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증후군

번아웃을 의심하면서도 미디어는 꾸역꾸역 세월을 보낸다. 그리곤 허무하게 사라진다.

MBC <무한도전>이 끝난다. ‘시즌’이 끝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튼 끝난다. 김태호 PD의 거취 문제로 시작된 논의는 원년 멤버들의 잔류 여부, <무한도전>이라는 포맷과 이름의 승계 여부를 거쳐 결국 시즌 종영이라는 결말에 도착했다. MBC가 발표한 공식 입장은 ‘김태호 PD는 당분간 준비할 시간을 갖고 가을 이후 <무한도전> 새 시즌 또는 새 기획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새 시즌이라는 말 바로 뒤에 ‘새 기획’이라는 말이 뒤따라 붙은 모양새를 보면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무한도전>이 복귀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TV 비평을 업으로 삼은 사람 중 이 소식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리라. 한때 <무한도전>은 한국 TV 예능의 문법을 송두리째 바꾼 가장 빛나는 혁신의 이름이었고, 치열한 토요일 예능의 격전지에서 10년 가까이 두 자릿수 시청률을 유지한 괴물 같은 프로그램이었으며, 시청자와 함께 오래오래 나이 먹어가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으로 손꼽히곤 했다. 나만 해도 <무한도전>을 리뷰하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그런 프로그램이 어느덧 노쇠해 레이스를 마쳐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복잡하다.

그러나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이 소식이 놀랍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방송 관련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개편 철마다 김태호 PD의 <무한도전> 하차를 점치는 말들이 뜬구름처럼 떠돌았으니까. 김태호 PD는 언론이나 외부 특강을 통해 줄곧 ‘할 수 있는 이야기는 2009년까지 웬만한 건 다 했다’며 <무한도전>이 TV를 떠나 다른 플랫폼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러려면 매주 70~90분짜리 쇼 한 편을 만들어야 하는 쳇바퀴 같은 기존의 제작 사이클을 벗어나 시즌제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MBC 전체를 통틀어 가장 힘이 센 프로그램 중 하나였고, 방송사가 광고 수익을 포기해가며 그런 프로그램에 휴지기를 주는 일 같은 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으니 종편 채널들이 개국할 때, CJ E&M이 지상파 스타 PD들에게 손을 뻗을 때, 언론 노조 MBC 지부가 장기간 파업에 돌입할 때, 사람들은 김태호 PD가 MBC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무한도전>의 전신인 <토요일> ‘무리한 도전’ 시절부터 자리를 비워본 적 없는 김태호 PD는 <무한도전>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에 그가 MBC를 떠나면 <무한도전> 또한 사라질 거라는 전망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노홍철이 음주 운전으로 프로그램을 떠나거나 정형돈이 불안 장애로 하차할 때도 <무한도전>은 제대로 쉬어 갈 수 없었고, 그랬기에 흔들리는 모습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 언론 노조 MBC 지부 파업에 동참했던 2010년, 2012년, 2017년 휴방 기간을 제외하면 제작진이 얻어낸 휴식은 2017년 초의 7주뿐이었다. 그나마도 7주 중 4주가량은 멤버들이 참여해 코멘터리 촬영을 거친 하이라이트 영상을 따로 만들어 방영해야 했다. 돌아온 직후에는 7주를 쉬는 동안 20억원가량의 광고 수익 손실이 났다는 뉴스가 따라 붙었다. 쉬는 동안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쉬고 난 뒤에는 다시 쉴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졌다. 쉬어 갈 수 없으니 돌아볼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특유의 섬세한 접근도 빛이 바랬다. 소외 계층을 다룰 때 상대를 대상화해 감동을 강요하는 식의 편집을 피하려 했던 방영 초창기의 신중한 접근은 뒤로 갈수록 사라졌고, 여성 게스트나 캐릭터를 다룰 때 필요한 섬세함이나 정치적 공정성 또한 업그레이드되지 못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는 동안, 13년간 매주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동력이 소진된 <무한도전>은 어느덧 많고 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지 못하면 사람이 죽는다’는 당연한 진리에 몇 년 전부터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쉬고 싶다고 그냥 호소하면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으니 근사한 이름을 붙여 마치 새로 발견한 일인 것처럼 세상을 설득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 이름을 붙이면 뭐 하나.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고 뉴스를 만드는 기자들부터 밤을 새우며 일하고, 그 증후군을 연구하는 의학계 연구진이 코피를 쏟으며 살고 있는데. 모두가 번아웃을 의심하면서 꾸역꾸역 일하는 세월이 몇 년 더 흘렀고, 결국 ‘자기 삶도 없이 일만 하다가는 사람이 죽으니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의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또 등장했다. 그런데 번아웃은 사람만 겪는 게 아니라 방송 또한 워라밸이 안 되면 번아웃을 겪는다.

자기 삶도 없이 일만 하다가는 사람이 죽으니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의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런데 번아웃은 사람만 겪는 게 아니다. 방송 또한 워라밸이 안 되면 번아웃을 겪는다.

한국의 평범한 월화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70분짜리 드라마를 일주일에 2편씩, 24부에서 36부가량 쉬지 않고 방영하는 이 살인적인 사이클은 작품의 질을 저하시키는 주범이다. 1회나 2회에선 끝내주는 서사 구조와 매력적인 캐릭터, 눈을 사로잡는 세트와 CG를 선보이던 드라마가 15회쯤 되면 슬슬 과거 회상 장면이나 슬픈 BGM을 깐 슬로모션 장면으로 시간을 벌며 허덕이기 시작한다. 세트의 품질은 눈에 띄게 안 좋아지고, 배우의 눈 밑에선 다크서클이 메이크업을 뚫고 올라와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만하면 다행이다. 생방송에 가까운 제작 환경 탓에 미처 CG 작업을 하지 못해 와이어가 훤히 보이는 영상이 전파를 타고, 스태프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한국에서 해외 드라마나 예능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나면서, 왜 한국은 BBC <셜록>이나 <닥터후>, 넷플릭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느냐는 푸념을 토해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답은 간단하다. 1년에 걸쳐 집필과 촬영을 하고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가완성해둔 상태에서 방영을 시작해 일주일에 한 편씩 공개하는 영미권 드라마의 제작 환경을 생각해보면 한국 드라마와 영미권 드라마의 완성도가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한 시즌을 통으로 만들어서 한 번에 공개하는 전략으로 입소문 효과를 톡톡히 보아온 넷플릭스 같은 사례는 한국의 기존 방송사에선 꿈도 꾸기 어렵다. 게다가 <셜록>은 한 시즌에 많아야 4편, <닥터후>도 14편을 넘기지 않는다. 미국 NBC에서 10년간 방영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시트콤 <프렌즈>의 총 에피소드 수가 236편이었는데, 비슷한 시기 SBS에서 2년 9개월 동안 방영한 한국의 대표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에피소드 수는 무려 682편이다. 워라밸은 고사하고 만드는 이들 모두가 번아웃되라고 고사를 지낸 셈이다. 한국의 드라마와 예능이 세계 시장에 진출해 콘텐츠 한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수익을 올린다고 치켜세우는 기사의 뒤안길에, 사람을 갈아 넣어야 간신히 유지되는 뒤틀린 구조의 방송 산업이 숨어 있었다.

뒤틀린 구조가 오래 지속되면 그게 정자세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의 방송 제작 시스템이 사람을 혹사시키고 착취하는 게 어찌나 심한지, 가끔은 TV 위에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직장인에게 헌사하는 찬가였던 tvN <미생>의 메이킹 필름에는 제대로 퇴근도 못 하고 혹사당하는 스태프들이 등장하고, 갑이 을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드라마였던 JTBC <송곳>은 OST 작곡가들을 착취했다. 지적을 받아도 그때뿐, 크게 달라지거나 개선되는 일 없이 ‘이 일이 원래 좀 이렇다’는 말을 변명 삼아 번아웃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간다. <무한도전>을 즐겨 보던 이들은 늘 ‘아버지’ 박명수가 지쳐 보이는 걸 지적하며 걱정하거나 의욕 부족을 지적하곤 했지만, 생각해보면 모두 지친 지 오래됐다. 쉴 틈이 없었던 탓에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파업을 휴가 삼아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매주 새로운 포맷의 도전에 준비도 없이 뛰어들어야 하는 쇼를 13년을 했으니 지치지 않을 장사가 있을까. 옆에서 함께 달리던 동료가 불안 장애로 주저앉을 때도 제대로 쉬지 못한 <무한도전>은 진작에 번아웃을 겪었고, 그럼에도 도리 없이 계속 달려야 했다. 그 자체로 한국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의 반열에 오른 <무한도전>조차 휴식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한도전>보다 사정이 안 좋은 프로그램은 어떨까? ‘쉬는 건 일이 없을 때나 가능한 거니 바쁜 게 좋은 거’라는 말이 덕담처럼 오가는 세상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손가락만 빨거나 혹사당하거나 양자택일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최근 최승호 사장이 부임한 후 MBC는 흥미로운 일을 시도했다. 11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하얀거탑>을 UHD 화질로 리마스터링해 월, 화, 수, 목 4일 내내 방영한 것이다. 물론 <하얀거탑>은 다시 봐도 숨 막히는 걸작이고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도 아직 굳건하다. 하지만 MBC가 단순히 팬들만 믿고 리마스터링 기술이나 자랑하려고 <하얀거탑>을 다시 방영한 것은 아니다. 드라마국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줄 테니 그동안 새 드라마를 더 내실 있게 준비하라는 배려인 셈이다. UHD로 더 선명해진 장준혁과 최도영의 얼굴을 보며, 나는 어쩌면 여기에서 한국의 방송 제작 환경이 조금이나마 달라질 기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희망을 가지게 됐다. MBC는 오후 일일 드라마를 폐지하고 제작 편수를 줄여 질적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변화의 방향을 세웠고, 적자를 감수하며 제작비도 증액했다. 자회사인 케이블 채널 MBC 에브리원 또한 최대 효자 프로그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숨을 돌리고 재정비를 꾀할 시간을 주었다. 6개월 방영 기간 동안 광고 수익만 100억이 넘었다고 하니 얼핏 생각하면 쉬지 않고 방영을 이어가고 싶을 법도 하다. 그러나 회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째는 대신 알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해주는 쪽을 택했다. 한때 한국 예능 중 가장 빛나는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간판을 내리는 지경에 이른 <무한도전>을 생각해보면, 리마스터링을 거친 장준혁을 더 자주 만나도 좋으니 다들 조금씩 쉴 것을 장려하고 싶다. 사람이든 프로그램이든 쉬어야 할 땐 쉬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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