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합의

전시 여성 성폭력은 국가 간 외교를 넘어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2015년 한일 양국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은… 역사 문제 해결에 있어 확립된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이 배제된 정치적 합의였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픕니다. 또한 현실로 확인된 비공개 합의의 존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주었습니다.”

지난 12월 27일 외교부 장관 직속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바로 다음 날인 28일 입장문을 발표했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지 꼭 2년 되는 날이었다. 앞서 27일 태스크포스는 핵심적으로 세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피해자가 철저히 배제됐다는 점, 일본의 ‘사과’가 아닌 위안부 문제 ‘해결’을 불가역적이라고 못 박은 점, 그리고 소녀상 이전 문제에 대한 정부 설명이 사실과 달랐다는 점이다.

먼저 피해 당사자의 배제 문제다. 피해 할머니들이 엄연히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의견을 구하거나 입장을 듣지 않고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밀어붙였다. 박정희의 1965년 한일 협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 같은 보편적 인권 문제는 주고받기식의 여타 외교 현안과 결코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인권 문제는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 문제 해결에 있어 확립된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에 위배’된다고 표현한 이유다. 외교적 민감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이 문제는 굉장히 특수한 문제다. 인권 문제이고 그 문제의 당사자인 피해자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외교 사안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11월 29일 한 외신 보도는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를 더욱 착잡하게 만든다. 나치에 협력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나치 친위대원 오스카 그뢰닝이 96세라는 고령을 이유로 선처를 요구했다. 그는 2015년 7월 재판에서 나치에 협력한 죄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그뢰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수용소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돈을 뺏고 베를린 나치 본부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한국이라면 여기저기서 ‘선처’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검찰은 단호했다. 그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학살을 도왔기 때문에 전범이나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아무리 고령이어도 역사적인 죗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독일인들의 의지가 담긴 조치였다.

위안부 문제는 어떤가? 독일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이렇게 스스로 추적하고 끝까지 단죄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엄연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인 일본과 대충 협상하고 이 일을 마무리하려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한국을 국제사회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친일파 세력이 처벌받기는커녕 권력과 돈을 쥐고 여전히 득세하는 반면,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3대가 망하는 게 현실인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둘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정됐는지 확인하면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태스크포스에 따르면 한국 측이 먼저 이 표현을 요구했다. 당시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의 의견을 듣고 ‘일본의 사죄’에 대한 불가역성을 못 박기 위해 요구한 것이다. 사과하고 말 바꾸고, 사과하고 막말하는 일본의 오락가락 행보를 더 이상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사실상 합의가 이뤄진 2015년 4월 제4차 고위급 협의에서 ‘불가역성’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태스크포스는 “한국 쪽은 사죄의 불가역성을 강조했는데 당초 취지와는 달리 합의에서는 해결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맥락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태스크포스는 “외교부는 잠정 합의 직후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포함되면 국내적으로 반발이 예상되므로 삭제가 필요하다는 검토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다”면서 “그러나 청와대는 ‘불가역적’의 효과는 책임 통감 및 사죄 표명을 한 일본 쪽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협상 전문가들이 모인 외교부의 의견을 청와대가 묵살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한국 정부와 함께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이번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 일본 정부는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
(2015년 당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 발표)

셋째, 소녀상 이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집착은 여전했다. 태스크포스에 따르면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소녀상 이전 문제를 제기했고, 나아가 합의 내용의 공개 부분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소녀상 이전 노력’을 공식적으로 약속받기 위한 요구였다. 우리 측은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위와 같이 관련 내용 일부를 공개하고, 일본 측의 정확한 요구 내용은 비공개 부분에 담아 봉합했다. 당시 정부는 소녀상과 관련해서 비공개 합의가 없었는지 묻는 국회와 언론의 거듭된 질문에 ‘없다’고 단언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실상은 “일본 측이 소녀상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지 구체적인 한국 정부의 계획을 묻고 싶다”고 했고,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소녀상 관련 언급이 나왔던 것이다.

공개된 내용만 봐서는 ‘적절하게 처리한다’ 정도의 외교적 모호성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해석되지만 비공개 부분과 연결시켜보면 맥락이 달라진다. 일례로 박근혜 정부 외교부는 지난해 2월 14일 부산시청과 부산시의회 등에 “국제 예양과 도로법시행령 등 국내법에 어긋나는 사항이므로 소녀상을 이전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소녀상 문제는 민간 주도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하기 어렵다는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뒤에서는 조용히 일본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있던 셈이다.

정부는 태스크포스 발표 약 2주 뒤인 1월 9일 처리 방향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양국 간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무시한다’는 취지다. 전 정부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고, 일본이 재협상에 응할 리도 만무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역사적, 보편적 원칙에 위배되는 합의를 인정할 수 없으니 ‘없는 셈 친다’는 것이다. 한번 잘못된 국가 간 약속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비용을 치르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한일 양자 차원을 넘어 전시 여성 성폭력에 관한 보편적 인권 문제인 위안부 문제가 인류 역사의 교훈이자 여성 인권 증진 운동의 국제적 이정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했다”면서, 동시에 “한일 간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면서 정부 입장을 신중하게 검토했다”고 말을 이었다. 또 피해자 중심의 조치 모색,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 엔을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음을 확인,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 불요구 등의 입장을 밝히면서 “진실과 원칙에 입각하여 역사 문제를 다루어나가겠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 비공개 내용을 들춰낸 것에 대해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무능을 다시 한번 드러내기 위해 굳이 한일 양국 간에 이미 합의한 내용까지 들췄다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 나아가 한일 관계가 개선돼야 동아시아 전략상 자국에 이익이 되는 미국과의 관계 내지 압력 등을 감안한다면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그저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일 관계 악화가 불 보듯 뻔한 이런 문제를 굳이 건드렸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이익을 계산해보면 답은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것이다.

일본의 격렬한 반발을 예상함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이 불가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문제를 꺼내 들었다. 이건 인권에 대한 기본 인식과 철학 때문이다. (누가 됐건) 대통령의 발언을 상당 부분 인용하는 데 평소에 매우 인색한 필자지만, 이번 사안은 어쩔 수 없다.

“정부 간의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힙니다. …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 아픈 과거일수록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역사일수록 정면으로 직시해야 합니다.”
(2017년 12월 28일 문재인 대통령 입장문 중)

위안부 할머니들과 관련 단체 등 사회적 압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때 과연 얼마만큼의 의지, 진정성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 문제를 10억 엔에 팔아버린 정부와, 돌이킬 수 없지만 감수하겠다는 정부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일본 정부는 격하게 반발하고 있다. 강경화 장관 발표 직전 일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위안부 합의는 1mm도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말했고, 이어 1월 12일 아베 신조 총리도 직접 입을 열었다. 기자들과 만난 아베는 “합의는 국가와 국가 간 약속으로, (한국의 새 방침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면서 “일본 측은 성의를 갖고 한일 합의를 이행해왔다. 한국 측에도 계속 이행을 요구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예상된 반응이고,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다.

2018년이 채 밝기 전,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이 별세했다. 89세의 임 모 할머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은 1월 5일 “임 할머니는 열세 살 때 공장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에 강제 동원돼 만주에서 끔찍한 성 노예 생활을 하셨다. 해방 후 남한으로 돌아왔으나 위안소에서의 피해로 얻은 몸과 마음의 병으로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고 설명했다. 임 할머니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숨진 열여섯 번째 피해자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31명밖에 남지 않았다. 1992년부터 시작된 수요 집회는 이제 26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성 노예로 살았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 고통을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위로와 진실을 찾는 노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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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 승원(정치 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 협조 국가인권위원회
출처
2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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