맡았다. 김현은 이때를 ‘새로운 문명’을 접한 시기라고 정의한다. “본격적으로 CI 시대가 열렸는데 맨 처음 출발할 때부터 함께하게 됐고 그것이 평생의 일이 됐죠. 조영제 선생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아주 행운이고. 빨리 접하게 된 거니까요, 새로운 문명을.”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최지웅은 소문난 ‘88 서울올림픽’ 컬렉터다. 88올림픽이 열리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호돌이는 물론 우표, 배지 등 88올림픽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았다. “어릴 때는 그저 매력적이라서 좋았어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지금 보니 88올림픽은 한국에서 체계화된 그래픽 디자인 시스템의 최초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돌이는 그래픽이 아니다. 하나하나 손으로 그린 것이다. “그것을 작도법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호돌이 겉모양에 두른 검은 테두리의 경우 지금이야 프로그램으로 굵기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일정하게 그린 거예요. 컴퍼스와 자를 활용해 아주 정확한 치수로 그린 거죠. 호돌이는 그래픽적 조형미를 마련했다는 것에 굉장한 의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CI에 눈뜬 이 시기에 앞서 김현이 스스로 디자인 경력의 시작으로 삼는 1969년의 일이다. 당시 김현은 제일은행 주최 전국 저축 포스터 공모전에서 ‘저축 버릇 여든까지’라는 슬로건과 디자인으로 1등을 수상했다. 상금으로 30만원을 받았다. 평균 상금 3만원, 많아야 5만원 하던 시절이다. “그때 30만원은 지금으로 치면 3000만원에 가까울 거예요.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거의 50년 됐네. 깜짝 놀랄 만한 액수였기 때문에 아주 화제가 됐죠.” 그야말로 ‘대박’이었다는 공모전 수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신세계백화점 포장 콘테스트에서 또 1등을 했어요.” 역시 30만원 상금이었다. “그때만 해도 잘살지 못하던 때라 집에 쌀 사고 연탄 사고, 겨울 날 준비 다 했죠. 빚도 다 갚고 동생들 학비도 주고.” 김현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연달아 되다 보니까 갑자기 유명해졌죠.” 여기에서 ‘연달아’는 김현이 디자인한 호돌이가 88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낙점된 1983년까지를 의미한다. 그사이 14년이란 시간 동안 그는 80여 차례 공모전에 당선됐다. 1년에 최소 5번, 2개월마다 1번꼴로 수상한 셈이다. 한국 관광 포스터, 한국 차 패키지 디자인, 전국체육대회 심벌 디자인 등 분야를 막론했다. “호돌이가 된 다음부터는 ‘스톱’했어요. 뭐, 호돌이까지 됐는데 또 조그마한 것까지 하면 사람이 치사해질 것 같아서딴 사람들도 해야 하니까.”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동시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김현은 ‘맨날 수상하는 사람’, ‘공모전 최다 수상자’로 유명했다. 천부적인 재능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무슨 소리, 노력형이죠. 나를 천재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제가 그래요. 너 35번 떨어져봤어? 떨어져봐, 그럼 알아.”

이후의 전개는 예상 가능하다. 진부하고 고루한 이야기라 여겨질 수 있다. 성공 신화의 공통 요소니까. 칠전팔기. 그렇다. 김현도 여러 번 실패를 맛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았다. 다만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35번의 탈락이 3년 내내 연달아 이어진 기록이라는 점. 이를 즐겼다는 점이다. “저보다 많이 떨어진 사람을 아직 못 봤어요. 출전한 공모전마다 단 한 번도 안 되고 3년 내내 떨어졌어요.” 줄지은 탈락 경험은 연이은 수상 기록만큼 김현의 긍지다. “떨어지고 나서 발표된 당선작을 보면 확실히 내 것보다 좋아요. 아, 이런 점을 잘했구나. 그래서 됐구나. 그게 보여요. 왜 떨어졌는지 알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저절로 나와요. 지금이야 놀 게 많지, 그때는 뭐가 있어요.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학교 공부와는 또 전혀 다르잖아요. 실전이니까. 무엇이 당선작인가 밤새 살펴봤지.” 말이 쉽다. 내 것이 대체 어디가 부족하길래 탈락했나 분한 상황이 한 번도 없었을까? “그건 그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거죠. 심사라는 건 공평하거든요. 저는 그렇다고 믿어요. 가장 중요한 점은, 이후에 제가 당선된 게 주로 포스터였는데 말이죠, 제가 끙끙 그려내잖아요? 그럼 맨 처음으로 우리 가족한테 보여줘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이 사람들은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문외한이죠.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이들에게 아무 설명 없이 작업한 걸 딱 보여주면서 ‘이게 뭘로 보입니까?’ 물어요. ‘이러저러한 이야기 아니냐?’라고 알아맞히면 그 포스터는 무조건 당선이에요. 무조건. 만약 ‘그게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라고 되물으면 실패작이에요. 그건 미련 없이 새로 그려야 해요.”

이 시기에 수없이 되새긴 질문은, 김현의 인생은 물론 디자인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디자인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알고 확인하고 앞으로 더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에요.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쟁자는 누구이며,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그리고 거짓말처럼, 탈락의 3년을 보낸 후인 1969년 김현은 당대 최대 규모 공모전에서 1등에 오른다. ‘김현 디자인’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도사지, 도사.” 그의 동료이자 상사였던 윤호섭은 김현에 대해 주저 없이 답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 윤호섭은 김현과 함께 1976년부터 대우기획조정실 제작팀에서 근무했다. 디자인실이라고도 부르던 제작팀은 전략적인 기업 홍보를 위해 디자인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합동통신사(현 오리콤)에 있을 때였어요. 조영제 교수님이 대우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 김현에게도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김현이 누구인지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내가 김현에게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랬어.” 김현은 조영제디자인연구실에서 대우로 옮겨 윤호섭과는 6년, 총 8년 반을 일했다. 이 시기를 두고 김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회상했다. “다른 회사들은 결재가 복잡한데 대우 디자인실은 안 그랬어요. 우리 디자인실에서만 OK 하면 바로 TV 광고 나가고 신문 광고 나가요. 해외 광고도. 누구도 ‘노 터치’. 왜냐면 김우중 회장이 디자인실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라고 선포했거든. 진행 상황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윤호섭 부장이 1년에 한 번 회장에게 보고했어요. 디자인에 대해 완전히 믿고 맡겨줬죠.” 김현은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봤다고 말했다. 원이 없다고 했다. 너무나 자유로워 행복했다고 돌이켰다. 다만 윤호섭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그건 본인이 잘하니까 그랬지. 스트레스받는 직원들은 받았지.” 윤호섭의 눈이 호를 그렸다. 김현에 대해 말할 때 짓는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다며 취재에 응한 그였다.

윤호섭과 김현이 주축이 돼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으로 시작했던 대우 기획조정실은 70명까지 늘었다. 삼성, 금성, 현대자동차 등 큰 기업들이 디자인실을 강화하던 때 후발 주자로 출발한 대우가 기업 PR 광고의 선두를 이끌었다. 다른 기업들은 제품 광고에만 열을 올릴 뿐 창립 기념일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던 기업 PR 광고를 국내외 할 것 없이 시리즈로 내보내며 활약한 결과였다.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대우는 꿈의 직장으로 불렸다. 윤호섭과 김현의 공통된 기억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에서도 이런 회사는 없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호돌이가 탄생한 1980년대의 김현.

김현이 대우 시절을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단연 호돌이다. 대우 근무 당시 디자인한 호돌이가 올림픽 마스코트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1981년에 서울이 88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마스코트 지명 공모전(1983)이 열렸다. 국민 의견을 수렴해서 정한 주제는 호랑이.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학교수, 만화가, 디자이너 등 전문가 7명을 지명해 경쟁 형식의 공모전을 열었다. 당시 대우 기획조정실 과장이던 김현도 포함됐다. “기한은 석 달이었어요. 직장 동료는 물론 선후배, 일가친척, 그동안 연락조차 뜸했던 해외 거주 친지들에게까지 연락해서 호랑이 자료를 수집했죠. 못해도 500마리는 될 거예요.” 이 호랑이를 어떻게 한국적으로 풀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벌거벗은 호랑이에 국적을 나타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의상이나 소도구를 대입하던 중 상모돌리기가 퍼뜩 생각났죠. 우리 고유의 상모돌리기를 적용해보면 어떨까 했어요.” 수없이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감 날 제출하고 나오는데 하늘이 노래지더라고요. 쓰러졌어요. 병원에서 탈진이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을 입원해 있었다. 그만큼 쏟아부었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호돌이가 말해준다. 14명의 심사위원 중 12명의 표를 받아 선정된 김현의 호돌이는 1984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10점 만점에 8.7점을 기록하며 88올림픽 개최 전부터 사랑스러운 마스코트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김현이, 김현이란 이름을 온전히 드러낸 디자인은 호돌이가 최후다. 호돌이 당선 이듬해 디자인파크를 창립하며 본격적으로 국내 CI업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CI에는 디자이너의 개성이 아니라 기업과 브랜드의 성격이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수많은 심벌, 로고, 마크와 마주해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모르는 이유다. “그런 게 아쉬우면 디자인하지 말고 순수 회화 해야죠. 자기만의 세계를 하려면 붓으로 내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그리면 돼요. 그런데 브랜드 디자인은, 물론 나도 좋아해야겠지만 클라이언트가 좋아하는 게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자인 국민이 좋아해줘야 해요. 글로벌 브랜드는 전 세계인이 좋아해야 하고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죠. 한 사람 마음 얻는 것도 힘든데.”

김현은 그 길을 걸어왔다. 디자인파크를 처음 연 1984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지금까지 김현은 쉼 없이 누군가의 얼굴을, 이름을, 성격을 알려왔다. 다만 디자인파크 창립 이후의 작업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개인의 결과물이라 이른 적 없다. “내가 아니라 팀이 한 거죠. 심벌 단 하나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아요. 클라이언트와 소비자 의견은 물론, 법적 문제는 없는지 여러 조사를 해야 하고, 그 과정을 거쳐 결정이 되어도 명함부터 시작해 봉투, 유니폼류, 간판류 등을 작업하다 보면 수백 개예요. 그러니까 나 혼자 한 작업이 아니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팀 모두와 함께 한 일이죠.” 그 팀이 디자인파크를 새로이 잇는다. 디파크브랜딩이라 이름을 바꾼 새 디자인파크의 대표는 채영, 디자인실장은 안윤정, 기획실장은 신지선이다. 채영은 25년, 안윤정과 신지선은 19년을 김현과 일했다. 모든 디자인 회사에 이렇게 장기 근속자가 많은 것은 아니다.

“교수 중심 체제를 전문 회사 체제로 바꾼 것이 김현 선생님의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전문 칼럼니스트 김신은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김현 선생님은 1.5세대 디자이너예요. 1세대는 서울대 조영제 교수, 홍익대 권명광 교수, 숙명여대 안정언 교수 등이죠.” 1970년대에 교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특정 정보와 지식을 갖춘, 신비롭게 인식되는 존재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 교수 중심으로 많은 일이 이루어졌죠.” 그런 와중에 디자인파크가 문을 열었다. 교수 중심이 아닌 전문 회사 체제의 선두 주자였다. “1980년대에 디자인파크가 생기면서 전문 회사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에는 중심이 완전히 전문 회사 체제로 이동됐고요. 더 나은 발전상이죠. 특정 교수에게만 몰리는 것보다 다양해졌으니까요.”

활발해진 디자인업계와 기업들의 인식이 맞물려 CI는 상승세를 이어갔다. 김신은 명료히 말했다. “디자인파크의 디자인 실적은 곧 한국 산업의 발전 모습이에요.” 과대평가가 아니다. 실제로 디자인파크가 1987년에 작업한 대형 슈퍼마켓 체인 한양스토어 CI 작업은 1980년대에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거주 공간이 되면서 슈퍼마켓이 주요 유통망으로 성장한 변화를 의미하고, 서울대공원(1983), 자연농원(1991), 강원랜드(2000) 등의 CI 작업은 레저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1990년대 한국을 보여준다.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화(금호그룹 1987, LG그룹 1995, GS그룹 2005), 프로스포츠의 등장과 진화(빙그레이글스 1985, LG트윈스 1990, 한화이글스 1993, 삼성라이온즈 1996), 친환경 강조 식품 브랜드들의 변신(청정원 BI 1995, 빙그레 CI 1995, 샘표 CI 2004), 아파트의 브랜드화(LG 자이 2002, 삼성 래미안 2002, 금호 어울림 2003), 민주화와 지방자치 시대의 개막(서울시 CI 1996, 제주도 CI 2000, 양주군 CI 2000, 군포시디자인파크는 한국 산업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 김현의 디자인 역사를 한국 디자인 산업의 역사라고 말하는 거죠.”

“이제는 IT 기반으로 많이 바뀌었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차재국이 2018년 현재 CI업계에 대해 짚었다. 차재국은 현대카드, JTBC 등의 CI를 작업했다. “디지털 시대의 키워드인 UX(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 BX(brand experience, 브랜드 경험)가 섞여 있어요. BX, UX 회사가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하기도 하고 역으로 우리가 BX, UX를 디자인하기도 하죠.” 차재국은 ‘아무래도 BX, UX 분야는 환경에 민감한 만큼 기존의 브랜딩(아이덴티티 작업)을 하는 이들보다 젊은 사람이 많은 편’이라고도 했다. 1세대 디자이너들이 다져온 아이덴티티 시장은 더 넓어지고 젊어졌다. 차재국은 덧붙였다. “하지만 그 환경이 마냥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어요.” 디자인 전문 칼럼니스트 김신 역시 언급했던 부분이다. “산업의 지형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영역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어요. 지금은 디지털 회사도 CI를 한다고 해요. 경계가 없어진 거죠. 경계가 없어졌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에요. 하지만 전문성을 들여다봐야 해요. 예전 CI 환경이 얼마나 황무지 같았는지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오히려 지금은 그 개념이 너무나 확실해져서 디자이너가 대접을 못 받아요. 이제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산업이 변했다. CI 환경도 변했다. 김현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모두 디지털을 논하는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의 디자이너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아직 아날로그적인 면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너무 즉흥적으로 쉽게 디자인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스케치하라. 스스로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라.” 2000년 3월호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다. 18년 전이다. 스스로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의 디자이너일지도 모른다고 자조했던 김현, 그가 이끈 디자인파크는 이 인터뷰 이후에도 한국은행, 대한민국 정부 상징 체계 등 굵직한 CI 작업을 이뤄왔다.

산업은 변한다.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하니까. 변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아이덴티티 그 자체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알고 확인하고 앞으로 더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죠. 기업, 브랜드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기업으로 바꾸면 됩니다. 우리 기업은 어떤 기업인가.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쟁자는 누구이며,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우리 기업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1969년, 김현의 디자인 시대가 열린 그때와 다르지 않다. “사실 나도 아직 100% 몰라요. 아마 죽을 때나 되어야 다 알겠죠.” 답을 내려야만 답인 것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어 행복하겠다고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퇴사’하게 되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지 물었다. 김현은 미소 지었다. “여행이죠. 이미 작년부터 시작했어요. 11월에 아내랑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로 트레킹을 다녀왔어요. 올가을에는 남미에 갈 거고 내년에는 아프리카에 갈 거예요. 여행지에도 순서가 있어요. 왜냐면 여행은 가장 멀고 힘든 데부터 하래요. 시간이 지나면, 힘들어지면 못 하니까. 그래서 첫 번째로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7박 9일로 4000m까지 올라갔다 왔죠. 고생은 했지만 경치가 너무 멋있고 아주 통쾌했어요. 굉장히 힘들었지만 아무튼 제일 어려운 숙제를 하나 해냈죠.” 어쩌면 히말라야는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여행지인지도 모른다. 김현의 어렵고 힘든 여행기의 한 챕터가 끝나고 새로운 여행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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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어시스턴트이 정훈
사진 김 상곤
출처
3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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