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왜 낮은 곳으로 임했나

예향의 도시라 불리는 광주에 아시아 문화의 허브를 표방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문을 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높이 고개를 들기보다는 낮게 숙인 공간이다. 광주의 낮은 곳으로 임하며 5월의 광주를 드높이고 있다.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은 주말이었다. 덕분에 대체 휴일로 지정된 7일 월요일까지 3일간의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당일 광주행 KTX 호남선 승차권은 일찌감치 매진이었다. 한 주 내내 틈나는 대로 빈자리가 날까 KTX 예매가 가능한 스마트폰 앱을 들락날락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움닫기로 달 착륙을 시도하겠다는 마음처럼 허망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속버스를 선택했다. 보통 때는 3시간 30분 정도면 광주에 도착하니 아무리 막혀도 오후 4시 정도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산이었다. 버스가 광주고속터미널에 종착한 건 오후 2시에 시작된 야구 중계가 다 끝나고도 한 시간쯤 더 지난 6시 20분쯤이었다. 제대로 망한 기분을 느끼며 하차하려는데 앞서 내리던 승객 하나가 기사에게 말했다. “아따, 오살나게 걸려부렀네잉.” 그렇다. 어찌됐건 광주에 온 것이었다.

터미널 주변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죠?” 그러자 기사로부터 다른 물음이 돌아왔다. “아따, 알지라. 요새 아들이 거쩍을 허벌나게 가분당께. 근디 뭐 연구 쪼까 하러 오셨소?” 번거로운 대화가 이어질까 봐 그냥 여행차 왔다고 했지만 문득 궁금증이 도져 기사에게 다시 물음표를 던졌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그곳을 많이 찾나요?” “아, 그짝 주변에 아들 놀 거리가 많은가 겁나게 가더랑께. 우리 아도 오늘 아침에 가지 않았겄소. 거기 잔디밭에 애들이 떼거리로 앉아 있당께라. 그런 거 보면 그라도 나름 쓸 만헌 거 같어. 근디 보고 있으믄 너무 휑해부러. 아따, 고만치 큰 건물 하나 세웠으면 보기 좋지 않았겄소.”

5·18민주광장과 연결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입구 주변 풍경. 전남도청 별관 건물 일부를 철거한 뒤 철골 구조를 보강했다. 구 전남도청 별관에서는 도청의 완전한 복원을 요구하는 농성이 진행 중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다

2015년 11월 2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식이 열렸다. 2005년 12월 7일 착공식을 갖고 2006년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뒤 본격적인 사업이 추진된 이후로 10여 년 만에 실체가 드러난 것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구 전남도청 부지를 포함해 4만8000여 평 넓이로 조성했다. 서울의 용산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전당보다도 넓다. 명실공히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 기관이라 하니 국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막상 그 주변에 접근해도 좀처럼 그 위용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뭔가 대단한 것이 불쑥 솟아 있을 것 같지만 구 전남도청 건물을 활용한 민주평화교류원 이외에 별다른 건축적 구조물 자체가 눈에 걸리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내려다봐야 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2005년 5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 산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회는 국제건축가협회의 승인하에 국제 현상 설계를 개최했다. 총 34개국에서 124개의 응모작이 출품됐고, 7개월여간의 심사 끝에 같은 해 12월 우규승의 작품이 선정됐다. 우규승은 보스턴에서 활동하는 재미 건축가다.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와 캔자스 너만 현대미술관 등을 설계했고 2012년에는 보스턴의 저명한 건축상인 할레스톤 파커 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국내 건축물 중에서는 88서울올림픽선수촌 아파트와 환기미술관 등을 설계했다. 우규승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모에 제출한 설계 개념은 ‘빛의 숲(forest of light)’이었다. ‘빛고을’ 광주라는 지명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그리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름처럼 ‘빛’과 ‘숲’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시민들이 편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녹지 공간이면서도 어디에든 빛이 드는, 자연광이 통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지상이 아닌 지하로 내려 지었지만 지상과 분리된, 폐쇄적인 지하 공간이 아니다. 개방적인 성컨(sunken) 광장으로 설계했다. 가까운 예로 서울 삼성동의 코엑스몰 입구 연결로를, 멀게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성컨 광장은 높게 솟은 빌딩 아래 조성한 부속 공간도 아니고, 단순히 통로의 기능성만을 고려한 연결 공간으로 고안된 것도 아니다. 5·18민주광장을 지나 구 전남도청 본관과 별관 사이에 낸 전당 입구의 통행로를 따라 내려오면 너르게 펼쳐진 성컨 광장을 만날 수 있다. 아시아문화광장이라 부르는 이 공간은 1만9800㎡에 달하는 너른 광장이면서도 하늘을 향해 뻥 뚫려 있어서 딱히 지하로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만든다. 국립아시아문화광장의 마당처럼 자리하며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등의 모든 공간과 통한다. 동시에 국립아시아문화광장 내의 시설뿐만 아니라 인근의 지상과 또 다른 지하의 시설과 연결되는 인터체인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근의 지하상가와도, 지하철역과도 연계돼 있다. 광주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번화가 인근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충장로나 금남로를 비롯해 그 주변 어디로든 통하는, 어쩌면 그 일대의 마당 노릇도 하는 셈이다.

“구글 사진으로 광주를 처음 보고 느낀 건 거의 회색으로 채워진 도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녹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했죠.” 우규승 건축가의 말처럼 광주는 녹지 조성에 인색한 도시였다. 하지만 광주 시민이라면 이 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천혜의 자연경관을 품은 무등산국립공원이 늘 가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5년 환경부에서 조사한 전국 광역시 녹지 비율 발표에 따르면 광주는 전국 7개 광역시 가운데 5위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녹지 보전 문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주요 건물들을 지하로 내려 지은 덕분에 지상을 평지로 확보할 수 있었고 이곳에 다양한 식물과 나무를 심어 시민들을 위한 산책로를 조성했다. 게다가 문화전당을 조성하며 시야를 가리던 인근의 건물들이 사라진 덕분에 무등산까지 시야가 확보됐다. 마치 5·18민주광장을 비롯한 문화전당 일대가 푸른 병풍을 두른 광주의 중정 같다. 도시의 색도, 풍경도 달라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지하에 건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광주의 역사가 깃든 구 전남도청 부지였기 때문이다. “기억에 대한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인 만큼 그런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죠. 전남도청 건물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이를 압도하는 큰 건물을 올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건 문화 산업 시설이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곤란했어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미래로 연결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건축가 우규승의 깊은 고민은 결국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구조적 깊이로 반영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상에서 바라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구 전남도청 건물을 제외하면 그저 너르게 조성된 평탄한 공원처럼 보인다. 덕분에 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 동시에 숭고하게 기억돼야 할 역사적 유물을 미래지향적인 문화 시설로 떠받든다는 의미가 읽히는 공간이라는 점만으로도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인상이다.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구 전남도청 건물을 활용한민주평화교류원과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그리고 어린이문화원까지 총 다섯 공간으로 구별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그 이름처럼 아시아 문화를 위한 전당이다. 하지만 단순히 아시아 문화를 관람하는 전시장이나 공연장의 기능만을 염두에 둔 공간은 아니다. “아시아 각지에서 수급한 자료를 토대로 아시아 문화를 연구하고 이런 연구 자료를 보관하고 공유함으로써 실질적인 문화 창작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완성된 예술적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갖춤과 동시에 이를 보다 넓은 세계로 유통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려는 것이죠.” 문화창조과 박종달 과장의 설명처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수집하고 연구, 보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이를 씨앗 삼아 새로운 문화의 창작이나 융합의 싹을 틔우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범아시아적 창작 토양을 마련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문화정보원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두뇌나 다름없는 기능을 하는 곳이다. 아시아 문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지식을 보관하고 널리 공유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적인 실물 자원과 다양한 기록물 그리고 영상 자료로 채워진 문화정보원의 라이브러리파크는 그야말로 아시아 문화 정보의 보고와 같다. ‘아시아의 근현대건축’ 섹션에서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특정한 주거 환경의 변화를 소개하는데, 이는 단순히 주거 형태를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주거 환경을 결정짓는 사회적 분위기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서구의 제국주의에 의해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지배에 시달린 것이 주거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아시아 각국의 현지에서 녹음된 소리를 수집해 들려주는 ‘아시아의 소리와 음악’ 섹션은 아시아 각국에서 일상적인 소리를 수집해 들려줌으로써 아시아 국가들의 환경을 청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밖에도 아시아의 공연 예술과 전시 문화, 실험 영화, 비디오 아트 등 지금까지 접하기 어려웠던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학습하고 체험할 수 있다. 단순히 총합적인 자료를 보관하고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아시아라는 거시적인 영토의 곳곳에 자리한 미시적인 삶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특별한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기획관에서는 현재 개관 2주년 기념 기획전으로 마련한 <아시아의 타투>전을 볼 수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문신의 기원과 의미를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연구원들이 직접 태국, 필리핀, 일본 등지를 찾아다니며 수집한 사례와 자료를 모아 마련한 기획이다. 아시아 국가마다 문신을 하는 이유가 다 다르고, 국가와 민족별로 문신을 대하는 관념과 태도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반도 지역의 문신 역사가 호기심을 당긴다. 내용인즉슨 조선 시대 일반 민중 사이에서 사랑이나 우정의 증표로 몸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가 있었고,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먹실과 바늘로 팔뚝에 점상 문신을 새기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주목한다는 건 결국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되짚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속한 아시아를, 그 어느 나라보다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서양에 비해 동양의 문화예술을 등한시해온 경향이 있잖아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예술적 가치를 일으켜보자는 취지가 담긴 공간이에요.” 박종달 과장의 말처럼 우리가 잘 몰랐던, 어쩌면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아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비로소 아시아의 공연 예술과 퍼포먼스 아트, 크리에이터, 실험 영화 등 다채로운 예술적 기록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비단 지식 전달의 목적에만 충실한 공간이 아니다. 벽을 따라 일렬로 이어지는 대나무 위로 은은한 자연광이 떨어지는 테라스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벤치를 마련했다. 테라스 공간과 인접한 실내 창가에는 다양한 문화적 지식을 향유할 수 있는 도서와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있다. 괜히 라이브러리파크라 명명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도서관과 공원의 융복합적 공간인 것이다.

라이브러리파크의 모든 공간에서는 편하게 머무르며 직접 보고 듣고 읽을 수 있도록 곳곳에 앉을 곳이 마련돼 있다. 개관 2주년 기념 기획전 <아시아의 타투>가 전시 중이다.

문화창조원과 예술극장은 현재진행형의 아시아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대면하게 되는 공간이다. 문화창조원에서는 특별한 전시 두 개가 열리고 있었는데 박찬욱 감독과 박찬경 작가 형제의 사진 작업과 미디어 아트 그리고 영화를 함께 전시하는 <파킹찬스>전,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국제전 양상으로 확대된 1960년대 초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0년대 말 사이에 제작한 회화들을 소개하는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였다. 흥미로운 건 <파킹찬스> 전시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화 <격세지감>과 <반신반의> 그리고 박찬경 작가의 사진 작업 ‘세 개의 묘지’와 미디어 아트 ‘소년병’ 같은 작품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환기시키고,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 전시에 소개된 170여 점의 회화는 전 세계 각국의 인권 투쟁과 각국의 위정자와 독재자를 향한 비판,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고발과 사유 등 폭력적인 체제를 향한 저항적 메시지를 거듭 목격하게 만든다. 문득 국내의 국립 문화예술 기관에서 이렇게 국가 체제나 정치적 상황에 의문을 던지고 사유하도록 이끈 사례가 또 있었는지, 혹은 존재할 수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문화창조원 복합5관에서 열린 <파킹찬스> 전시장. 박찬욱 감독의 단편영화 <반신반의>가 최초로 공개됐다.

율리우스 포프의 설치미술이 있는 라이브러리파크의 북라운지.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에 전시된 작품 중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홍성담 작가의 연작 판화 ‘오월’도 포함돼 있다. 어쩌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필연적으로 5월의 광주를 공간의 정신으로 계승하고 전승해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기획하고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은 오랜 식민지 역사를 지나온 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부조리한 정치적 체제를 경험하고 이에 항쟁하는 역사를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러한 역사들을 서로 이어 한데 묶어낼 수 있는 정신적 가치로써 유효한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서 거듭난다는 건 결국 그러한 역사적 가치를 함께 공유함으로써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정신적 메카로 진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무현에서 문재인까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최대 규모로 꼽히는 문화 시설이다. 이렇게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광주에 자리할 수 있었던 계기를 살펴보자면 시계를 2002년으로 돌려야 한다. 2002년 12월, 새천년민주당의 16대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문화수도 육성’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2003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 지역 언론사가 자리한 간담회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호남에 대해 반드시 의리를 지키겠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키고자 했던 첫 번째 의리였다. 2005년 12월 7일에 열린 착공식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문화전당이 광주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중심 문화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축사를 남겼다. 그리고 “문화전당의 활성화는 지역 주민들에게 달렸으니 광주가 문화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

2005년 착공 당시만 해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완공 예정 연도는 2010년이었다. 무려 5년이 늦어진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이 확정된 이후 2008년 착공식이 거행됐다. 예정대로라면 2010년에 완공돼야 했지만 당시단체에서 도청 별관을 철거하는 문제를 두고 반발하며 공사에 차질이 생겼다. 역설적이지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구 전남도청 부지에 건설된 건 그곳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품은 장소였기 때문이었지만 정작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혐의를 받는 공간이 된 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지하로 내려 지었지만 어디서든 하늘로 탁 트인 개방감을 느낄 수 있는 성컨 광장 구조로 설계했다. 1층과 지하 어디에서든 나무와 식물이 눈에 띈다. 지상의 다리는 본래 사람이 통행하던 길의 구조를 살린 것으로 거리의 역사를 섬세하게 배려했다.

2008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구 전남도청 별관 추진경과 자료집’에서 전남도청 별관 철거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해왔고 애초에 전남도청 별관은 보존 대상에 포함된 건물이 아니었음을 시사했다. 일찍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정권 시절에 기획했던 ‘기념사업’에 대한 논의를 하던 중 일찌감치 철거를 결정한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7년에도 ‘기념사업종합계획의 일환으로 의뢰한관련 사적지 조사 및 보존에 관한 조사, 설계’ 연구 용역에서도 도청 본관과 민원실을 제외한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결국 이러한 기준에 따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설계 지침에서도 자연스럽게 전남도청 별관은 보존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그 과정에서 5·18 단체는 거세게 반발했고 공사 재개도 미뤄졌다. 결국 완전 철거 방침을 접은 문화체육관광부는 별관의 24m를 철거하고 30m를 보존하는 부분 보존을 결정했고, 별관 보존 방안을 최종 확정한 2010년이 돼서야 공사가 재개됐다. 당초 2012년으로 예정했던 완공 시점도 2년 더 늦춰진 2014년으로 수정됐다.

구 전남도청 별관에서는 전남도청의 완전 복원을 요구하는 5·18 단체의 농성 시위가 한창이다. 동시에 건물 내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2008년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은 광주에서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추진하며 사업 계획과 예산을 축소시켜나갔다. 2011년 당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 단장을 맡았던 이병훈은 이명박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 규모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해왔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출범 직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법인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광주 시민 사회 단체들의 반발이 거셌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원을 줄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부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운영주체를 준정부 기관이나 특수 법인에 위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운영과 사업을 아시아문화원이나 법인에 위탁할 수 있는 규정을 신설하기도 했다.

2015년 11월 25일에 열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식에 참석한 황교안 국무총리는 “광주가 아시아의 문화 중심 도시로 뻗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은 건설 비용만 무려 7000억원 이상이 투입된, 단군 이래 최대의 국가적 문화 프로젝트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만한 규모의 국립 기관 개관식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참석하지 않았다. 예견된 결과였다. 2015년 3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2023년까지 국립 기관으로 한시적인 운영을 하고 연 800억원의 운영비를 지원받는다는 내용이었다. 2015년 6월 25일 국무회의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매년 800억 이상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같이 자신들이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빅딜해서 통과시키면서 민생과 일자리 창출 법안은 몇 회기에 걸쳐서도 통과시키지 않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역행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3개월 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2016년 11월에는 최순실 측근이었던 차은택이 추진하던 문화창조융합센터 사업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 콘텐츠를 표절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융복합 사업 콘텐츠 구축을 위해 아시아문화개발원에서 작성한 사업 보고서 내용이 문화창조융합벨트의 계획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것이다. 2016년 당시 문화창조융합벨트는 지난해보다 예산이 40%나 증가한 1278억원이 책정됐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예산은 오히려 20% 삭감된 567억원으로 책정됐다. 문화창조융합벨트가 2019년까지 확보한 예산은 무려 7000억원에 달했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비롯해 아시아중심도시 사업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축소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을 정상화하겠다”고 밝히며 ‘아시아문화중심도시 2.0’ 시대를 선언했다. 지난 정권에서 축소한 사업을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본래 노무현 대통령 정권에서 조성하려 했던, 광주의 7대 문화권역을 육성시켜서 광주를 문화수도로 만들겠다는 정책 계획이었다. 문제는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기관의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노무현의 정책이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국립 기관의 사업 방향이 온전히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건 앞으로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짊어져야 할 주홍글씨일지도 모른다.

5·18민주평화기념관에 설치한 5·18 민주화운동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설치미술. 5월 16일부터 26일까지 1980년 5월의 광주를 서사순으로 느끼고 학습할 수 있도록 마련한 체험의 장이다.6월 17일까지 임시 개방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지난 5월 15일부터 6월 17일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이해 구 전남도청 본관과 도청 회의실, 경찰청 민원실, 전남지방경찰청으로 구성된민주평화기념관이 임시 개방됐다. 민주평화기념관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이후로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유는 5·18 단체들이 구 전남도청의 완전한 복원을 주장하며 해당 공간의 사용을 막고 있는 것. 본래 민주평화교류원이라 명명한 이 공간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문화적 교류와 협력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기획한 공간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전남도청 건물의 상징성을 통해 범아시아적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전파하고 교류하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지금 해당 현장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설치 예술과 미디어 아트가 전시돼 있다. <5월의 나비떼들>이라는 제목으로 기획한 전시는 2016년에 이미 설치가 완료됐고 상시 개방할 예정이었으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에도 5월 18일 무렵에 한 달여간 시민들에게 임시 개방을 한 바 있다. 전시 내용은 이렇다. 동학농민운동과 광주항일학생운동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기 전까지 광주의 항쟁 역사를 살피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1979년과 1980년대의 세계사를 관통한 뒤 1980년 5월 16일 분수대 주변에서 횃불을 들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의 모습을 분수대 시점에서 360도로 둘러보듯 체험하고 5월 18일 이후 금남로 차량 시위를 헤드라이트 불빛과 경적 소리로 재구성하는 등, 5월 16일부터 26일까지의 서사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문제는 도청을 완전히 복원하길 요구하는 5·18 단체들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면 이런 전시마저 철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5·18 단체가 원하는 전남도청의 완전한 복원이란 결국 1980년 5월에 목격한 전남도청의 모습을 온전히 재현한다는 것인데 결국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전파하기 위해 마련한 예술적 시도를 철거하는 것이 5·18 정신을 계승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인지는 고민이 필요한 사안처럼 보인다. 동시에 이 모든 일 역시 예산과 시간이 소요된 일이고, 소요될 일이란 점 역시 간과해선 안 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물이라면 비판받아 마땅하겠지만 그 가치를 보다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콘텐츠라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오히려 구 전남도청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더욱 큰 역사적 의미를 더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예술극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가변형 극장이다.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다. 방문 당일 저녁, 예술극장에서는 영화 상영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야외의 계단형 벤치에 설치된 캠핑용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1930년대 독일 나치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서 스윙 댄스를 즐기던 청년들에 관한 영화 <스윙키즈>가 그날의 영화라 했다. 영화를 상영하기 전 커다란 무대 앞에서 잠시 스윙 댄스를 배우는 레크리에이션이 열렸다. 생각보다 제법 많은 사람이 참여해 열심히 스텝을 밟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건 공간 자체의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그 공간을 쓰는 사람들이 이루는 풍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가변형 극장이라는 예술극장. 실내 극장으로도 실외 극장으로도 변신이 가능하며 무대 공연도 가능하다. 객석은 실내와 야외 양방향 중계도 가능하다. 종종 심야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날은 <스윙키즈>를 상영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처음 찾았던건 2016년 5월이었다. 개관한 지 6개월이 조금 넘었을 그 무렵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광장으로서도 공원으로서도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찾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하늘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 잡거나 공원 곳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연인과 가족이 상당히 많았다. 아시아문화광장에서는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나무로 만든 구조물을 오르내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5·18 민주광장 한편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들이 반복해서 점프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곳은 본래 광장도 공원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다. 광장이 생기고 공원이 생기니 결국 사람이 모인다. 어쩌면 여기에 사람이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5월의 광주는 이미 기억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찾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길게 늘어선 줄이었다. 도서관과 어린이 체험 공간, 독립 영화 상영관에 입장하기 위해 퐁피두 센터를 찾은 현지인들의 줄이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는 줄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그 형태가 다를지언정 여러모로 퐁피두 센터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는 퐁피두 센터보다도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공간이다. 사실 퐁피두 센터도 처음에는 파리에서 흉물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관 중 하나가 됐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처음부터 환영받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훌륭한 공간이 서울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했다. 동의하지만 동의해선 안 될 것 같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문화의 스펙트럼을 전하는 프리즘이 되길 꿈꾼다.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아시아를 보고 느끼며 공감할 수 있길 바란다. 자유의 광장이자 평화의 공원이 되길 원한다. 그럼으로써 5월의 광주를 드높이는 반석이 되길 희망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광주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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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박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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