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참을 수 없는 심심함

한국 맥주 시장은 살아나는데 한국 맥주는 죽어간다.

500ml에 2500원. 요즘 흔한 맥주 가격이 이렇다. 성인의 한 모금이 평균적으로 50ml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 모금의 대가가 250원 남짓으로 공식화된 것. 이처럼 저렴한 가격에 쉬이 구할 수 있는 덕분인지 국내 맥주 시장은 연간 2조7000억원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마트에서 판매하는 수입 맥주의 매출이 생수 매출을 뛰어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진 상황이다.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다. 그만큼 국내 맥주 시장은 슬쩍 들춰보기만 해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로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장이다.

최근 오비맥주는 국내에서 생산하던 호가든, 버드와이저를 다시 수입으로 전환했다. 즉 호가든은 본사가 위치한 벨기에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버드와이저는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국에 들여와 판매하겠다는 것이다. 오비맥주가 이렇듯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며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난공불락과도 같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입견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본사의 노하우에 국내 기술력을 결합해 만든 호가든과 버드와이저를 ‘무늬만 수입 맥주’라며 평가절하했다는 얘기다.

과세라는 이유도 있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맥주는 제조 원가에 판매 관리비, 영업 비용, 마진 등을 합쳐 책정한 출고가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다. 한편 수입 맥주는 원가에 관세를 합친 값을 기준으로 과세한다. 한국주류산업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수입 맥주와 국산 맥주의 가격이 같을 경우 부과되는 세금은 크게 20%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한국과 EU가 체결한 FTA에 따라 2019년에는 유럽산 맥주의 수입 관세가 현행 15%에서 0%로 철폐될 예정이기에 가격 차이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프리미엄 크래프트비어 ‘프레리’를 수입하는 버즈샵 한영훈 대표는 오비맥주가 호가든과 버드와이저의 국내 생산을 중단한 것은 과세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다른 것도 문제지만, 자본이 받쳐주는 대기업은 리베이트 등의 편법을 통해 원가 조정도 가능합니다.” 첨언하자면 원가가 낮을수록 세금이 줄어들며, 국내에서 판매량이 높은 해외 맥주의 대부분은 대기업에서 수입한다. “수입 맥주는 원가를 신고할 뿐 판매 가격은 신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익을 얼마나 남길지는 수입사가 유연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맥주도 규모의 경제를 따르는 제품이기 때문에 마트에서는 싸게 판매해 볼륨을 키우고, 펍에서는 비싸게 받아 이익을 챙기는 등 탄력적인 마케팅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수입을 선호할 수밖에요.”

자본주의의 논리로 접근하자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나비효과가 상당한 선택이다. 호가든과 버드와이저를 생산하던 오비맥주의 광주 공장이 살림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병맥주를 생산하기 때문에 공장을 계속 가동하지만 병맥주마저도 수입으로 돌리면 공장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는 내수 시장을 고려했을 때 고용을 비롯한 심각한 문제로 전이될 수 있다. 그리고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오비맥주는 더 이상 국내 기업이 아니다.

2014년 벨기에 주류 회사인 AB인베브가 오비맥주를 인수했다. 버드와이저, 코로나, 스텔라, 호가든 등 굵직한 맥주 브랜드를 대거 거느린 이 회사는 전 세계 맥주 시장에서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국내 기업만큼 국산 맥주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다. “AB인베브는 오비맥주처럼 2011년에 구스아일랜드를 인수했어요. 구스아일랜드는 미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크래프트비어 브랜드예요. 그런데 본점인 시카고를 제외한 지역에 최초로 브루하우스를 론칭한 곳이 서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장 잘 팔리고 생산 라인도 완벽하게 구축한 라거 위주로만 맥주를 생산하고 나머지 수요는 국내 맥주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브랜드를 수입해서 한국 시장에 풀면 된다는 논리로 접근하는 거죠. 어차피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해외 맥주 브랜드가 차고 넘치니까요.” 버즈샵 한영훈 대표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처럼 국산 맥주 브랜드를 개발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글로벌 기업이 국내 맥주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수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비맥주가 65% 가까이 차지하는 국내 맥주 시장에서 각각 31%와 4%의 점유율을 나눠 가진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는 1위 기업의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때 점유율 1위를 기록했던 하이트진로, 그리고 2014년에서야 뒤늦게 맥주 시장에 뛰어든 롯데주류는 지난 몇 년간 나름대로 다양한 돌파구를 강구했다. 하이트진로의 맥스는 전분 등의 첨가물을 넣지 않은, 국내 최초의 ‘올몰트 맥주’였다. 그 이후에는 드라이피니시d라는 드라이 효모를 사용한 5도짜리 맥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두 맥주는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롯데주류가 출시한 올몰트 맥주 ‘클라우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국산 프리미엄 맥주라고 주목받았다. 하지만 현재 드라이피니시d는 단종됐고, 맥스와 클라우드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질적으로 나아진 국산 프리미엄 맥주가 외면받는 주된 원인으로 한국만의 독특한 주류 문화인 ‘소맥’을 꼽는다. 소주를 섞어 마시기에는 올몰트 맥주 맛이 너무 진하거나 도수가 높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소비자의 트렌드에 맞춰 나름대로 다양성을 고려하고 질적으로 향상된 풍미를 추구하려 노력했으나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번 여름을 앞두고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가 나란히 신제품을 내놨다. 올몰트 맥주까지 일보 진전한 국산 맥주의 진화를 응원해온 ‘맥덕’들의 입장에선 새로운 기대감을 가질 만한 소식이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조금 다른 맥주가 등장했다.

하이트진로는 몰트 비율을 10% 이하로 낮추고 풍미와 알코올의 공백을 다른 곡물의 전분과 주정으로 채운 뒤 탄산을 주입한 발포주 필라이트를, 롯데주류는 몰트 비율을 80%로 낮춘 맥주 피츠 슈퍼클리어를 내놨다. 일단 필라이트는 엄밀히 말해 맥주가 아니다. 라벨에 ‘기타 주류’라고 버젓이 명시돼 있는 필라이트는 몰트 비율을 대폭 줄여 원가를 아끼는 동시에 맥주가 아닌 기타 주류로 유통함으로써 주류세를 절반가량 절약하는 등 가격 경쟁력에 집중했다. 덕분에 1만원이면 12캔을 구매할 수 있다고 광고할 수 있게 됐다. 한편 후자에 속하는 피츠 슈퍼클리어에 대해 국산 수제 맥주 브랜드인 세븐브로이의 김교주 이사는 ‘롯데주류의 전략 수정’이라고 분석했다. “2014년 클라우드를 출시했을 때 시작이 꽤 좋았어요. 내부에서 시장을 긍정적으로 전망했을 것이고, 그 결과 공장을 증축했지요. 그런데 점유율이 점점 떨어지니 별수 없이 소맥 시장에 뛰어든 거예요.” 롯데주류가 클라우드와 피츠 슈퍼클리어를 통해 프리미엄 맥주 시장과 소맥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입맛이 더욱 까다로워진 국내의 맥주 소비자들을 고려했을 때 국산 신제품 맥주의 낮아진 풍미가 국내 크래프트비어 양조장이나 수입 맥주업체 입장에선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크래프트비어 양조장과 수입 맥주업체 종사자들은 오히려 우려를 표했다. “와인처럼 맥주도 취기를 위해 마시는 알코올 음료를 넘어 미식 분야로 인식돼가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의 기호나 선호도를 연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때입니다. 단기적 시각으로 현재에 안주하면 언젠가 도태될 거고, 선두 기업이 무너지면 더 이상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어질 거예요.”

산미구엘 생맥주를 수입하는 주식회사 세원 최윤석 차장의 말이다. 최근 지역 이름을 딴 에일 맥주 ‘달서’와 ‘강서’를 출시한 세븐브로이의 김교주 이사도 비슷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현재 시장을 지키기 위해 미래 시장을 버린 격이라고도 평할 수 있습니다. 맥주도 제조업이에요. 고용 창출 등의 사회문제와 내수 경제를 생각한다면 소비가 활발할 때 국내에서 순환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김교주 이사는 주세법 개정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세를 부과하되 국산 맥주가 역차별받지 않도록 수입 맥주와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편 소문난 ‘맥덕’이기도 한 퐁당크래프트비어컴퍼니 이승용 대표는 기업의 태도를 꼬집는다. “독과점하는 품목 중 맥주만큼 연구개발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드물 겁니다.”

버즈샵 한영훈 대표는 대화 말미에 흥미로운 얘기 하나를 꺼냈다. “미국의 한 양조장과 거래하려고 연락을 취했더니 대뜸 그쪽에서 한다는 말이 ‘도대체 한국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는 거예요. 저 말고도 정말 여러 번 연락을 받았다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정착한 이래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맛과 향의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수입 맥주가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반면 국산 맥주는 소비자들의 선입견과 이를 핑계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대기업의 행태로 인해 발전 속도가 더디다. 업계 종사자들은 이해관계가 다름에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시장의 균형 잡힌 발전을 바란다. 그러려면 그들의 이야기처럼 제도 개편에서 기업의 거시적 안목 등이 고루 뒷받침돼야 한다. 그리고 결국 맥주를 주문하는 건 소비자다. 좋은 국산 맥주를 바란다면 좋은 국산 맥주가 등장하길 열망해야 한다. 일방적인 편견을 버리고 공정한 안목이 있어야만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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