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다도

차를 우려라. 마음의 평화를 얻길 바란다면.

언제부터인가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편안하지 않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마음을 비우기 어렵다. 돌아보면 생각 없이 평화롭게 하루를 보낸 적이 드물다. 그만큼 내(우리의) 삶은 바쁘고,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목표를 향해 안간힘을 쓰는 게 전부인 것처럼. 밥을 먹을 때 음식을 배 안으로 채워 넣기에 바쁘다. 바쁠 때는 대충 끼니를 때운다. 음식 종류를 고민하는 것조차 에너지 소모로 느껴진다. 운전할 때는 내비게이션에 의존한다. 실시간 교통량 측정 기술 때문이다. 그만큼 도착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중요하다. 운전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조급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주춤거리며 차 앞으로 끼어들 때 가끔은 화가 난다.

잠깐의 평화로운 순간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승강기를 기다리는 30초가 꽤 길게 느껴진다. 손은 이미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창에 무언가를 쳐 넣는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목소리가 아니라 손가락을 통해 텍스트로 오간다. 당연히 점점 감정이 메마른다. 급하고 불안한 감정이 이어진다. 피곤하다. 에너지가 사방으로 소모되는 느낌이다.

“괜찮아요. 급할 게 뭐가 있나요. 천천히 하세요.” 깜짝 놀랐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 핵폭탄처럼 커다란 충격파를 만들었다. 지난여름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공항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일정이 늦어져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30여 명이 줄을 서서 버스에 짐을 실었다.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여행 가방 손잡이가 갑자기 접혀서 들어가지 않았다.

“죄송해요. 가방이 고장 났나 봐요. 먼저 짐을 실으세요.”

뒤로 줄을 길게 선 상황이라 나는 뒷사람에게 빠르게 자리를 양보했다.

“괜찮아요. 급할 게 뭐가 있나요. 천천히 하세요. 기다리죠.”

지아 라이스 티 세트 도자기 소재, 숙우, 개완, 티컵 2개, 15만9000원, 지아 라이스 티 박스 50만5000원 모두 서울번드. seoulbund.com

인상이 좋은 한 중년 남자가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내가 캐리어를 접어서 넣는 30초를 편안한 얼굴로 기다렸다. 나 때문에 30초를 허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버스에 앉아서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그리고 질문했다. 과연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40분 동안 제주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상황을 꼬집어보고, 그동안의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 마음속에 여유나 평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누군가의 말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채우는 게 급급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비우고, 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수양이 필요하다. 거창한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넓게 보면 취미 활동도 수양이다. 수양의 종류나 과정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자기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면 된다.

한때 자동차를 세차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적이 있었다.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좋은 수양법이었다. 차에 물을 뿌리고, 거품으로 세척하고, 다시 헹구고, 물기를 제거하고, 왁스를 바르는 과정을 통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동안 머리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적당한 육체노동 속의 반복적인 행위가 머리를 비우는 데 도움이 됐다. 실제로 세차가 끝나면 몸은 피곤할지언정 머리는 상쾌하고 의욕이 넘쳤다. 격렬한 운동 후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물론 세차를 수양법으로 삼기엔 여러 문제가 있다. 기후와 계절에 영향을 받고 장소와 시간이 제한적이다. 실제로 그만큼 자주 미루기도 했다.

좀 더 쉽게 머리를 비우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이 필요했다. 갑자기 다도(茶道)에 관심이 생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도란 차를 달여서 손님에게 권하거나 마실 때의 예법을 말한다. 아주 정적인 행동이다. 물론 반대로 나는 무척 동적인 사람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책상 위의 비타민을 먹는 모습만 봐도 속도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내가 갑자기 다도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물론 다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차에 깊이 빠져서 예법이나 기술의 달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따듯한 찻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음미하는 행위만으로도 좋다. 건조한 내 마음엔 충분한 위로가 된다.

다도는 신비한 구석이 있다.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시키는 것과 다르다. 음료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다. 결과가 없다. 모든 행위가 과정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다기를 펼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퇴수기, 호, 잔 등을 격식에 맞게 배치한다. 그러고는 다기를 예열해야 한다. 차가운 잔에 차를 마시면 당연히 맛과 풍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떫거나 식은 차는 기쁨을 주지 못한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안 된다.

예열은 수련의 시작과 같다. 즉 도입 부분이다. 따듯한 물을 호나 개완(차를 우려서 따르는 기구)에 담아서 다기가 충분히 따듯해지길 기다린다. 다기가 열을 받으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호에 70~8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게 전부다. 적막이 흐른다. 몸이 근질거린다. 나에겐 이 부분이 가장 힘들다. 차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특정 행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힘을 빼고 기다려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같은 방법으로 다관에서 숙우로, 다시 잔으로 옮긴다(상황에 따라 숙우에서 다관으로 옮기기도 한다). 당연히 숙우와 잔도 예열이 필요하다. 아주 간단한 세 번의 기다림이다. 이렇게 예열에 쓰인 물은 퇴수기(차를 버리는 잔)로 버린다. 이제 처음으로 차를 우릴 준비가 됐다.

다관에 찻잎을 넣고 차를 우린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숙우에서 적당히 식혀서 다관으로 보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다관에서 숙우로 첫 번째 우린 차를 따른다. 하지만 이 차는 곧바로 퇴수기로 버린다. 처음 우린 차는 맛이 떨떠름하다. 충분히 우려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다관에 물을 부어 차를 우린다. 충분히. 그리고 숙우로, 숙우에서 잔으로 순서대로 옮긴다.

차를 우릴 때 중요한 것은 무념이다. 가능한 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고요한 시간 동안은 오롯이 비우는 데만 집중한다.

차를 우릴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념(無念)이다. 가능한 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낸다. 차 맛을 바꿀 방법을 연구하거나 실험하지 않는다. 그 고요한 시간 동안은 오롯이 내 마음을 비우는 데 집중한다. 멍때리는 것과는 다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개완(차를 우리거나 마시는 잔)을 바라보면서 그 상황에 집중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의식의 반이 명상 모드로 바뀐다.

차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가볍게 든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차를 마신다. 홀짝홀짝 마셔서 없애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천천히 보낸다고 생각한다. 애호가들은 찻잎뿐 아니라 차를 우리는 물의 성질과 온도, 다기의 재질이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 지식이나 연구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따듯한 차가 온몸으로 퍼질 때가 좋다. 곧 긴장감이 줄어들고 마음이 편해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중국 전통 예법에 따르면 기초 차식은 대익팔식(大益八式)이라고 한다. 이 예법은 총 여덟 가지 단계(세진, 탄정, 소성, 법도, 양성, 신수, 분향, 방하)로 구성된다. 쉽게 말해 자리에 앉는 방법에서 마음을 먹고, 차를 우리고, 마시고, 다기를 정리하는 데 순서와 예법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다도는 차를 우려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예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더 나은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매년 설날 차례상의 동조서율(東棗西栗: 대추는 동쪽에, 밤은 서쪽에 놓는 것)도 헷갈리는 나에게 대익팔식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다도 수련법’이라는 책을 몇 권 샀지만 대충 훑어보고는 덮어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차를 우려보세요.”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 때 해주는 말이다. 차를 우리라는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진심이냐며 되묻는다. 이해가 된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 다도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다도라는 행위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답을 찾는 노력이다. 왜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마음이 평화로운 것일 테니까.

다기와 차의 관계

차를 우리기에 앞서 어떤 다기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질은 흔히 도자기, 금속, 법랑을 입힌 무쇠, 유리가 대표적이다. 모든 재질은 장단점이 있고 차의 맛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다기의 크기와 차 맛은 반비례한다. 크기가 큰 다관(티포트)을 사용하면 한 번에 균일한 맛을 낼 수 있지만, 여러 번 우려 마시는 건 어렵다. 반대로 재탕, 삼탕으로 차의 향미가 변하는 것까지 느끼고 싶다면 다관과 잔이 작은 것이 좋다.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