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야한 책을

2018년이다. 새해다. 새해에는 야한 책이다. 무슨 소리냐고?

옛 일본에서는 새해 벽두에 야한 책을 읽고 부부가 관계를 가졌다. 그렇게 하면 부부가 화합하니 자손이 번창하고 삿된 기운이 집 안으로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가는 아가씨들의 혼숫감에는 야한 책이 반드시 들어 있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하자 서양인이 일본에 많이 들어왔다. 그때 어떤 일본 부인이 외국 손님들에게 자기 집의 야한 책 컬렉션을 자랑했더니 그걸 본 서양 사람들이 기겁했다는 말이 전한다.

옛 일본의 야한 책은 춘본(春本 폰) 또는 염본(艶本 엔폰)이라고 한다.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畵) 가운데 야한 그림을 춘화(春畵 가)라고 했다. 왠지 이런 춘본이나 춘화는 남자들만 봤을 것 같지만 앞서 말했듯 여자들도 많이 봤다. 이성 간의 연애 말고 동성 간의 연애를 다룬 야한 책과 그림도 많다. 그런 걸로 봐서는 요즘 말로 성소수자들도 많이 봤던 듯싶다.

옛 일본에서는 동성 간의 연애가 그리 금기시되지 않았다. 성인 남자와 소년 간의 연애인 슈도(衆道)는 중세부터 유행했다. 승려나 무사, 그리고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 배우도 슈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하라 사이카쿠라는 유명한 소설가의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라는 소설이 있다. 슈도만 좋아하던 어떤 대갓집 아드님을 사모하던 여자가 남자로 변장해 침실로 파고든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정체를 밝히며 다그친다. “그래서 지금 절 밀어낼 건가요?” 어떻게 됐느냐고? 대갓집 아드님은 슈도의 길 말고 남녀 간의 길도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자손도 번창한다. 해피 엔딩이다.

내가 가진 책 중 <에혼 다이코키(艶本太好記)>라는 춘본이 있다. 그 안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릴 적 절에 갇혔을 때의 에피소드를 테마로 한 삽화가 나온다. 어떤 어른 승려가 도요토미를 자기의 슈도 상대로 삼으려 한다. 도요토미는 길길이 날뛰면서 거부한다. 이 삽화의 원전은 따로 있다. 아들의 난폭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가 절에 가둬놨더니 도요토미가 절을 온통 뒤집어놓고 탈출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도요토미의 어릴 적 유명한 에피소드를 춘본 작가가 패러디한 것이다. 춘본의 삽화 역시 패러디다.

이 장면의 원전은 1797년에 출판한 <에혼 다이코키(繪本太閤記)>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도요토미를 다룬 유명한 일대기다. <에혼 다이코키(繪本太閤記)>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가 완전무장을 한 채 전략을 구상하는 권두 삽화가 실려 있다. 춘본 <에혼 다이코키(艶本太好記)>에도 책머리에 삽화가 있다. 오다는 실눈 뜨고 춘화를 보면서 웃고, 도요토미도 게이샤 그림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술을 마신다. 명백한 패러디다.

춘본 <에혼 다이코키(艶本太好記)>의 제목부터가 패러디다. 원래 책 <에혼 다이코키(繪本太閤記)>와 비슷한 발음으로 한자만 살짝 바꿨다. 원래 책 제목의 뜻은 ‘그림으로 된 타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인데 춘본 제목의 뜻은 ‘야한 책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의 글’이다. 두 책을 나란히 두면 생김새까지 비슷하다. 요컨대 춘본은 원래 있던 유명한 책, 즉 클래식이나 베스트셀러의 패러디다.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춘본은 제목이 <인쇼 가이코키(淫書開交記)>다. ‘음란한 책을 읽으며 몸을 열고 섹스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저자의 이름은 ‘사랑에 탐닉하는 산중 거사(戀戀山人)’. 물론 가짜 이름이다. 이 책이 패러디한 원래 책은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다. 1840~1850년대의 도요토미 일대기다. ‘도요토미의 일대기가 수없이 많지만 이 책이 진실된 도요토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인쇼 가이코키>의 주인공은 ‘연애 박사’ 이로시마루(色師丸)다. 이 이름도 도요토미의 어릴 적 이름인 히요시마루(日吉丸)와 발음을 비슷하게 만든 패러디다. <신쇼 다이코키>는 비천한 출신의 도요토미가 일본 최고의 지위에 올라간다는 내용을 다룬 모험담이다. 그 이야기가 <인쇼 가이코키>에서는 이로시마루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여러 여자와 섹스한다는 내용으로 바뀐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인쇼 가이코키> 제2권이다. 이 사랑의 모험담이 워낙 인기를 끌었던 모양인지 제12권까지 출판되었다. 다들 책이 너덜너덜해져서 버릴 때까지 열심히 읽은 걸까? <인쇼 가이코키> 전체 12권을 모두 갖춘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대학 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춘본을 수집하지 않아서 찾기가 더 어렵다. 국민 세금으로 춘본 같은 걸 수집하느냐는 비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쇼 가이코키> 제2권에서는 게이샤 오로쿠(於六)가 벌이는 모험적 연애담이 펼쳐진다. 여러 남자와 섹스의 모험을 즐기던 오로쿠는 다리 위에서 멋진 남자를 발견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이로시마루다.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가까워져서 어떤 섹스들을 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춘본의 내용이다.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두 사람이 다리 위에서 만난다는 설정이 낯익을 것이다. 도요토미가 어릴 적 야하기바시 다리에서 첫 주군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 일명 고로쿠(小六)를 만나 그의 부하가 된다는 이야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다리 위에서의 만남은 도요토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19세기 후반에 출판한 서민 대상 그림책 <에혼 히요시마루(繪本日吉丸軍記)>에도 이 다리에서의 만남이 그려져 있다. 아무렴, 이 장면 역시 패러디다.

게이샤의 이름인 오로쿠 역시 패러디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하치스카는 일명 고로쿠였다. 원래 남자였던 고로쿠를 여자로 바꿔서 스토리를 전개하는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1978년 방송한 일본 드라마 <서유기>에서도 삼장법사가 여자로 바뀌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또 한편으로는 어른 남자 고로쿠와 소년 도요토미가 슈도 관계였을 수 있다는 전국시대의 흔한 상상 역시 암시되어 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감을 잡으셨겠지만,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런 연애를 별로 숨기지 않았다. 남녀 간의 연애든 동성 간의 연애든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교토, 오사카, 나고야, 에도(지금의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는 그랬다.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일본인이 야한 걸 좋아했다기보다는 일본의 대도시 사람들이 야한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대의 조선 지배층은 겉으로는 “에헴” 하면서 뒤로는 미성년 기생에게 욕망을 발산하고 있었다.

전근대 일본의 4대 도시에서는 춘본과 춘화가 불티나게 팔렸다. 글은 쓴 사람과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출판사들은 당대 최고의 작가와 화가를 고용해 최고급 종이와 물감으로 야한 그림을 그려 넣은 야한 책을 만들었다. 오늘 소개하는 나의 춘본 컬렉션 2점도 대충 만들지 않았다. 비싼 종이에 금과 은을 뿌려서 만든 고급품이다. 잘 팔리는 상품이었으니 그만큼 만듦새에도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다. 동시대 일본의 시골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처럼 겉으로는 욕망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대도시에 나왔을 때는 고향에 선물로 가져가기 위해 춘화와 춘본을 사 갔다.

성을 대하는 일본의 자세는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가 시작되며 바뀐 것이다. 서양의 크리스트교 윤리가 일본 전통 윤리보다 우월한 것이라 받아들이면서, 춘본이나 춘화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것이 더 이상 떳떳하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동성끼리의 연애가 터부시된 것도 같은 시기 서양의 영향이다. 춘본, 춘화, 동성 사이의 연애에 대한 터부가 일본에서 깨지기 시작한 건 사실 최근의 일이다.

2013년 10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에서 전시가 하나 열렸다. 제목은 <춘화 – 일본 미술 속의 섹스와 즐거움(Shunga – sex and pleasure in Japanese art)>. 제목처럼 일본 춘화만 모은 전시였다. 당시 영국에서 전시를 보고 온 일본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서양 여성들이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유쾌하게 웃으며 춘화를 보았다고 했다. 당시의 전시 상황은 지금도 박물관 홈페이지(www.britishmuseum.org/whats_on/exhibitions/shunga.aspx)에서 볼 수 있다.

<인쇼 가이코키>의 몇몇 삽화는 포르노가 아니라 해부학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옛 일본의 춘본과 춘화는 오늘날 우리 눈으로 보면 야하다기보다는 적나라한 것이 많다. 적나라함을 추구하다 보니 해부학적 삽화가 되어버린다. 그런 춘본이나 춘화를 보면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코믹하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을 본 사람들은 정말 이 그림을 야하다고 여긴 걸까?’라고 생각될 정도다. 옛 일본에서 춘본과 춘화를 본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연애와 섹스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웃고 즐기면, 그 웃음이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감각이 오늘날 일본에서는 많이 잊혔다. 브리티시 뮤지엄이 춘화전을 열기 위해 일본 내의 춘화 소장가에게 작품 대여를 부탁하자 일본 문화청이 이를 막아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춘화 같은 걸 해외에 가져가면 일본의 망신이라는 게 문화청의 논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브리티시 뮤지엄의 춘화전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 내에서도 춘화 전시를 열었지만 열 곳 이상의 미술관이 춘화 전시를 거부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맞아 구식 윤리관과 미학을 폐기하고 동시에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근대를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의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춘화를 둘러싼 풍경은 이 사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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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 시덕(문헌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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