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 2막 1장

국적을 가리지 않는 소비자들의 입맛과 함께 베트남 쌀국수 시장이 진화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 방학을 이용해 친척 집이 있는 뉴질랜드에서 한 달간 지냈다. 그때 공항으로 마중 나온 친척 오빠가 곧장 나를 데려간 곳은 외곽에 있던 베트남 음식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적잖이 당황했다. 게다가 가게는 앳된 여행자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며, 직원과 손님 모두 베트남 국적으로 추정되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었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식사가 준 충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식탁에는 정체 모를 소스가 열 개 넘게 놓여 있었으며, 곧이어 등장한 사발에는 국물이 흥건했는데, 그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을뿐더러 고명으로 올린 고기는 덜 익어 시뻘건 속살을 드러냈다. 뻘건 부위가 영 보기 싫어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저으니 그 안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떠올랐다. 소의 핏덩어리, 선지를 난생처음 본 순간이었다. 이 하드코어한 음식을 어찌 먹느냐며 따져 물을 요량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빠는 목젖이 요동칠 정도로 침을 크게 삼키며 빠른 손놀림으로 식탁에 놓인 소스를 하나씩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객식구 주제에 첫 끼니부터 투정 부리는 게 눈치 보여 오빠를 따라 소심하게 소스를 두어 방울씩 뿌린 후 국물을 살짝 떠서 먹어봤다. 설렁탕처럼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동시에 시큼털털했다.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고기는 육수의 잔열에 그새 익어 야들야들해졌고, 피시볼은 탱글탱글했으며, 납작하면서도 유리처럼 투명한 국수는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듯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고수’라는 낯선 향신 채소도 이로 짓이겼을 때 퍼지는 향이 제법 입맛에 맞았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그 집 쌀국수를 먹었더랬다. 하지만 한 달 동안 낯선 땅에서 축적한 자극과 경험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에 베트남 쌀국수는 곧 기억에서 잊혀갔다. 흐린 기억 속의 음식이 다시 소환된 건 2000년 대학에 진학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였다. 서울 도심에서 베트남 쌀국수집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베트남 음식점은 1995년 혜화동에 문을 연 ‘라우제’라고 전해진다.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한 한 사업가가 차린 이 가게는 양고기를 각종 약재, 채소와 함께 고듯이 우려내는 요리가 대표 메뉴였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양고기가 생소했던 데다 고가의 요리였던 탓에 꽤 오래 사랑받긴 했지만, 그것이 대중적 수요에서 비롯된 결과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베트남 음식이 대중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1998년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 ‘포호아’가 서울 삼성동에 첫 매장을 내면서였다. 포호아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가맹 사업을 펼쳐나가는 베트남 음식점으로, 우연한 기회에 방문한 한 무역업자가 한국에 들여왔다. 포호아의 대표 메뉴는 월남쌈과 쌀국수. 즉석에서 쌈을 싸 먹는 월남쌈은 일종의 유희처럼 여겨졌고, 고기 국물에 면을 만 쌀국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포호아가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포베이’, ‘호아빈’ 등 토종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당시 베트남 쌀국수가 인기를 누린 배경에는 문화 전반에 일던 ‘에스닉 열풍’도 있었지만, 미국 사람들도 받아들일 만큼 현지 맛을 중화한 포호아를 기준으로 메뉴 개발을 한 점도 있었다. 미국 사람들도 거리낌 없이 먹을 정도의 맛을 같은 동양인인 우리가 못 받아들였겠느냐는 이야기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들이 뉴질랜드에서 맛본 쌀국수와 전혀 다른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전에 쌀국수를 맛본 곳이 본토가 아닌, 어쩌면 더 생뚱맞다고 여길 수 있는 뉴질랜드였기에 다르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가게는 사장부터 직원, 손님까지 대부분이 베트남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국물이 더 진하고 맛있었다. 국내에서 시판하는 쌀국수의 문제점을 증명하지 못해 혼자 답답해하다가 어느새 그 맛에 길들여졌다. 그사이 태국, 라오스, 말레이시아 등 주변국에서 쌀국수를 맛봤고, 그것이 국내 쌀국수보다 확연히 맛있었지만 베트남 쌀국수는 아니었던 바 매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중 올해 비로소 베트남 여행길에 올랐다.

현지에서 경험한 베트남 음식은 놀라웠다. 일단 종류가 너무도 다양했다. 우리가 아는 쌀국수, 짜조, 스프링롤, 분보싸오는 물론, 분짜, 분보후에, 반쎄오, 껌승, 껌까, 짜오, 반미 등 대중적인 음식 종류만 해도 넘쳐났고, 쌀국수를 뜻하는 ‘퍼(ph)’의 종류도 무궁무진했다. 우리가 알던 베트남 음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셈이다. 맛도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쌀국수가 그러했다. 육수를 끓일 때 고기와 각종 향신 채소를 듬뿍 넣고 푹 고듯 끓여 국물이 진하고 구수하면서도 채소 향이 향긋하고 달큼했다. 가끔 입천장에 고기 기름이 쩍 하고 들러붙기도 했다. 면도 무미건조한 국내 쌀국수의 식감과 달리 한없이 보드라우면서도 쫄깃했다. 사실 그보다 더 확실한 차이는 식탁 위 풍경과 먹는 방법이었다. 식탁마다 라임, 고수, 베트남 바질, 민트 등의 향신 채소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떤 음식을 주문하든 무료로 향신 채소를 마음껏 곁들일 수 있는데, 보통 라임즙을 짜서 넣고 채소는 손으로 북북 찢어 국물에 담가 먹었다. 그럼 기름진 육수가 한결 더 개운해졌다. 여행에서 돌아올 즈음 국내 베트남 음식 시장에 일고 있는 큰 변화를 감지했다. 15년 동안 변함없는 주인공이던 쌀국수 대신 분짜, 반미를 대표 메뉴로 내세우는 전문점이 생겨나며 시장에 다양성을 부가했다. 또한 스테디셀러인 쌀국수를 판매하더라도 현지화한 맛보다 원조에 가까운 맛을 구현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원류를 찾아 조사하던 중 ‘에머이’를 발견했다.

현재 국내에 가맹점이 90여 개에 달하는 에머이는 2015년 8월 서울 종각에 첫 매장을 냈다. 이듬해 종각점에 이어 가로수길에 매장을 추가 오픈한 에머이가 올해 들어 가맹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매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확장을 보며 종각에 있던 개인 사업장을 기업이 인수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정은 달랐다. “봉추찜닭 창립 멤버이기도 한 대표님이 개인적으로 베트남을 너무 좋아해 1년에 수십 번씩 베트남을 찾곤 했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베트남 음식에 심취했는데, 현지에서 먹는 맛이 국내에 소개된 것과 현저히 다르다며 많이 안타까워했죠. 원래 국적 불명의 음식을 싫어하거든요. 그러다 베트남 음식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확고해져 베트남에서 셰프를 모셔와 가게를 차리게 됐어요.” 에머이주식회사 경영기획팀 박정아 실장의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초기에 1년 넘게 직영점만 운영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는 결과를 낳은 것일까?

베트남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베트남 음식의 원조를 맛본 사람 역시 그 수가 늘었고, 소비자들의 요구에 의해 현지 맛에 가까운 음식을 내놓는 베트남 식당이 생겨났다. 굳건한 입지를 다져온 기존의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도태된 이유도 이러한 트렌드 변화를 제때 읽지 못한 탓이다.

“기존 프랜차이즈처럼 육수를 가루나 페이스트 형태로 개발하여 가맹점에서 물에 풀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전통 쌀국수를 재현하고 싶었어요. 또한 ‘분짜’라는 새로운 메뉴도 있었고요. 기존 프랜차이즈와는 다른 길을 택했기에 안정성 있는 사업 아이템으로 끌어올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박정아 실장은 일례로 생면을 꼽아 설명했다. 에머이는 매장마다 국수 기계를 들여놓고 당일 뽑은 생면으로 요리하는데, 특허출원한 국수 기계와 베트남 쌀과 국산 쌀의 배합률을 결정하고 완성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육수도 소고기에 고수, 베트남 바질, 스피어민트, 베이비 루콜라, 아마란스, 항암초 등의 향신 채소를 넣고 만든 진액을 제공하지만, 추가로 양지와 사골을 가맹점에서 직접 고아 육수를 완성하도록 독려한다. 에머이를 시초로 분짜라붐, 사이공리, 또이또이베트남, 프롬하노이 등 현지 맛에 가깝게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가게가 한둘씩 등장하며 베트남 음식은 현재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러한 변화를 누구보다 반기는 이가 있다. 바로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의 저자 진유정 작가다. 2001년 자원봉사로 베트남을 찾은 후 15년간 베트남과 인연을 맺은 작가는 국내에 거의 유일무이한 베트남 음식 전문가다.

“국내에서 베트남 음식이 오랜 시간 잘못 인식되고 소비된 사실이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나마 쌀국수는 국내에 있기라도 하니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데, 다른 음식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죠. 최근 국내에서 맛볼 수 있는 베트남 음식의 범주가 넓어져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요즘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베트남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지인들이 베트남 음식이 이토록 다채로운지 몰랐다며 감탄할 때마다 즐겁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 베트남 음식 감별사를 자청하는 진유정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운 구석이 많다고 한다. “메뉴가 퍼, 분짜, 반쎄오 위주로 정착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그 외에도 베트남 음식은 너무나 많거든요. 국수는 주로 아침에 먹고 점심, 저녁에는 우리처럼 밥에 국, 채소볶음, 고기 요리를 곁들인 베트남식 백반이나 ‘반미’라고 부르는 독특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어요. 또한 퍼가 하노이 국수라면, 호찌민에는 ‘후띠유’라는 국수가 있죠. 면을 반건조해 식감이 재미있고, 돼지고기, 내장, 새우 등 다양한 재료를 한데 넣고 끓여 맛과 향이 풍성해요. 앞으로 국내에서 더 다양한 베트남 음식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침이 고였다. 또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음식이 많아 아쉽기보다 오히려 새롭게 경험할 미식의 세계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설렜다. 특히 지금의 추세라면 분명 누군가가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베트남의 향기를 들여오리라. 그런데 이쯤 되니 1990년대 말 유입되어 15년 가까이 요지부동하던 베트남 음식 시장이 최근 급변을 맞은 배경이 궁금하다.

지난해 베트남을 찾은 한국인은 150만 명에 이른다. 이는 태국 방문객 수를 뛰어넘은 숫자다. 2015년 110만3000여 명으로 최초로 100만 명을 돌파한 이래 지난해 154만4000여 명이 베트남을 찾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수치를 기반으로 올해 베트남 여행객 수가 200만 명이 넘을 거라 전망한다. 베트남은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매력 넘치는 여행지다. 면적을 놓고 비교해도 우리나라보다 3배 이상 넓으며,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지역마다 자연경관과 문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물론 훌륭한 음식과 저렴한 물가도 한몫한다. 사실 이렇듯 여행지로서 부족함이 없는 지역이 이제야 인기를 누린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아하다. 진유정 작가는 그 이유를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부동했던 태국의 인기와 사회주의 국가를 향한 부정적 인식에서 찾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최근 미디어는 덜 식상한 촬영지를, 여행자는 한국인이 덜 찾는 관광지를 물색하면서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었다. 물론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대거 진출한 덕도 봤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부 해안에 위치한 다낭이 호찌민이나 하노이보다 가깝고 동남아시아의 여느 유명 휴양지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가 베트남을 다시 보게끔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듯 베트남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베트남 음식의 원조를 맛본 사람 역시 그 수가 늘었고, 그 맛을 한국에서도 찾으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의해 현지 맛에 가까운 음식을 내놓는 베트남 식당이 생겨났다. 물론 그 맛에 매료되어 자진해서 가게를 차린 사람들도 있겠지만. 굳건한 입지를 다져온 기존의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도태된 이유도 해외 진출과 가맹점 유치에 집중하느라 이러한 트렌드 변화를 제때 읽지 못한 탓이다. 그들은 보다 더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사업 구조를 만들기 위해 물에 타면 완성되는 가루형 혹은 페이스트형 육수를 개발했다고 미디어를 통해 앞다퉈 자랑했다. 이 사실은 단기적으로 잠재적 점주들에게는 희소식일 수 있겠으나, 소비자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소비자들은 적어도 매장에서 직접 육수를 끓어낸 음식에 기꺼이 값을 지불하려 한다. 물론 매장에서 조리하는 과정이 길어지는 만큼 항상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맹물에 가루를 타서 끓여낸 음식에 1만원을 호가하는 비용을 지불하느니 실패 가능성을 떠안는 쪽을 택할 것이다. 2000원짜리 인스턴트 쌀국수로도 그 정도 만족감은 충족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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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 주연(미식 칼럼니스트)
사진 정 우영
출처
2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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