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이 예술이다-2 행복한상

네 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선택지에서 쌀을 고르면 그제야 밥을 안친다. ‘행복한상’은 이것이야말로 밥집의 진정한 형태라고 강조한다.

인사동은 전통문화지구인 만큼 밥을 잘 짓는 전통의 강호가 많다. 갓 지은 냄비 밥을 퍼주는 ‘부산식당’, 죽통 밥을 내는 ‘차이야기’, <먹거리 X파일>과 <수요미식회>가 극찬한 ‘일미식당’ 등이 그 대표 주자들이다.

쟁쟁한 고수들이 모여 있는 이 동네에 지난 10월 밥집의 진수를 보여주겠노라며 문을 연 ‘행복한상’은 마치 소림사에 쳐들어간 예비 무술인 같다. 책처럼 제본한 메뉴판 머리말에는 심지어 ‘식당은 죄다 밥집이라 부르면서 밥은 그저 주인 마음대로 지어 내놓는 요즘 인정에 대해 딴지 좀 걸어보려 한다’고 써놨다.

행복한상이 이렇듯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다. 손님이 원하는 쌀을 고를 수 있는 것. 단순히 현미와 백미 중 하나를 고르는 수준이 아니라 개성이 각기 다른 네 품종의 쌀 중 취향에 맞는 걸 고를 수 있다. 물론 모두 단일 품종이다. 현재 준비한 쌀은 백진주 백미, 진상 백미, 설향찰미 현미, 토종 벼 북흑조 현미.

행복한상은 전기식 압력솥 밥 기계를 도입했기에 손님이 고른 쌀로 밥을 지어 낼 수 있다. 삼색 양갱과 쌀가루로 빚은 유자 마카롱은 식사 후 입가심하기에 좋다.

가장 먼저 쌀을 고를 수 있는 체계에 놀랐다면, 그다음은 품종에 따라 쌀 맛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놀랄 차례다.

백미에 해당하는 두 품종을 놓고 비교하니 그 맛과 향, 식감이 확연히 달랐다. 백진주는 쌀알이 투명에 가깝고 표면에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처음엔 쫀득쫀득하니 찰기가 느껴지지만 곧 입안에서 녹듯이 부드럽게 풀어져 자신도 모르게 꿀떡 삼키게 된다. 미리 지어서 담아놓은 밥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반찬 다 무르고 밥만 탐하고 싶을 정도로 질감과 풍미가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하나의 완벽한 빵이나 떡을 먹는 느낌이라고 할까? 백진주는 아밀로스 함량이 9.1%다. 아밀로스는 찹쌀과 멥쌀을 구분 짓는 성분으로, 찹쌀은 아밀로스가 거의 없는 반면 멥쌀은 20% 이상 함유한다. 백진주는 멥쌀임에도 불구하고 아밀로스 함량이 최저치에 가깝게 낮아 찹쌀처럼 차지고 달며 윤이 흐르는 것.

한편 경기도 여주에서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한 ‘자채쌀’을 복원해 개발한 품종인 ‘진상’도 아밀로스 함량이 낮지만, 백진주보다는 높아 차지고 달짝지근하면서도 쌀알이 좀 더 단단하고 탱탱해 씹었을 때 식감이 좋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도 잘 뭉개지지 않는다. 나머지 두 종류는 현미다. 사실 현미를 맛으로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건강을 고려해 현미를 택한다. 그런데 행복한상 이윤환 셰프는 의외로 미식의 관점에서 설향찰미 현미를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보통 현미밥을 지을 때 멥쌀을 많이 쓰는데, 설향찰미는 찹쌀이어서 현미임에도 찰기가 있는 편이에요. 겉은 살짝 껄끄럽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쫀득한 식감이 살아나죠.”

한술 떠 입에 머금자 현미 특유의 거친 감촉이 혀와 입천장에 닿는다. 다음 순간 이 셰프의 말에 집중하며 이로 짓이겨 씹으니 점점 찰기가 돌며 은은한 단맛과 함께 구수한 향이 퍼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셰프는 설향찰미 현미의 또 다른 이름이 ‘누룽지 찹쌀’이라고 귀띔했다.

마지막 항목인 북흑조 현미는 토종 벼 중 하나로 지난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만찬에 올라 상을 빛낸 주역이다. 북흑조 현미는 재래 농법으로 토종 벼를 재배하는 ‘우보농장’의 쌀답게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식감과 맛, 향을 자아낸다. 이 셰프는 이를 두고 ‘야생미’라고 표현했는데, 일단 입안에서 다글다글 굴러다니는 식감이 흥미롭긴 하다.

가게 이름을 딴 대표 메뉴 ‘행복한상’은 직접 고른 쌀에 돌김, 감태를 비롯한 각종 쌈 채소와 김치, 장아찌, 젓갈, 그리고 고등어구이나 돼지고기 맥적 중 하나가 곁들여진다. 그중 김정배 명인이 담근, 향긋하고 깔끔한 맛의 어리굴젓은 쌀이라는 주인공을 빛내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밥 취향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까. 밖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보지 못하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차원에서 행복한상은 다양한 쌀을 맛보며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특별한 여정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다.

address 서울 종로구 인사동1길 12
tel 02-2138-8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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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주연(미식 칼럼니스트)
사진 신규철
출처
28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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