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시대, 우리에겐 춥고 어둡다

우리에겐 출구도 없고 퇴로도 없고 시간도 없다.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이 끝났다.

CNN은 선거 전날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가능성을 91%로 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분석 기관이 클린턴의 당선을 거의 확실시했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족집게 전망으로 이름을 날린 <신호와 소음>의 저자 네이트 실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71.4%의 가능성으로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을 더 높게 보았다.

아메리칸 대학교의 앨런 릭트먼은 10월 22일 정치 매체인 <더 힐(The Hill)>에 ‘새로운 클린턴 정부가 미국 정치를 어떻게 영구적으로 바꿀 것인가’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릭트먼은 1984년 이후 여덟 번의 대통령 선거를 정확하게 전망한 역사학자다. 그는 자신의 역사적 모델에 의해 2016년 대선은 정권이 바뀌는 선거이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가 대선 직전에 이런 글을 기고한 것은 자신의 전망이 지닌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이번 대선은 공화당이 이겨야 하는 선거이나 각종 망언과 추문에 휩싸인 트럼프는 포괄적 의미의 공화당 후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 분석은 틀릴 위험이 있다고 릭트먼은 주장했다.

선거는 끝났고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

트럼프와 클린턴의 대결은 정치적으로 순종주의와 다양성의 대결이었고, 경제적으로 자유무역주의과 보호무역주의의 대결이었으며, 외교적으로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대결이었다. 많은 미국 매체가 이 대결을 시대착오라 생각하고 클린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다양성은 미국 지식인 사회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자유무역은 경제학자라면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 미국과 세계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개입주의는 개입의 정도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차이가 없었다. 트럼프의 승리는 그래서 기존 정치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 승리가 미국에 무엇을 가져올지는 불분명하다.

클린턴의 패배와 트럼프의 승리가 분명해지자 아시아 타임에서 미국의 S&P500 선물은 가격 하한선인 6%까지 하락했다. 트럼프의 놀랍도록 품위 있는 대통령 수락 연설 후 미국 주식시장은 과감한 반등 끝에 1.1% 상승으로 장을 마감했다. 그가 공약한 공격적인 재정 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의 10년 국채 금리는 1.8%에서 2.3%로 폭등했고 달러는 거의 모든 통화에 대해 강세를 보였다. 오바마 시대에 번영했던 IT와 기술 섹터는 하락했고 금리 상승과 재정 확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금융과 산업재 섹터는 상승했다.

트럼프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슬픔을 표시했고 일부는 거리로 나와 시위했다. 기대와 우려와 승자와 패자가 일주일 동안에도 교차했다.

비슷한 일이 2012년 한국에도 있었다.

팽팽한 접전 끝에 민주통합당 후보인 문재인이 새누리당 후보인 박근혜에게 졌다. 48.02%와 51.55%라는 결과였다. 그 결과는 나의 예상과 달랐다. 나는 문재인의 승리를 예상했고 그 이유는 이명박이 실패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나은 이유는 독재는 독재자의 선의에 의존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더 나은 지도자를 찾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훌륭하면 철인정치가 되지만 독재자가 무능하면 정치 자체가 사라진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이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한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다음 정권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가 잘 기능할 때의 이야기다.

어떤 이유로 실패한 정권을 실패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을 수 있다. 그것은 이념 때문이기도 하고, 지역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였다. 경기가 나쁘고 성장이 지체될 때마다 박정희 시대에 누린 고도성장의 향수가 강해졌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판단으로 등장했지만 박정희의 향수를 바탕으로 성립한 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달랐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향수 따위가 아니라 박정희 ‘레거시’ 자체였다. 사람들은 이명박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그의 딸 박근혜를 지지했다.

트럼프와 최순실, 우리에겐 출구도 없고 퇴로도 없고 시간도 없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2016년 12월호

대통령 박근혜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의 ‘레거시’를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었다. 21세기에 살아난 박정희의 화신이 다시 경제성장 활로를 여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박근혜의 혁신으로 부활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진보의 죽음을 알리는, 내가 두려워했던 시나리오다.

이를 위해 박근혜는 두 가지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통일 대박’ 카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창조 경제’ 카드였다. 하지만 ‘통일 대박’과는 상반되는 정책이 난무하면서 통일은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남북대화가 단절되었으며 북한은 핵실험을 지속했다. 일본과의 관계도 경색되고 심지어 미국과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오로지 중국과의 밀월만 깊어졌다. ‘창조 경제’ 카드도 무참히 버려졌다. 박근혜는 창조가 타인의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라는 이해가 없었다. 스티브 잡스가 이룩한 창조의 세계가 실은 그의 자유분방한 의식 세계에서 나온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건설했지만 아무것도 창조되지 못했다.

결국 박근혜는 자신의 실패로 아버지 박정희의 레거시를 청산해버리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게다가 그 실패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부정과 불법에 연루된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박정희를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용이 너무 커서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

11월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지하철과 버스 이용객 수로 환산한 참가자 수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서울 시민의 10%가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참가자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박근혜의 대통령 사임이었다.

검찰의 조사 대상이 되어버린 지지율 5%의 대통령은 기능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렵다. 최순실이란 인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정책에 간섭하고 이권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의혹 대상이 된 정책들은 모두 의도를 의심받고 과정을 수사할 수밖에 없다. 창조 경제, 교과서 국정화, 기업 인수·합병, 각종 문화 사업과 심지어 평창 올림픽까지 거의 모든 정책의 배후에 최순실과 비호 세력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의심이 범죄로 확정되려면 수사가 필요하고 수사 대상에 최순실을 비호하고 도와준 것으로 의심받는 대통령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한 뇌물 알선 수재가 아닌 포괄적 뇌물죄가 확인될 경우 대통령이 탄핵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의 범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검찰 수사에 적극 협력하고 심지어 특별검사의 조사에도 기꺼이 응하겠다는 대통령 담화에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야당과 시민들이 요구하는 임기 중 사퇴를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인이 죄가 없다고 믿는다면 결백하기 때문에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본인에게 죄가 있다면 구속 수사를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절대 사퇴하지 않을 것이다. 현직 대통령에게는 재임 중 형사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 조항이 있다. 사퇴할 경우 구속 수사를 받을 가능성은 높은 반면 사퇴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탄핵을 받고 헌법재판소에 상장된 후 탄핵안이 가결되어 구속되는 것이다.

절차적으로 볼 때 탄핵까지 가려면 지루한 과정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지루한 과정과 오랜 시간이야말로 박근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박근혜는 대국민 담화에서 약속한 것과는 달리 검찰 조사를 교묘히 피하고 지연시킬 것이다.

박근혜는 검찰의 직접 조사를 거부하고 서면 조사를 요구할 것이며 검찰이 자신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상관없이 다른 이유를 들어 특별검사제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는 동안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상황과 지지율의 반전을 꾀할 수 있으며 설령 반전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검찰 수사와 특별검사법의 통과와 특별검사의 수사 그리고 국회의 탄핵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거치는 오랜 시간 (이론적으로는 1년을 넘기는 것도 가능하다) 동안 대통령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거부한 특별검사법이 국회 재의에서 부결되면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되며,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아도 잘 피하면 뇌물죄를 피할 수 있고, 뇌물죄가 인정되어 탄핵 사유가 된다고 해도 탄핵되지 않을 수 있으며, 심지어 탄핵된다고 해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기각한다면 대통령으로의 임기를 채울 수 있다. 박근혜의 입장에서 사퇴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맞아 야당과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대통령의 2선 후퇴나 중립내각 혹은 거국내각은 현실성이 크지 않다. 국민들이 선출하지 않은 총리가 대통령과 유사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다.

2선으로 물러선 대통령이 자신의 헌법상 보장된 권한을 총리에게 순순히 내줄 리도 없다.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여 총리와 대통령이 분할하여 역할을 맡게 하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지지율도 낮고 검찰 수사 대상인 대통령이 국가 정상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 결정을 그런 대통령에게 맡기는 것도 모순이다.

따라서 박근혜가 사임하지 않는 한 야당은 결국 헌법적 권한하에서 제대로 된 검찰 수사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압박하고 그 결과가 미흡할 것을 가정하고 특별검사제를 추진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여론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시간을 벌기 위해 특별검사법안을 거부하면 또다시 국회에서 재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이 경우는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출석과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만약 새누리당이 동의하지 않아서 특별검사법안이 부결되고 검찰의 수사 결과도 미흡한 수준에서 끝나면 이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진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긴장감은 높아지고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정책은 실종되며 불확실성은 높아질 것이다.

만약 새누리당의 일부(소위 ‘비박’일 것이다)가 특별검사법안에 찬성해 특별검사법이 통과되어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 뒤는 지루한 시간이 걸릴 뿐 특별검사법에 찬성한 새누리당 세력의 대부분은 탄핵소추안에도 찬성할 가능성이 높고 국회에서 통과된 탄핵소추안은 아무리 보수적인 헌법재판소도 기각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 사태 해결의 열쇠는 야당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여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신 시민들의 의견을 따를 것이냐에 달려 있다.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생각보다 춥다.

트럼프 시대의 경제 환경은 지금껏 우리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난도가 높다. 그가 내세운 공약 중에는 실현된다면 우리의 현실을 뒤흔들 것이 많다.

중국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게 부과하면 우리 수출은 크게 타격을 받는다. 우리 수출에서 대중 비중이 높고 대중 수출의 대부분은 중간재 수출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하지 않으면 주둔한 미군을 철수할 것이란 트럼프의 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정국의 주도권이 야당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그런 위협은 야당을 분열시킬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철수하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비핵화를 주장할 것이고 누군가는 핵무장을 주장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처럼 통화와 재정 정책이 미온적인 나라에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 중앙은행과 경제 관료들은 더 납작 엎드려버린다. 정책은 사라지고 언어만 난무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미래를 당분간 어둡게 본다. 그래서 촛불을 켜고 온 다음 날, 미국 주식 선물을 사고 한국 주식 선물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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