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대신 수프 혹은 스튜

수프와 스튜는 어쩌면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온도를 가진 국물 요리일지도 모른다.

뭉근하게 끓인 수프, 자박자박한 국물에 큼지막한 건더기가 담긴 스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훈기가 번진다. 특히 매서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한겨울이면 우리 마음속에 더 깊이 파고든다. 수프와 스튜는 스테이크, 파스타, 샐러드, 샌드위치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양 요리다. 그중에서도 탕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서양 요리 중 드물게 국물이 있는 이 두 요리는 사랑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퍽퍽한 샌드위치보다 더 인기가 없다.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2000년대, 아침밥 시장이 블루오션으로 부상하며 수프 전문점이 띄엄띄엄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스튜 전문점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2006년 국내에 발간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가 국민 수필처럼 읽히며 사랑받았건만, 수프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지는 못했다.

국내 요식업계가 수프에 처음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일본의 유명 수프 브랜드 ‘수프 스톡 도쿄’가 사업을 크게 확장하면서부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국내에도 ‘수프 스토리’라는 최초의 수프 전문점이 생겼다. 또 2007년에는 서울랜드가 외식 사업 분야에 진출하며 첫 아이템으로 수프 전문점 ‘크루통’을 자신 있게 선보였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수프는 경양식집에서 내는 수준의 음식으로 인식됐다.

경양식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수프라는 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분이 인스턴트 가루를 물에 개어 내는 수준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같은 가루만 있으면 집에서도 똑같은 맛을 재현할 수 있으니 수프의 위상이 높을 수 없었다. 인스턴트 수프가 일본에서 넘어온 만큼 일본도 사정은 비슷했던 듯싶다.

수프 스톡 도쿄는 화학 첨가물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지금은 사라진 수프 스토리나 크루통도 마찬가지였다. ‘무첨가 수프 전문점’이라는 사실을 부단히 주창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이 변하는 속도가 일본에 미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수프 스톡 도쿄를 거의 모방하다시피 한 가게들은 필연적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오히려 ‘오봉팽’, ‘리나스’처럼 해외에서 들어온 베이커리 카페 혹은 샌드위치 전문점이 선전했다. 빵, 샌드위치, 샐러드와 함께 수프를 주력으로 판매한 이 가게들은 해외에서 거주했거나 장기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미국과 유럽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수프 전문점이 많이 들어서 있다. 꼭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수프만 먹고 나올 수 있는 가게가 부지기수다. 

해외에서 겨울을 난 사람들은 추위를 피할 길 없을 때 수프 가게에 들어가 따끈한 수프 국물에 언 몸을 녹인 기억이 있을 터. 물론 우리나라처럼 국밥집이 있었다면 국밥을 먹었겠지만. 또 술 마신 다음 날 수프를 훌훌 들이켜며 숙취를 해소한 경험도 분명 있을 테다. 물론 무더운 여름날 살얼음 동동 뜬 냉면 대신 콜드 수프로 더위를 식혔을 것이고. 가격도 착한 수프가 베푼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수프에 빵을 곁들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오봉팽과 리나스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수요가 미미한 탓에 오봉팽은 국내에서 철수했으며, 한 끼 식사로 수프를 사 먹는 일은 여전히 식문화로 확산되지 못했다.

서양 음식인 수프와 스튜가 국내에 정착하지 못한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을 수 있다. 궁중 음식을 대표하는 신선로도 대중화에 실패했고, 비비추국, 어글탕 등 여러 전통 음식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한 판국에 말이다. 다만 서양 요리 중 드물게 국물이 있는 이런 음식이 외면받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여 오히려 그 원인을 밝히고 싶게 만든다.

아침밥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기업들이 프랜차이즈 사업 아이템으로 접근했던 게 실패한 후 한동안 잠잠했던 이 시장에 최근 개인 사업자들이 겁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중 조용한 강자로 거듭난 곳이 2012년 경기도 고양시에 문을 연 ‘수피’와 2017년 10월 마포구 인근에 연 ‘수퍼’다. 이들을 조용한 강자로 칭송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여전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퍼는 인근 직장인과 주민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오고 SNS에 빈번히 오르내리는 등 반응이 심상치 않다.

수퍼를 이끄는 권소희 대표는 하루아침에 매장을 낸 게 아니다. 푸드 트럭으로 수프 장사를 반년 가까이 한 후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직장 다닐 무렵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어요. 개인적으로 수프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푸드 트럭 가득 수프를 싣고 바쁜 직장인이 많은 여의도로 나갔어요. 당연히 ‘수프만 팔아서 되겠느냐’는 우려 섞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죠. 그런데 막상 오픈하니 사람들 반응이 괜찮았어요. 단골이 생겨났고, 그중에는 일주일에 사나흘씩 찾아오는 손님도 꽤 많았어요. 출퇴근길이나 외근길에 들고 다니며 마실 수 있도록 일부러 수프를 묽게 만들었는데, 특별히 의도를 설명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스푼이나 뚜껑은 됐다며, 커피 마시듯 수프를 마시며 홀연히 가더라고요. 푸드 트럭을 운영하며 수프 전문점의 가능성이 보여 매장까지 내게 됐어요.”

푸드 트럭이 성공했을지언정 매장을 내는 일은 더 위험 요소가 컸기에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권 대표도 결과를 마냥 낙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매장을 여니 또 놀랄 일이 생겼다. 맛있는 수프 한 그릇이 그리웠다며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오가다 맛있게 먹은 손님들이 재방문할 거라고는 기대했어도 수프를 좋아해서 멀리서 찾아오는 진성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수프를 좋아하는데 국내에서 잘하는 곳을 찾지 못해 아쉬워하던 차에 찾아왔다는 그분들 대부분이 단골손님이 됐습니다.”

라사냐 전문점 ‘카밀로 라자네리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김낙영 셰프는 지난 11월 스튜 전문점 ‘첸토페르첸토’를 오픈했다. 스튜는 수프보다 더 경험치나 인지도가 떨어지는 음식인 만큼 스튜 전문점을 차린 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을 테다. “라사냐나 스튜나 입지가 비슷했어요. 제가 일했던 레스토랑에서 판매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죠. 판매 수익이 전체 매출의 5%에도 미치지 못했어요. 이 두 메뉴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워하던 중 불현듯 반대로 생각하면 5%의 사람들은 이 두 메뉴를 찾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 확신은 라사냐 전문점 카밀로가 성공하며 더 견고해졌고, 결국 그는 고집대로 스튜 전문점을 열기에 이르렀다.

김 셰프의 말처럼 수프나 스튜를 공들여 끓여봤자 잘 나가지 않으니까 레스토랑들은 이런 걸 메뉴에서 은근슬쩍 빼거나 편법을 써서 조리한다. 간혹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수프나 스튜에서 기성 제품 맛이 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수프가 국내에서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수프를 식사에 딸려 나오는 부수적 존재이며 화학 첨가물 덩어리라고 여기는 소비자의 인식도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지만, 수프나 스튜를 조리하는 데 시간과 공력,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것이 근본적 원인이다.

“손이 정말 많이 갑니다. 보통 당일 식재료가 들어오면 손질을 거쳐 그날 팔지만, 스튜는 당일에 제조해서 당일에 판매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조리 시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식재료를 받자마자 손질하여 준비해도 다음 날에나 쓸 수 있습니다. 또 소스와 재료를 분리할 수 있으면 소스만 따로 작은 통에 담아 보관할 수도 있겠으나, 스튜는 그렇지 못합니다. 큰 냄비와 보관 용기를 써야 하며, 덩달아 냉장 시설도 커야 합니다. 조리 과정과 시간, 보관 문제만큼 부피가 주는 부담감도 큽니다. 규모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라사냐나 스튜를 잘 다루지 않는 이유도 이런 걸 대량으로 준비할 경우 손이 워낙 많이 가고 큰 부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낙영 셰프의 설명이다.

“육수 끓이는 데만 8~12시간이 걸립니다. 아침에 불에 안치면 마감할 때쯤 육수가 겨우 완성됩니다. 육수가 완성되면 그때부터 수프를 만드는데, 재료 다져서 끓인 후 육수 붓고 다시 끓이는 데 또 4시간여가 걸립니다.” 수퍼의 권 대표도 비슷한 실정이다. 권 대표는 이렇게 밑 작업한 수프를 퓌레 형태로 만든 후 3리터씩 풀어 워머에 보관했다가 판매한다. “손님들이 보는 건 워머에 든 수프를 떠서 내는 게 전부이다 보니 수프 만드는 일을 단순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맛보면 그러한 편견이 깨질 거라고 믿습니다. 수프는 만드는 이의 정성을 담고 이를 먹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하여 작은 위로를 안겨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탕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수프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원인을 온도에서 찾기도 한다. 같은 탕 문화로 보기에 온도 차이가 크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팔팔 끓는 뚝배기째 내는 탕을 먹는다. 아예 테이블에 버너를 올려놓고 끓이면서 먹기도 한다.

그런데 수프의 온도는 겨우 따뜻한 정도다. 실제로 수프가 가장 맛있는 온도는 65~70℃라고 한다. 부산에 ‘숩65℃’라는 수프 전문점이 있기도 하다. 100℃가 넘는 온도로 끓여낸 탕을 먹는 우리에게 65℃는 살짝 애매한 온도처럼 느껴질 수 있을 터. 권 대표는 수프 전문점을 운영하며 ‘더 뜨겁게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너무 뜨겁다’는 피드백은 받은 적이 없다고. 수프의 온도를 85℃로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이 이토록 수프가 뜨거워지길 바란다면 그냥 팔팔 끓여주면 되지 않을까.

“찌개나 국은 육수에 가깝습니다. 팔팔 끓여도 문제가 없죠. 그런데 재료가 갈려 농도가 높아진 수프는 팔팔 끓이면 금세 타버립니다. 저희 집에 있는 수프 중 가장 농도가 묽은 송이 수프 같은 경우에는 팔팔 끓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송이 수프가 가장 인기가 높긴 합니다.” 권 대표는 오픈 초반에 온도만큼 농도와 관련한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좀 더 진득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기존에 우리가 경양식집이나 집에서 끓여 먹던 제품에 밀가루를 버터와 함께 볶아서 만든 루(roux)가 들어가다 보니 수프는 으레 농도가 짙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루가 들어간 수프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저희 집만 보더라도 루가 들어간 수프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편 김낙영 셰프도 간혹 농도 때문에 부정적인 코멘트를 받는다고 한다. “가끔 실망스러워하는 분들이 계세요. 아마 경험치에서 오는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저희 집은 스튜를 묽게 끓이거든요. 국내에서 스튜는 대개 술안주로 여럿이서 나눠 먹는 메뉴로 인식돼왔어요. 그럴 경우에는 각자 떠서 먹을 수 있도록 녹진하게 끓이겠죠. 하지만 스튜 한 그릇을 한 끼 식사로 먹으려면 너무 진득하거나 녹진할 경우 끝까지 먹기 힘들어요. 일례로 갈비탕은 혼자 한 그릇을 뚝딱 비워도 갈비찜은 그러기 힘들잖아요.”

김 셰프가 갈비탕과 갈비찜을 예로 드니 그 차이가 쉽게 와닿는다. 김 셰프는 국과 수프, 스튜의 온도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긴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탕이나 국을 펄펄 끓는 상태에서 먹지 않았어요. 오히려 따끈한 상태에서 먹었죠.”

김 셰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만의 독특한 식문화인 토렴이 떠오른다. 찬밥을 담은 그릇에 펄펄 끓는 국물을 부었다가 따르기를 반복하여 딱 먹기 좋은 온도를 맞춘다. 토렴은 급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하는 노동자를 배려한 관례이지만, 국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기도 하다. 너무 뜨거우면 혀의 감각이 마비되어 오히려 맛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평민의 음식이라고 국밥을 멀리한 양반들도 국을 불 위에서 열을 있는 대로 받은 뚝배기째 먹지 않았다. 사기나 유기 그릇에 덜어 먹었으니 지금처럼 뜨겁지 않았을 노릇이다. 김 셰프는 따끈한 국물을 즐긴 식문화가 우리 민족의 DNA에 남아 있는 한 뭉근하게 끓인 수프와 스튜도 곧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글_이주연(미식 칼럼니스트)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이주연(미식 칼럼니스트)
일러스트최혜령
출처
42095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