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의 전망

북한, 세계, 동아시아, 행복. 노학자의 통찰과 지혜.

박찬용(이하 박) (예의 바르게) <에스콰이어> 독자를 위해 지금 동아시아 상황을 잠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큰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해주신다 생각하시고 간단하게….

신기주(이하 신) (방정맞게) 전쟁 나나요?

라종일(이하 라) (웃음) 안 나요. 전쟁 가능성 제로. 없습니다. 사람이 미쳤다는 것만 상정하지 않으면 전쟁은 안 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_김정은은 미치지 않았나요? 오히려 똑똑한 걸까요? 영악한 걸까요?

라_생각보다는 잘하고 있어요. 집권할 때는 제대로 할까 생각했는데, 선대 2대 동안 다져진 체제가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체제가 아무리 좋아도 본인이 잘못할 수도 있죠. 현재까지는 정권과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야죠.

신_교수님의 저서 <장성택의 길>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을 봤어요. 혁명의 혈친화. 그게 북한 체제를 떠받드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_북한 권력 상층부에서는 집안의 조부나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더라고요. 다른 곳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죠. 이념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프랑스나 서구 쪽은 머리로 싸운다고들 해요. 남미나 스페인은 이념 갈등이 가슴에서 일어난다고 해요. 감정이나 충동적으로. 한반도에선 그게 창자에서 일어난다고 해요. 선대의 적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든지. 그런 걸 혈친화라고 할 수 있죠. 김정일 정권을 떠받치는 사람들도 말하자면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거나 빨치산이었거나 남한 사람에게 살해된 경우가 많아요. 그런 경우에 어쩔 수 없이, 이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창자 속에서 기어 나오게 되죠. 그걸 혈친화라고 한 거예요.

박_결국 동족의 비극에서 북한의 신규 엘리트 계급이 발생한 거네요.

라_여러 사건이 있었죠. 한국전쟁도 있고 스탈린 체제도 있고. 하지만 스탈린 체제도 북한 같지는 않았어요. 북한은 한 번도 근대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어요. 봉건제와 식민지에서 바로 스탈린 체제로 갔어요. 소련에는 지하 통신 신문인 <사미즈다트> 같은 게 있었어요. 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에게 공개적으로 말대답도 했어요. 북한에서는 이기영이나 홍명희 같은 웬만한 지식인도 체제 비판 같은 걸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신_말씀 듣다 보니 서방세계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창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루려 하니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_북한 사람, 체제, 집권층을 말할 때 자존심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그걸 자존심이라고 안 봐요. 자존심은 내적인 문제예요. 스스로를 높게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훨씬 유연해져요. 레닌은 “진정한 혁명가는 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흙 바닥을 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게 자존심이에요. 자존심이 없어서 비굴해지는 게 아니에요. 깡패에게 굽힌다고 내 존엄이 망가지는 게 아니거든요.

신_더 높은 목적이 있다면.

라_그렇죠. 북한은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열등감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자존심과 ‘쫀심’을 구별합니다. 자존심은 자기 확신이고, 그게 있다면 남에게 굽힐 줄도 알아요. ‘쫀심’은 깡패의 문제입니다. 체면 구기는 걸 못 참죠. 남에게 멸시받으면 폭발하는 거예요. 자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쫀심’이 강해서.

신_그러면 “이제 남은 수단은 하나밖에 없다”는 트럼프의 말은 북한의 쫀심을 건드리나요?

라_아니죠. 도와주는 거죠. 북한에게는 트럼프처럼 좋은 도움이 없을 겁니다.

신_
그래요?

라_제가 가끔 이런 농담을 해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문화사적 측면에서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고. 역사 이래 처음으로 수많은 동북아시아 인구가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근대 이후에는 서양인이 동양에 왔는데 이제 동양인이 서양에 간 거예요. 1960~1970년대에 일본 사람들이 처음 갔습니다. 그다음에 1980~1990년대에 한국 사람이 갔죠. 2000년대에 들어 대만과 중국 사람이 다니죠. 북한은 여행 대신 노동자를 보내서 노동자의 임금을 국가가 가져갔죠. 그런 나라라면 내적으로 자기 정권의 타당성이 있어야 해요. 명분이 좋아야 하죠. 아니면 성과가 좋거나. 북한은 아무것도 없어요. 실상 뭐가 있어요. 이제까지 해준 게. 중국 사람까지 세계를 여행하는데 겨우 노동자나 내보내 일을 시켜야 하니. 북한의 가장 큰 실패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예요. 북한은 권력 승계를 제도화하지 못했어요. 권력 승계의 룰이 없이 아들과 손자에게 무턱대고 물려주니 북한의 정당성은 하나뿐이에요. ‘엄청나게 큰 괴물과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따르라.’ 그런데 트럼프 같은 괴물이 부순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정당성이 확보되니까. 외부에 진짜 적이 있으니까. 트럼프는 김정은의 둘도 없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신_트럼프의 협박은 북한 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말씀이군요.

라_위기 때는 지도자의 정통성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신_결국 김정은 정권이 원하는 건 핵으로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대외로 협상을 하겠다는 건가요?

라_그렇죠. 북한은 실패한 나라예요. 어떻게 만회할까요? 첫째는 쉬워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시장을 개방하고 개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북한에게 어려워요. 그러면 남한 경제에 종속되니까.

박_더욱이 그러면 본인들의 정당성이 깨질 수도 있지 않나요? 외부 정보가 들어오니까요.

라_깨지죠. 그러면 이제까지 뭘 했나 그러고. 결국 그러면 장개석 모델인데 지금까지 북한의 정당성이 없어져버리죠. 제가 북한에 했던 제안이 하나 있어요. 사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잘 보면 둘이 차이가 없어요. 둘 다 자연을 최대한 착취하고 최대 생산성을 구현하면 최대 소비가 가능해져요. 그 최대 소비가 행복이 돼요. 왜 그게 행복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사람들은 쇼핑을 하고 크리스마스에 뭘 막 사요. 그게 행복이에요. 그 행복을 위해 살게 돼요.

신_욕망의 순환 구조가 생기는 거죠.

라_레닌은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전기’라고 했어요. 선전도 늘 생산을 150%, 200% 했다고 해요. 자본주의 논리와 같아요. 생산과 소비를 관리하는 방식만 달라요. 그런데 솔직히 둘 다 장래가 없어요. 지구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난 북한 사람에게 간디 모델이 있다고 했어요. 자연에 대한 최소 착취, 최소 생산성, 최소 소비. 그러면 정말 문명을 구할 수 있다고.

신_현대 자본주의가 고민하고 있는 모델이네요. 실현시키는 게 쉽진 않습니다만.

라_이 세상에서 그걸 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밖에 없다고 했어요.

박_근대화를 안 겪었으니까.

라_북한은 엄청난 에너지 설비에도 투자를 안 했어요. 일본, 미국, 우리나라 같은 나라는 그리로 못 가요. 이미 기존 에너지에 투자를 너무 많이 해서요. 이미 GDP가 얼마 올라가느냐에 따라서 정권의 정당성이 결정되니까요.

신_성장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북한은 아직 중독이 안 되어 있다는 거죠?

라_투자가 없으니까. 국민들도 조금 소비하고. 그러면 북한이 인류 문명의 구원자로 등장할 수 있다고 했어요. 해보라고, 친환경 지속 가능 발전을. 에너지도 적게 쓰고 음식도 적게 먹고 쇼핑도 많이 할 필요 없고. 적어도 이걸 구현하려면 북한 체제가 우수해요. 선거를 안 해도 되고, 여론 조사 안 해도 되고, 국민에게 인기 없는 정책을 30년 해도 괜찮으니까. 북한이 이 실험 한번 해서 성공하면 이제까지 한 엉터리 짓이 다 보장되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아마 하기 어렵겠죠.

신_현재 북한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 결국 핵무기와 경제 원조 자금을 맞교환하는 것일 텐데요. 그걸 해서 본인들도 자본주의적 성장에 중독되고 싶은 거고.

라_맞아요. 지도층은 이미 소비주의에 엄청나게 중독되어 있어요. 그리고 세 번째 모델이 지금 북한이 하는 거예요. 나는 그걸 마피아 모델이라고 불러요. 남을 귀찮게 굴고 못살게 구는 능력으로 먹고사는. 마피아는 좋은 일은 안 하는 대신 이들과 잘 안 지내면 힘들어져요. 아까 신 편집장이 정확히 짚은 것처럼 핵무기를 지니고 적당히 원조도 받고 하면서 먹고살려고 하겠죠.

신_(쓴웃음) 말씀하신 간디 모델로 간다면 북한은 스스로 말하는 대로 지상낙원이 될 것 같은데요.

라_나는 그건 정말 한번 해볼 만한 실험이라고 봐요. 북한 사람에게 말했더니 변화가 생기긴 했어요. 전에는 북한 유학생이 건축을 공부했어요. 웃겨요. 건축이 권력과 관계가 깊어요. 건축을 공부하고 피라미드처럼 보여주는 건축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공부하는 유학도 보내더라고요. 조금 생각은 있나 봐요. 하지만 그런 그린 모델로 가려면 상당히 생각이 깊고, 군부 관료 제도를 완전히 장학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죠. 군부는 반발할 테니까.

박_동북아의 한·북·중·일이 유럽처럼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요? 유럽은 두 번의 대전을 겪으면서 큰 희생을 치렀죠. 그렇게 배웠죠.

라_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배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고도 아직 못 배웠어요. 한국전쟁처럼 어리석은 전쟁을 겪고도 또 전쟁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신_예전엔 전쟁도 정치의 한 수단이고 연장이었다고 했죠. 그런데 유발 하라리가 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제 전쟁은 전혀 국가에 이득이 되지 않는 정치 행위다. 예를 들어 중국이 실리콘밸리를 점령한다 한들 중국이 실리콘밸리에 있는 지적 재산을 가져갈 수 없는데 전쟁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_서양은 1차 대전 때 이미 깨달았어요. 전쟁에서 이겨도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이겨도 배상금을 못 받으니까요. 상대방이 너무 피폐해져버리니까. 케인스가 그랬죠. 배상금을 받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려면 독일이 영국 시장을 뺏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신_누구를 위한 건지.

라_배상금을 받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거죠. 평화를 유지하는 게 훨씬 유리해요. 그걸 깨달았는데도 유럽 역시 또 전쟁을 했어요.

신_반면 여전히 동북아에서는 영토 분쟁이 각 국가의 권위주의적 정부에 이득이 되는 행위죠.

라_맞아요. 그렇죠. 그게 제일 문제고. 사실은 계몽된 시민 의식에 의해 국내 정치가 좌우되면 좋은데 아직 조금 부족해요. 일본도, 우리도. 중국,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과 국가의 논리에 국민들이 따라서 움직이는 게 동북아시아의 가장 큰 문제인데도.

신_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동북아시아를 더 자극하겠죠. 이 질문을 드릴 수밖에 없는데, 북한이 9월 3일에 수소폭탄 실험을 했으니까 이제 북핵을 폐기하거나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까요?

라_핵을 되돌릴 수는 없을 거고, 북한 정권과 어느 정도 이성적인, 합리적인 타협을 해야겠죠. 핵 개발 같은 걸 비가역적으로 동결하고, 그리고 평화를 파괴하는 일을 안 하고.

박_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신뢰가 있긴 하나요?

라_별로 없죠. 남북한 간에는 특히 없고. 우리하고 일본하고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박_상호 간 신뢰가 없는 게 동북아시아와 EU의 큰 차이일 수도 있겠네요.

라_상호 간에 신뢰가 생길 수 있나. 미국하고 영국은 평화협정을 안 맺어도 서로 침략을 안 할 거라 생각하잖아요. 영국하고 프랑스도 평화협정 같은 게 필요 없죠.

신_지금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정부가 통일을 말하지만 코리아 패싱을 안 당하면 다행인 무력한 상황이라.

라_통일은 너무 큰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통일이라는 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왜 통일을 바라는지는 충분히 이해하는데, 통일이라는 건 일종의 환상지 현상 아닌가.

박_잘려 나간 신체 부위를 내 거라고 생각하는 거.

라_아직도 가려워서 긁어요. 그거를 긁기도 하고. 없는 걸. 분단됐을 때 우리가 분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못 하지 않았나. 분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분단을 극복하려면 얼마나 큰 역량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했나. 오스트리아는 4개국으로부터 점령을 당했는데 10년에 걸쳐 다 물렸어요. 초대 임시정부 같은 게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집권당이 압도적으로 집권했는데도 모든 정당을 다 내각에 참여시켰어요. 초대 대통령이 말했어요. “최선의 외교 정책은 국민의 합의다.” 국민의 합의에 근거해 연정을 통해 조금씩 설득했어요. 소련군도 물러가고 미군도 물러가고.

신_문재인 정부는 운전석론을 이야기하고 있죠.

라_운전대를 잡겠다고. 뭐 당연한 이야기죠.

신_문제는 운전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걸까요?

라_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죠. 제약을 생각하고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는 상황은 없어요. 그렇다고 제약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죠.

신_문재인 정부의 선택지가 궁금해서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건가. 교수님께선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 외교 정책을 입안하셨으니까요.

라_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국제 정세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닐는지요. 초강대국이라도 운전대를 잡았다고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을 때 옆자리에도 다 누가 있어요. 승객도 있고 야당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해야죠. 운전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쉬운 생각이죠. 그러면 안 되죠.

박_트럼프 대통령 집권에 대해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주된 노선에 대한 반성이라고 하셨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이 세계의 제국, 경찰국가 역할을 해온 면이 있잖아요. 트럼프의 미국이 지금까지 전 세계를 비롯해서 아시아에서 해왔던 전략적 균형추 역할을 포기하려 하는 걸까요?

라_2차 대전이 끝났을 때부터 미국은 세계에서 주도적인 국가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그건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국굴기’처럼 계획경제적으로 대국이 되는 나라는 없어요. 하다 보면 대국으로 성장하는 거지. 누군가 대국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영국 역사가들도 영국이 어쩌다 제국이 됐다고 해요. 안 하려고도 하고 저항도 많았지만 하다 보니까 제국의 책임을 떠맡게 됐어요. 미국도 2차 대전 이후 뭘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영국과 프랑스는 피폐하지 독일, 일본은 망하고 소련은 확장하고, 그러니까 조금씩 했죠. 한국전쟁이라는 결정적 계기 전까지 미국은 군사 대국이 될 생각이 없었어요. 소련도 경제, 정치, 외교적으로 봉쇄하려 했는데 한국전쟁이 나니까 ‘군사적 대응을 안 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한 거죠. 그래서 초기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실패했어요. 전쟁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한국전쟁이 시작되니 어쩔 수 없었죠. 그 후에 진짜 군사 대국이 된 겁니다.

신_그래서 냉전의 시작이 한국전쟁이군요.

라_자기 이득을 지키려고 조금씩 뭔가 하다 보면 패권 국가가 돼요. 중국처럼 5개년 계획 해서 패권 국가 된다, 도광양회다 대국굴기다 이렇게 계획으로 되는 게 아니고. 하다 보면 돼요.

박_중국이 패권 국가가 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라_전 늘 강국과 대국을 구별하자고 해요.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하면 강국이에요. 대국이 되려면 다른 나라가 그 나라에서 뭔가 배울 생각을 해야 해요. 중국은 그런 면에서 강국일지는 몰라도 강대국은 아니에요. 우리가 중국 일당독재에서 배울 것도 없고.

신_중국은 다른 국가의 발전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이군요?

라_영국이 성공적인 제국인 건 다른 나라가 배우려 하기 때문이에요. 영국식 의회정치 하니까 좋잖아요. 잘되잖아요. 말썽도 많고 싸움도 하지만 소수 의견도 표출되니까 대국은 다 의회를 갖게 돼요. 대일본제국이나 히틀러의 제국, 스탈린의 제국도 강국이지만 오래가는 대국은 못 됐어요. 미국은 아직 우리가 유학을 가죠. 반미주의자도 자기 아들은 미국 유학 보내고. 그런데 이제 미국은 강대국 되기를 그만하려는 것 같아요. 하다 보니 희생만 많고. 그러니까 미국도 ‘이제 대국 노릇 좀 그만하자. 우리 이득만 취하자’는 의견을 대표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거죠.

신_우리 코가 석 자니까.

라_맞아요. 하지만 미국의 고립주의는 성공할 수 없어요. 영국에는 미국이 대안이었어요. 미국에는 대안이 없어요. 중국은 대국이 아니고. 중국 같은 대국은 불가능해요.

박_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에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라_나는 어떻게 됐든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공을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중요하겠죠. 한국은 위기와 기회가 동전의 양면 같았어요. 북한의 위협 때문에 농지 개혁도 빨리 하고 중화학도 민주화도 빨리 했어요. 한국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중화학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김재익 씨가 저보다 2년 선배예요. 그 사람도 자동차 공업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늘 그랬어요. 대자본이 필요하고 기술도 많이 필요하다고. 어떻게 선진국하고 경쟁하느냐고, 말이 안 된다고. 김재익 씨가 잘 아니까 그런가 보다 하다가 언제 한번 정몽구 회장을 만나서 그 얘기를 했어요. 나는 자동차 공업에서 성공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

신_그랬더니 정 회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라_“에이, 그거야 학자님들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라고 그럽디다. 학자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니까.

신_사업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좀 다르죠. 남들이 아니라고 할 때도 기회를 보는 사람들이니까.

박_이건 큰 질문인데요,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요?

라_두 가지. 첫 번째는 중화학이 성공했다는 것. 두 번째는 북한이 못 한 겁니다. 정권 승계를 제도화한 것. 정권 승인의 절차를 인정하고 다들 승복해요.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 측 선거 기획의원을 했어요. 선거하는 날 소감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당사에서 밤을 새웠어요. 출구 조사에서 1.3% 정도 이겼는데 그 정도 근소한 차이로 이기면 저쪽에서 승복을 할까 싶었어요. 김영삼이 되긴 했지만 그건 같은 당이었거든요. 이건 완전히 다른 정권 교체였어요. 옛날에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데 군대는 가만히 있나 싶고. 한 12시 가까우니까 승산이 확실했어요. 완전히 이겼다 하고 나오기 전에 이회창 후보가 보낸 꽃다발이 도착하더라고. 참 감동적이었어요. 드디어 우리나라가 정권을 평화적으로 물려준다는게요. 그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소련은 참 피비린내 났어요. 봉건시대에도 권력 승계를 해결하려 애를 썼어요. 장자상속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안 듣거든.

신_조선 시대에 장자상속한 왕이 세 명밖에 안 된다고 했죠.

라_그럼요. 조선 시대같이 도덕을 강조하던 시대에도 자기 아들을 죽이고 선비들끼리 정쟁을 벌였어요. 이회창은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억울하게 적은 차로 김대중에게 지고, 그다음엔 더 적은 차로 노무현에게 지고. 그래도 승복하잖아요. 그건 참 우리나라가 잘한 거예요. 권력 승계를 제도화한 게.

신_제도화에 이어 문화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자체에 민주적 권력 승계의 규칙이 스며들고 있으니까요.

라_룰이 공개적이고 모든 사람이 승복하고 알아듣는 게 중요해요. 테니스는 라인에 걸치면 인이라고 해요. 조금이라도 걸치면. 반론할 수도 있죠. 나간 게 더 많은데 이게 왜 인이냐고. 하지만 안 하죠. 룰이 있으면 그 룰에 승복하는 게 근대예요.

신_교수님은 말씀하신 두 번의 정권 교체 과정의 현장에 계셨어요. 그래서 권력 승계의 제도화를 더 실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17년 정권 교체의 경우에는 제도적이면서도 돌발적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쳤고요.

라_하지만 처리 과정은 제도와 규칙을 그대로 따랐죠. 총검을 들고 들어와서 한 것도 아니고.

신_동력은 촛불 혁명이라고 하는 국민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라_민의의 압력이 있었지만 처리 과정은 모두 합법적이었어요. 그리고 과정을 지금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이 승복했잖아요. 역쿠데타라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북한은 아직 그 단계에서 해결을 못 했어요. 그러니까 정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핵무기도 개발해야 하고.

신_아까 하신 말씀이 굉장히 인상 깊어요. 북한 정권의 가장 큰 실패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많이들 경제적인 실패라고 생각하는데요.

라_아니에요. 북한 경제가 실패한 건 정치가 나쁘기 때문이에요. 개혁 개방은 대개 정권 교체가 있어야 가능해요. 스탈린 이후의 흐루쇼프라든지 마오쩌둥 이후의 덩샤오핑이라든지, 그런데 북한은 그걸 전혀 못 하게 한 거예요. 권력이 혈연으로 이어지니까 과거를 반성하거나 비판할 수 없죠. 그게 실패예요.

박_교수님은 정치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장성택의 길> 같은 대중 서적을 쓰기도 했어요. 어떤 활동이 가장 좋으셨어요?

라_<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썼을 때 좋았어요. 그 사람이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가해자는 남북한의 체제이고 남북한의 대결 구조죠. 전두환과 김일성 사이에서 희생된 사람입니다.

박_저는 이 책이 사실 동북아시아판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소설의 주인공 역시 동구와 서구라는 국가권력 사이에서 고생하다 결국은 희생당해요. 그래서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라_아, 그러네. 이상하게 <뉴욕타임스>가 두 면에 걸쳐 보도하고 그랬어요. 와서 인터뷰도 하고. 근데 국내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어요.

박_저는 이 책이 나중에 꼭 재평가받을 거라고 봅니다.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해요.

라_그리고 그때 우리나라 진보에 대해서 좀 불만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진보는 아웅산 사건이 터졌을 때 안기부 조작이라는 정도의 생각밖에 안 했어요. 그렇게 음모론밖에 생각을 못 하나? 그러니까 담론 자체가 엉터리가 돼요. 안기부는 그걸 우습게 깔봤죠. ‘우리가 했단다’ 이러고. 그런 걸 할 능력이 안기부에 있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도 그렇게는 못 해요.

박_위인으로 평가받는 지도자를 두루 만나보았으나 본인이 행사하는 권력에 맞는 지적·도덕적 소양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라_나는 사람을 숭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많이 실패해요. 위대하다는 말은 정치인에게는 안 써야 해요. 나는 장애인이나 그런 사람들, 어려운 상황을 딛고 살려고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위대하다고 하는 게 말이 되나 모르겠어요. 정치권력은 사람에게 굉장히 큰 피해를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만큼 도덕적인 양심을 가졌나, 또 세상일을 잘 아나, 지식, 양심, 정보 면에서 그 권력에 상당하는 자격을 가졌나. 그런 정치인은 없어요.

박_그러면 그렇게 모자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된 비결은 뭘까요?

라_그게 정치의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정치인을 성인처럼 숭배하지 말고 정치인의 권력을 엄격하게 사회적으로 제한해야 해요. 그리고 정치가 잘되길 바라면 안 될 것 같아요. 정치는 근본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예요. 권력을 확보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려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요. 정치에 기대를 걸지 말고 사회가 훌륭해져야 해요. 사회가 훌륭해야 정치가 거기 따라 훌륭해져요. 사회가 성숙해 있으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이 성숙한 사회에 맞는 권력을 행사하죠. 정치에 기대를 걸고 정치가 세상을 좋게 만들 거라는 기대는….

신_평생 정치를 연구하신 정치학자께서 정치보다는 사회가 앞서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라_민주화를 해도 사회 자체가 아주 타락하고 수준이 낮다면 정치권력도 타락하지 않겠습니까.

박_김대중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대선 정국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인데, 이 두 분의 당선을 예측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라_사회가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에선 우리가 선거에 이겨도 승복 안 하지 않을까 이랬는데 전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의 시민 의식이나 구조가 그럴 수가 없었어요.

박_정치가 사회를 바꾸는 게 아니라 사회가 정치를 바꾼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려요.

라_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봐요. 혁명을 일으키면 좋은 결과가 안 나와요. DJ 집권할 때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실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계속이었어요. 다른 점이 조금 있었죠. DJ가 집권한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노무현의 집권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세상이 새로워지거나 그런 건 아니죠.

박_한국의 지식계나 언론계는 흔히 좌우나 보수나 진보 등으로 스스로의 시점을 세우고 반대편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 시각에 비하면 교수님의 시각은 더 입체적이고 냉정합니다.

라_보수, 진보 같은 개념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맞지 않아요.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한국학 교수 중 한 사람이 윤치호의 전기를 쓰고 있어요. 왜 하필 윤치호냐고 물어봤어요. 사람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래요. 친일파냐, 민족주의자냐 이런 구분이 안 된다고. 사람에게 딱지를 붙이는 건 맞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전기를 쓴다고 했어요. 지금 주미 대사가 된 조윤제가 옛날에 날 보고 “교수님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라고 물어봤어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걸 묻지 말라고 했어요. 그건 질문 자체가 엉터리예요. 나는 보수, 진보 양쪽에서 모두 형편없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도 많이 봤어요.

신_햇볕정책을 만드셨어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더 큰 고민을 한 정책이라는 말씀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사실은 이제 햇볕정책도 역사적으로 평가받고 논의되는 과정인데요, 그 정책을 만든 입장에서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북핵을 막는 데 햇볕정책이 효과가 없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라_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건 햇볕정책 도중이었으니까요. 2005년 DJ에게 둘만 있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이솝 우화 말고 마태복음 이야기를 하자. 햇볕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비춘다. 이솝 우화로 햇볕정책을 설명하면서 결국 남의 외투를 억지로 벗긴다면 전략적인 개념이 돼버려요. 그럼 북한도 전략적으로 대응하겠죠. 그러지 말고 북한 주민의 식량을 매년 우리 예산에 포함시켜서 함께하자고 했어요. 자동적으로. 스스로 궁핍을 극복하기까지는. 그래서 정치적으로 만나 수반이 악수하는 건 햇볕정책을 10년쯤 하고 양쪽이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자연스럽게 했어야 해요. 정치가 주도하는 그런 통일 같은 건 없어요. 애당초 통일 같은 말부터 없애버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뭘 하려고 하죠. 하지만 평화가 그렇게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통일이 오는 것도 아니에요. 양쪽 국민의 수준과 생활의 질과 도덕적 수준이 성장해야 통일을 하죠.

신_당시 DJ와 라 교수님이 햇볕정책을 최초로 구상하면서 나눈 대화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햇볕정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립니다만, 통일을 국제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바라봤다는 점에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식의 전환이었어요. 대북 첩보전의 최전선인 국정원 1차장을 역임하셨고, 국가안전보좌관으로 외교 국방 전략을 짜셨어요. 그런 첩보와 외교 현장에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라종일의 유산이 아닐까도 싶어요.

라_지금 제게 가장 큰 관심은 북핵 실험에 따른 환경오염입니다. 핵무기라는 게 아무리 좋아도 계속 실험을 해봐야 해요.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미국이면 모를까,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핵실험을 계속하면 환경에 큰 타격이 와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핵무기 실험은 관둬야 해요. 또 하나 중요한 게 북한의 다재내성결핵이에요. 결핵이 완치될 때까지 항생제를 놔야 하는데 북한은 못 그래요. 시장에서 나오면 쓰고 없으면 못 써요. 그러면 결핵균이 내성이 생겨서 항생제도 안 듣고 전염성도 강해요. 나는 그게 핵무기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생각해요.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잘 먹어야 하고 격리해야 해서 집도 지어줘야 해요. 환자를 수용하는 집의 재료는 80% 정도 한국 교회에서 기부해요. 그런데 그걸 중국으로 가져갔다 북한으로 다시 보내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서 그 물자를 보낼 때만은 DMZ를 건너게 해줘야 되지 않나 싶어요. 최근 북아일랜드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 메어리드 맥과이어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어요. 또 하나, 동북아시아 평화의 큰 장애가 일본의 비가역적인 사과가 없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그분께 아시아에 오신 김에 일본까지 가서 ‘위안부건 뭐건 간에 불가역적으로 사과해라. 한번 사과한 후에 아니라고 하지 말고’라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한대요. 지금 조직을 하고 있어요.

박_마지막 질문입니다. 행복하세요?

라_아니, 아니요. 안 행복해요. 그건 억지 질문입니다.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없어요. 짧은 행복은 가능하겠죠. 사람은 행복을 안 느끼기 때문에 훌륭해지는 거예요.

신_공저하신 <가장 사소한 구원>에서 공저자 김현진 에세이스트와도 같은 말씀을 나누셨죠.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고. 그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미망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라_행복하다면 사람이 아니죠. 에덴동산을 꾸며줘도 사람은 거기서 나가잖아요. 아니라면 아직 거기 살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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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KIM C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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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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