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한 낭만의 건축

낭만건축가 김중업의 걸작 서산부인과가 기어코 살아남은 과정.

1966
을지로7가에 새로 지은 건물은 새하얗고 둥글둥글했다. 그 주변에 있는 어떤 건물과도 달랐다. 건물이라기보다는 조개껍데기를 쌓아둔 모양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남다른 건축가와 남다른 건축주의 만남이었다.

남다른 건물을 만들려면 건축가의 재능에 더해 건축주의 용기와 안목도 필요하다. 서병준은 훌륭한 건축주였다. 잘나가는 산부인과 의사이자 건축가 김중업의 부인과는 먼 친척이었던 만큼 건축가와도 사이가 좋았다. 건축가 김중업은 낭만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 건물을 이렇게 표현했다.

“건축이란 하나의 뚜렷한 사인이며, 인간의 감성에 던져지는 강한 몸짓이기에, 이 자그마한 병원도 강한 몸짓으로 눈길을 끈다. 둥근 면에 뚫린 구멍들이, 살짝 붙어 돌아가는 발코니들이 삶에의 희열을, 또는 태어나는 새 삶에의 찬가를 부른다.”

세 번쯤 읽어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다. 추상적인 수식어와는 달리 건물의 디자인적 주제는 아주 간단했다.

건물의 평면도는 남자의 발기한 성기 모양이다. 아래쪽에 고환 모양 방까지 있다. 산부인과 의사답게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고추 모양으로 표현한 건 귀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서병준에 대한 기록은 딱히 남아 있지 않지만 1960년대에 이런 건물을 지었다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수식어는 추상적이고 상징은 일차원적이지만 건물 내부는 기발했다. 발기한 성기 부분도 기능적 쓸모가 있었다. 이 건물에는 입구를 빼면 계단이 없다. 환자들이 오가는 병원이라 계단 대신 접근성이 좋은 경사로를 선택했다.

그러려면 긴 공간이 필요했다. 위에서 보면 고추 모양의 공간이 1층부터 4층까지 이어지는 경사로가 되었다. 건물의 정관이라고 봐도 되겠다.

김중업은 사려 깊었다. 건물엔 각진 곳이 거의 없다. 병원은 청결해야 하는데 각진 곳에 낀 먼지는 잘 빠지지 않아서였다. 그 와중에 상징은 너무 대놓고 상징적이다. 평면도의 고추 모양 통로 아래에는 여자의 자궁 혹은 남자의 고환, 아니면 웅크린 신생아처럼 생긴 공간이 있다. 분만실이다.

“하, 아저씨 못 말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김중업은 꿈이 컸다. 고추 모양 통로의 4층 천장을 유리로 하고 싶었다. 고추 유리 천장을 감싼 유리가 1층부터 옥상 끝까지 이어지길 바랐다. 채광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꿈은 시공 단계에서 좌절됐다.

당시 한국엔 김중업이 필요한 만큼 유리를 구부려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건축주도 더 이상은 공사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김중업은 천장 부분을 콘크리트로 처리했다. 상관없었다. 이 건물은 이미 파격이었다. 서울에 이런 건물은 없었다. 건물 이름은 서병준 산부인과. 줄여서 서산부인과.

김중업은 동그란 천장이 유리이길 바랐다.

1952~1955
김중업은 처음부터 배포가 컸다. 그는 1952년에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예술가 대회에 갔다. 한국전쟁도 안 끝난 시기에 4일 동안 10개 도시를 거치며 비행기를 6번 갈아타야 하는 험한 여정이었다.

김중업은 자신의 우상 르코르뷔지에를 만나러 거기까지 갔다. 르코르뷔지에가 그 대회의 명예 심사위원이었다. 김중업은 무턱대고 르코르뷔지에를 찾아가 당신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중업의 회상에 따르면 르코르뷔지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회의가 끝난 뒤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로 찾아와 보라”고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을 것이다. 김중업은 진짜 갔다.

그리고 르코르뷔지에와 1년 계약을 맺고 그 밑에서 일하며 건축을 배웠다. 한국 건축이 세계와 만난 순간이었다. 김중업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르코르뷔지에와 일해본 건축가다.

김중업의 건물에서 미와 의미를 본 정인훈 아리움 대표

1995
김중업은 1988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산부인과 서병준 원장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이 건물을 누가 왜 설계했는지도 모르는 채 어떤 사람이 건물을 보고 생각했다.

‘너무 예쁘다.’

정인훈이다. 정인훈은 충무로에서 디자인 회사를 운영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좀 더 크고 예쁜 집을 마련해 사옥을 삼으려 했어요. 처음에는 대로변 뒤쪽에 있는 장충동의 대형 주택을 찾았어요. 그런데 두 달을 다녔는데도 건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큰길에 있는 건물까지 찾기 시작했어요.”

정인훈은 미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건물이 참 예뻤어요. 우리 직원들 데리고 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병원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다. 1층은 병원, 2층과 3층은 수술실과 입원실, 4층은 의사의 개인 주택이었다. 정인훈이 이 건물을 찾았을 때는 서병준이 연로해서 2층과 3층을 비워두고 1층 병원과 4층 사무실만 쓰고 있었다.

1대 건물주는 처음에 이 건물을 팔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저보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봤어요.”

정인훈의 회상이다.

“‘디자인 회사를 합니다. 건물이 예뻐서 사고 싶습니다’라고 차근차근 말했더니 그제야 제게 악수를 청하면서 건물을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에게 오래된 설계도면도 주시고요. 그때 김중업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죠. 처음부터 김중업 선생의 건축인 걸알고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서서히 알게 됐죠.”

서산부인과의 입지는 엄청나게 좋다. 퇴계로와 을지로가 서산부인과 앞에서 만난다. 서병준에게도 건물을 사겠다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서병준은 모두 거절했다.

“그 사람들은 땅을 봤어요. 지금 건물을 헐고 더 높이 새 건물을 지으려는 거였죠. 서 선생님은 그런 분들에게는 건물을 팔지 않았어요. 저는 건물을 봤어요. 처음부터 이 건물이 좋아서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인지 시세보다 너무 높은 값을 받지는 않으셨어요. 그분도 건물을 지키고 싶었던 거죠.”

교섭과 협상치고는 꽤 낭만적인 이야기다. 김중업과 서병준과 정인훈의 교집합을 뽑아야 한다면 낭만이 될 것 같다.

서산부인과 4층에서 본 풍경. 입지가 무척 좋다.

1988
IMF 외환 위기가 터졌다. 정인훈의 회사도 사정이 안 좋아졌다. 그는 세를 줬다. 김중업의 곡면 위로 윌슨과 아디다스의 간판이 올라왔다. 회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건물을 팔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인훈은 건물이 아름답기 때문에 이 건물을 샀다. 하지만 보통 세상은 낭만에 값을 쳐주지 않는다. 서산부인과 건물 역시 감정평가상 가치로는 0이다. 낭만은 불편하기도 하다. 서산부인과는 아름답고 주차가 안 되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없는 옛날 4층 건물이다. 주차는 DDP에 하고 직원들은 여전히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 다닌다.

2017
2017년 2월 작게 뉴스가 떴다.

“서울시, 김중업 ‘아리움 사옥’ 등록문화재 신청.”

홀몸으로 세계를 마주하고 온 한국 건축가의 작품이 살아남았다는 선언이었다. 건축주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이 뉴스를 보고 나서였다.

한국의 건물주는 등록문화재 선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등록문화재가 되면 자기 건물이라도 마음대로 손댈 수 없다. 낡은 건물을 헐고 50억원짜리 새 건물을 올리면 매달 4000만원씩 세가 떨어지는데 문화재가 되겠다고 손해를 감수할 사람이 있을까?

있다. 정인훈 같은 사람. 오히려 그가 적극적으로 등록문화재 등재를 추진했다. 돈 생각은 안 났을까?

“왜 안 났겠어요. 석 달 고민했습니다.”

정인훈이 그때를 떠올렸다.

“이 땅에 몇 층짜리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아세요? 18층인가 19층이에요.”

퇴계로와 을지로가 만나고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고 길 건너면 DDP인 곳이다. 정인훈은 거기에 빌딩을 올리는 대신 직접 나서 건물을 문화재로 등재시켰다. 굉장히 드문 일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는 소식에 자기 건물을 헐어버렸다는 작자들의 이야기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세상이다. 정인훈은 확고했다.

“돈, 돈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죠. 저는 그런 친구들 싫어해요. 저도 고민 많이 한 건 사실이에요. 어떻게 고민을 안 했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건물이 남아 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아내와 아이도 격려해주었어요.”

서산부인과였던 건물의 현재 정식 명칙은 ‘아리움 사옥’이다. 아리움 사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확률이 높다. 건축가와 1대 건축주와 2대 건축주의 낭만 덕분에 우리는 남다른 건축물을 계속 서울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김중업은 평생 건축 모형을 열심히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건축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때가 더 많으니 모형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정신과 집념과 아름다움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남을 수 있다.

김중업 아틀리에의 도장. 1965년 11월 18일 설계.

정인훈은 아리움 사옥의 등록문화재 등재를 찬성하면서 서울시에 조건을 걸었다. 하나, 건물을 깨끗하게 수리해줄 것. 둘, 김중업의 원본 도면대로 건물을 복구해줄 것. 그게 전부다. 정인훈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부각되는 걸 경계했다. 미감과 고집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탈한 사람이었다.

현재의 아리움 사옥이 설계도 초안과 다른 건 크게 셋이다. 천장까지 퍼져 있는 유리, 옥상의 타원형 구조물을 덮은 볼록한 지붕, 그리고 묘하게 생긴 옥상의 탑. 설계도에서 고추 모양 통로를 지나 옥상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면 탑과 마주한다. 뭘까? 정인훈이 말했다.

“제가 이 건물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 탑은 정자예요.”

실로 그렇다. 정자 탑 뒤의 지붕 구조물도 난자의 도식화 같다. 통로를 지나 옥상으로 향하는 이용자의 여정은 난자를 찾아가는 정자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옛날 아저씨들은 정말 못 말린다. 멋부리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서울은 신도시다. 구도심 지역을 품은 초대형 신도시. 모두가 뜨내기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거침없이 낡은 건물을 헐어버린다. 모든 옛 건물이 남을 이유는 없지만 남아 있으면 좋을 옛 건물도 있다. 아리움 사옥은 남을 가치가 충분하다.

다행히 이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은 건물을 설계한 사람만큼이나 그릇이 컸다. 그들 덕에 현실에 부딪혔던 건축가의 뜻이 50여 년 만에 살아나려 한다. 어떤 낭만과 아름다움이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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