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그루밍 연구회

남자 한 사람이 네일 케어쯤 한다고 지구가 두 쪽 나지 않는다. 자신의 그루밍 취향에 관해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네일 케어를 받았다. 난생처음이었다. 네일 케어 숍의 관리사한테 양손을 곱게 내맡겼다. 여자분한테 이렇게 무방비로 손을 잡혀보긴 처음이었다. 수줍게 말했다. “저 처음이에요.” 관리사는 빙그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 네일 케어 숍에는 남자 단골손님도 꽤 있는데….” 남자가 네일 케어 숍에서 네일 케어를 받는 게 요즘은 새삼스러울 것도, 남사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혼자만 부끄럼을 타느냐는 얘기였다. 관리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톱의 큐티클을 툭툭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손이 잡혀 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만 입을 놀리게 됐다. “오늘은 손님이 하나도 없네요. 전 좋네요.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고. 허허허허.” 옆자리에서 정말 놀고먹고 있던 다른 관리사가 슬쩍 째려보는 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누군가 갑자기 들어올까 봐 조바심이 났다. 못 참고 물었다. “오래 걸리나요?” 관리사가 말했다. “다 끝났는데요?” 허무할 정도로 이렇게 금방 끝나는 일이었다. 네일 케어 숍 앞에서 주뼛주뼛 서성인 시간이 더 길었다.

바야흐로 마지막 단계였다. “마무리로 네일 영양제를 발라드릴까요?” 영양제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영양제에는 미혹되는 나이라서 불혹인가. 관리사는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당부의 말씀을 덧붙였다. “영양제가 코팅제 역할을 하니까 손톱이 반짝거릴 수 있어요. 그게 불편하시면 집에서 리무버로 지워내시면 돼요.” 그렇게 이번 생애 최초의 네일 케어가 끝났다. 계산을 마치고 빠져나올 때까지도 가게는 계속 텅 비어 있었다. 목격자는 없었다. 어제 집에선 네일 케어를 받고 만족스러웠지만 내일 회사에선 네일 케어를 받지 않은 척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네일 케어만큼이나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선배, 네일 케어 받았네요?” 회사에서 마주치는 여성 동료들마다 이토록 빠짐없이 손가락 지적질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다들 손톱만 슬쩍 봐도 네일 케어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당연히 알죠. 손톱이 깔끔하고 반짝거리잖아요.” 급한 대로 팔짱을 껴 양손을 숨기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말이야, 시장조사 차원에서 꼭 해야 하니까 한 거거든. 내가 편집장으로서 <에스콰이어>를 위해서 남성 그루밍 시장에 관해 깊이 연구하고 있어요. 허허허허. 원래 이런 거 안 하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거야.” 정작 여성 동료들은 또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알고 보니 “네일 케어 받았네”라는 건 남자가 네일 케어를 받았다고 놀리려는 의미라기보다는 “굿모닝” 같은 안부 인사의 일종이었다. 앞으로 네일 케어를 하고 나타나도 누가 또 “네일 케어했네?”라고 묻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았다. 남자 한 사람이 네일 케어쯤 한다고 지구가 두 쪽 나거나 해가 서쪽에서 뜨지는 않는다.

남성 그루밍 시장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남성 그루밍 소비자는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요즘 남성 그루밍 시장에 관해 연구하고 체험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에스콰이어> 편집장으로서 남성 그루밍 시장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성 뷰티 시장이 K뷰티라는 이름으로 글로벌하게 성장하는 걸 지켜보면서 남성 그루밍 시장에는 왜 그런 잠재력이 없을까 궁금했다.

궁금해하지만 말고 발로 뛰어서 취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클럽 에스콰이어’ 모임 때문이었다. 여성 뷰티 브랜드 출신의 사업가 한 분이 ‘클럽 에스콰이어’에 참여했다. 남성 화장품을 만들고 있는데 도무지 남성 소비자들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클럽 에스콰이어’에서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클럽 에스콰이어’의 남성 멤버들이 자발적으로 각자의 그루밍 취향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한 여의도 금융계 종사자는 말했다. “요즘 직장 동료들끼리 만나면 화장품 관련 정보를 많이 교환해요. 특정 제품은 알코올 냄새가 나서 별로라거나. 대부분 올인원 제품보다는 기능성 화장품을 단계별로 쓰고 있고. 솔직히 남성용 제품보다 여성용 제품이 향도 좋고 순하다는 얘기가 가장 많이 나와요.” 그러자 다른 스타트업 창업자 한 분이 말했다. “솔직히 저는 여성 제품을 써요. 밖에서 말은 잘 안 하는데.” 그 자리에 함께했던 여성 멤버들도 남자들의 그루밍 커밍아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다른 대기업 직장인이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여성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말은 절대 안 하죠.” 남성 그루밍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남자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솔직히’였다. 그만큼 남자들은 그루밍과 화장품에 관해서는 솔직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때 확신했다. 남성 그루밍 시장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도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다만 보이지 않으며 잡히지도 않는다. 자신의 그루밍 취향에 관해 공개적으로는 솔직하지 못한 샤이 그루밍족이 많기 때문이다.

왜 샤이 그루밍족이 생길 수밖에 없는지는 네일 케어 한 번만 받아봐도 금방 체감할 수 있다. 우선 네일 케어를 받았다고 동네방네에서 한마디씩 듣게 되는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감시망이 있다. 그걸 알아서 네일 케어를 받았지만 네일 케어를 안 받은 척하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있다. 그렇지만 네일 케어를 받고 깔끔한 손톱을 갖고 싶어 하는 스스로에게는 숨길 수 없는 속내가 있다. 남자는 그루밍 소비를 최종 결정할 때까지 반드시 이런 몇 가지 심리적·사회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남자가 피부 결에 신경 쓰고 손톱 관리를 받고 보디크림 종류에 예민한 건 자칫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문제는 솔직히 남자도 자기 피부가 깨끗했으면 좋겠고 자기 손톱이 깔끔했으면 좋겠고 좋은 보디크림을 바르고 잠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남자도 여자만큼이나 스킨케어와 보디 케어를 좋아하며 오늘 잘생겨 보인다거나 아침에 피부가 맑아 보인다는 얘기를 들으면 결코 싫지 않다. 솔직히 남자들한테도 아름다움에 대한 숨겨진 욕망이 있다. 비록 숨겨졌으나 결코 여성에게 뒤지지 않는 강렬한 욕망이다. 솔직히 말이다.

4월 말에 ‘21세기 그루밍 연구회’라는 모임을 시작할 예정이다. 지식 공유 스타트업 ‘폴인’과 협업하기로 했다. 이미 여러 화장품 브랜드가 남성 그루밍 시장에 도전했고 시행착오를 겪었다. 여성 뷰티 시장과 달리 이른바 셀럽 마케팅이 통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편리하고 간편한 올인원 제품만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보니 잘못된 상식이었다. 남성 그루밍은 이렇게 공급도 있고 수요도 있는데 공급과 수요가 만나서 시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불완전 마켓이다. 이럴 때야말로 미디어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봤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미디어라는 보이는 손이다. 미디어가 남성 그루밍에 대한 바람의 방향을 바꾸면 사회적 공기가 바뀐다. 샤이 그루밍족이 당당하게 스스로를 위해 소비할 수 있게 해방시켜야 비로소 공급과 수요가 당당하게 만나서 온전한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자면 먼저 화장품 브랜드들이 어떻게 남성들한테 접근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지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한다. ‘21세기 그루밍 연구회’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시장에 꼭 필요한 질문들을 던져볼 수는 있다. 그렇게 공급과 수요가 만나는 길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2주 정도 지난 다음 네일 케어를 받으러 다시 갔다. 이번에는 네일 케어뿐만 아니라 페

디 케어까지 받았다. 난생처음 깔끔한 발톱을 갖게 됐다. 오늘도 관리사는 능숙하게 큐티클을 제거하면서 더 능숙하게 숍 홍보를 했다. “요즘 저희 손님 10명 가운데 2명은 남성분이에요. 여성분들은 다른 숍도 가시는데 남성분들은 꼭 저희 숍만 오세요.” 관리사한테 물었다. “그래서 회원권이 얼마라고요?”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