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빈의 젊은 생기는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온다.

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빈 시민들의 대표 휴식처인 뮤지엄 쿼터 앞 전경.

4월 6일

여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을 나와 무심결에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정신을 어디에 둔 건지 입국장이 있는 3층까지 올라갔다. 끝과 시작이 맞닿았다. 한 커플이 진하게 포옹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봤다. 1년여 년쯤 내가 겪은 상황과 너무 흡사했다. 못내 아쉬워 서로를 놓지 못했다. 주책맞게 눈물이 뺨을 따라 흘렀다. 오히려 그 커플은 울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더 안쓰러웠다. 옆에 둔 커다란 가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 친구가 유학을 떠나는 것 같았다.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상황이 둘 사이를 갈라놓겠지. 괜한 감정이입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번 여행으로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었다 믿었다. 아니었다. 그리 쉽게 잊힐 인연일 리 없다. 가볍게 스스로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4월 5일

빈에서의 마지막 반나절이 남았다. 아침 9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문을 닫아 발길을 돌렸던 볼펜시온을 찾았다. 며칠 전에 들렀을 때는 “할머니들이 힘들어서 월요일은 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볼펜시온은 하숙집이란 뜻으로 노인들이 운영하는 카페다. 직접 구운 빵, 케이크 등으로 유명하다.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노인의 감각이 아닌 것이 분명한, 세련된 인테리어와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의 조화가 이색적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지역 젊은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이날도 한 청년이 사다리에 올라 전구를 갈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장 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해야 하는 종류의 커피 주문은 받지 않았다. 역시 다른 청년이 고치는 중이었다. 머신 드립 커피만 된다기에 원치 않는 머신 드립 커피를 마셨다. 원래 성격이라면 열 받을 법도 한데 이곳에서는 전혀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카운터에서 한 젊은 여성이 주문을, 다른 여성은 케이크 자르는 일을 도왔다. 푸근함과 활력이 모두 느껴져서 그런지 연일 손님이 줄을 잇는다. 잠시 이곳의 일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상생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낮 2시까지 호텔로 돌아가 짐을 가지고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아쉽지만 발길을 재촉했다. 마지막 날 나머지 일정은 오롯이 쇼핑에 할애했다. 이번 여행 동안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동안 나도, 세상도 미웠다.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실연의 상처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한 적은 처음이다. 확실히 여행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겨우 쇼핑이라니 허무하다. 속물적 근성만큼 솔직하게 자신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나. 맞다. 자기 합리화다. 결국 돈을 엄청 썼다.

4월 4일

조만간 다시 빈에 올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슈퍼센스에서 여유롭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다. 가게 하나 때문에 도시를 통째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뇌 구조가 단순한데 복잡하게 세상을 바라보려고 힘만 뺀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게 참 어려운 거다. 슈퍼센스는 오감이란 주제를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풀어낸 매장이다. 미각의 대표는 커피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랑스러운 카페가 맞이해준다. 후각의 대표는 ‘스멜 메모리 키트’다. 후각의 자극이 기억력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장치라는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만든 제품이다. 전혀 모르는 냄새가 담긴 작은 통을 지니고 다니다가 정말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열어서 냄새를 맡으면 된다. 알 만한 냄새에는 이미 개인의 기억이 담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냄새인지는 직접 맡아보기 전까지 절대 알지 못한다. 이후 그때 느낀 감정과 상황 등을 고스란히 기억해내려면 다시 열어서 냄새를 맡으면 된다. 이미 설명에 홀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통을 열어 함께 냄새를 맡고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다시 냄새를 맡는 상상을 해본다. 아름답기도 하고 궁상맞기도 하다. 아쉽게도 지금은 냄새를 나누고픈 상대가 없다. 촉각의 대표는 200년 된 인쇄기다. 여전히 작동하는 이 인쇄기로 이곳에서 사용하는 명함과 인쇄물을 찍고 엽서, 포스터 등을 만들어서 판다. 시각의 대표는 폴라로이드다. 다양한 종류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필름을 판매하는 것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몇 대 남지 않은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 두 대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청각의 대표는 레코딩과 LP 제작이다. 이 공간에서 직접 라이브를 녹음하고 기계로 LP를 제작할 수 있다. 전문 레코딩 인력도 상주한다. 너무 거창하다 싶으면 공중전화 박스 모양의 부스에 들어가서 원하는 메시지나 노래를 4분가량 녹음하는 동시에 LP로 제작하면 된다. 그레고리 포터가 이곳에서 녹음한 라이브 LP를 들려줬는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취향이다. 무엇을 파느냐보다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슈퍼센스에서 나와서도 계속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점심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이 황홀경을 쉽사리 날리기 아까워서 비슷한 맥락의 일정을 이어갔다. ‘인스턴트 투어’란 프로그램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빈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사진으로 담아내는 낭만적인 투어다. 운영자인 토마스가 폴라로이드 카메라 사용법을 설명해준 뒤 함께 걸으며 안내했다. 필름은 단 여덟 장뿐이었다. 천천히 도시의 정취를 음미하며 사진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친 여덟 장의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성향이 드러났다. 나란 인간은 사물의 디테일이나 사람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상황을 중요시한다. 죄다 그런 사진뿐이었다. 어쩌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저녁에는 도심에서 30분 이상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마이어 암 파플라츠란 와이너리에 방문했다. 이곳은 베토벤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는 전 세계 와인 생산량의 1%를 차지한다. 그중 1%가 빈 와인이다. 보통 와이너리는 생산과 유통에 집중하지만 빈의 와이너리는 작은 규모에 맞게 운영의 묘를 살렸다. 자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와인이 소비된다. 이런 개념의 레스토랑을 ‘호이리거’라고 부른다. 과거 와이너리마다 생산한 와인 중 자신들이 소비하고 남은 분량만 판매하던 것에서 유래한 업장 형태다. 간판에 솔가지를 달아 와인이 남았음을 표시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을 유지한다. 다양한 전통 음식과 신선한 와인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다. ‘신선한 와인’이 생소할 수도 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화이트 와인을 즐겨 마신다. 가볍고 상큼한 맛을 좋아해서다. 오스트리아 대표 음식인 슈니첼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호이리거에는 관광객보다 현지인 손님의 비율이 훨씬 높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그들만의 외식 문화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4월 3일

오전에 인기 시장인 냐슈마르크트를 둘러보고 카페 스펠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스펠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등장한 유명 카페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기 전부터 유명 카페였다. 1880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빈의 ‘커피 하우스’ 문화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스펠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분리파의 단골 카페였다. 분리파는 관학적인 아카데미로부터 이탈을 시도한 근대미술 운동과 그 모임을 말한다. 뮌헨을 시작으로 빈으로 전파되어 미술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은 클림트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보다 클림트를 비롯한 당대 분리파 화가들이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흥분되었다.

한두 시간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호들갑스럽게 “하이!”라고 인사하는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가 왔다. 루시는 ‘쇼핑 위드 루시’라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뉴욕에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미국인으로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해 빈으로 터전을 옮겼다. 직접 발품을 팔아 골목골목 숨은 흥미로운 매장들을 발굴해냈고 유명 편집매장과 이런 숨은 매장을 적절하게 섞어 소개하며 쇼핑을 돕는다. 패션, 라이프스타일, 가구 및 인테리어 소품 등 디테일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면 맞춤형 쇼핑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체적인 느낌이 궁금해서 별도 주문 없이 그녀에게 코스를 맡겼다. 인테리어 소품과 라이프스타일 매장 몇 곳, 재기발랄한 로컬 디자이너의 패션 매장 몇 곳, 공정무역과 관련된 매장 몇 곳, 식료품점 몇 곳을 돌았다. 특히 무용수 출신의 95세 할머니가 공식 모델인 하이패션 편집매장 파크, 천연 원료만 사용해서 각종 그루밍 제품을 만들어 파는 약국인 세인트 찰스, 비치된 레시피 카드를 점원에게 제시하면 식재료를 직접 챙겨주는 식료품점 파인코흐 등이 인상적이었다. ‘쇼핑 위드 루시’ 투어 전까지 빈을 과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지루한 도시라 여겼다. 오해였다. 빈은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도시였다.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이자 젊은이들의 도시로 위상을 떨치고 있는 베를린을 닮아가고 있는 듯했다. 베를린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몰린다. 그렇게 그녀도 그곳으로 떠났다. 또 울적해졌다. 요즘 감정이 롤러코스터나 다름없다.

4월 2일

오전 일정은 예상 가능한 ‘뻔한 빈’ 둘러보기다. 주요 건축물과 역사적 명소를 찾았다. 일요일이어서 슈테판 성당과 세인트 피터 성당에서 열리는 미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빈은 역사와 문화와 예술의 도시다. 유엔 본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모습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 1세가 1856년 도시 벽을 허물고 현재 빈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링슈트라세(반지 도로) 완공을 진두지휘하면서부터 완성됐다. 링슈트라세 주변의 유명 건물 대부분이 이 시대에 지어졌다. 이 시대의 건축물은 역사주의를 기초로 한다. 역사주의 건축은 건물의 특성과 철학에 맞는 특정 시대 양식을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 국회의사당은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그리스의 신전을 본떠 만들었다. 오페라극장은 문화·예술 융성기인 르네상스 양식을 따랐다. 시청은 고딕 양식, 흑사병 퇴치를 기원하며 만든 삼위일체 탑은 바로크 양식이다.

오후에는 미술관을 돌았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여러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설레었다. 레오폴트 박물관에는 에곤 실레의 작품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이 하나같이 아프고 쓸쓸했다. 그의 굴곡진 생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와 헤어진 후 미술관에 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미술 작품 감상을 한동안 접었다. 무슨 연관성이 있겠냐 싶지만 미술 공부를 위해 떠난 그녀의 빈자리가 미술관 근처만 지나도 가슴을 후벼 팠다. 에곤 실레의 엄청난 작품들을 이런 개인적 경험과 연관 지어 소비하는 게 죄스러웠다. 관람을 마치고 뮤지엄 숍에서 에곤 실레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하나 샀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었다. 스케치북을 보는 순간 불현듯 누군가 떠올랐다. 어쩌면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좋은 징조다.

클림트의 ‘연인’을 보기 위해 벨베데레로 발길을 옮겼다. ‘키스’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바로 그 작품이다. 명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드디어 그림 앞에 섰다. 예상과 다르게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많은 관람객에 치여서일까. 아니면 쉴 새 없이 그림과 클림트에 대해 설명해주는 한국인 가이드의 박식함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그림을 받아들일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슬펐다. 가장 기대한 일정 중 하나가 허무하게 지나갔다. 한참을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혹시나, 혹시나 심장이 요동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을 짧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왜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 앞에서 감동하지 않은 것일까.

4월 1일

빈 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몸에서 살짝 열이 났다. 감정이나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때도 있다. 아직은 독일 근처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슬퍼진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루프트한자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했다. 독일 땅을 밟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아직 웃을 여유가 없다.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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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빈 관광청, 김 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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