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의 역할을 강요할 수 있을까?

대중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대중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 에스콰이어 Esquire Korea 2017년 1월호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으레 음악가에게 고개를 돌린다. 뭘 좀 해주길 바라거나, 뭘 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가끔 음악이 뭐 그리 특별한 것이냐고 자문한다.

내가 말하는 것과 저 가수가 노래하는 것은 왜 다른 카테고리가 되어야 할까. 나도 말 잘하는데 왜 저 래퍼만 1년에 10억을 버는 걸까.

하지만 이런 의문은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사라진다. 멜로디와 리듬에는 분명 신비한 힘이 있다고, 음악가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빚어내는 작가라고, 나도 모르게 외치게 되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음악가의 태생적 정체성이 그들을 사회 참여와 더욱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도 한다. 목소리의 힘이 일반인보다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음악가에게 사회 참여를 바라는 건 여러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동시에 그것은 음악이, 음악가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 때로 돌아가보자.

여러 논란이 있었다. ‘세월호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있었고 ‘세월호 참사는 음악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을 소홀히 한 음악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낡은 ‘순수-참여’ 논쟁을 복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시의 논란이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음은 확실하다. 그때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 끝에 내린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음악가에게 어떠한 당위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2) 대중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혹자는 직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노래를 정치적이지 않다거나 비겁하다고 깎아내린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사람들은 개인적이거나 간접적이더라도 똑같은 정치적인 노래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난 거기에서 한술 더 뜬다. 음악가는 어디까지나 음악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은 ‘용산 참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 사건과 직접 관련 있는 단어는 한 개도 없지만 그 사건과 겹쳐진다. f(x)의 ‘Red Light’나 레드벨벳의 ‘7월 7일’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분명 세월호와 관련이 있다.

직접적인 비판과 참여만을 강조하다 보면 음악이 음악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배틀 랩’이 위협과 다른 이유는 음악 안에서 음악의 규칙을 지키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랩이 서커스와 다른 이유는 ‘기예 수준의 빠르기’가 랩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 역시 정치가의 연설이나 투쟁 구호와는 다른, 달라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음악가는 음악 안에서 음악을 활용해 자신의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 현실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해 음악에 녹여야 하고, 현실과 자신과의 거리를 직접 설정해야 하며,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음악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이승환의 노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에는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승환과 이효리 등이 무료 공개한 ‘길가에 버려지다’ 역시 박근혜의 이름을 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그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서정적이면서 정치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우리 모두의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훌륭한 음악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각성을 주는 메시지다.

이런 의미에서 이 노래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투쟁과 구호로써 앞장서는 음악의 시대는 갔다.”

물론 직접적인 비판과 참여로써 어떤 음악가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음악가에게 강요하고, 그렇게 해야 정치적인 음악이라고 인정해주는 시대는 갔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야말로 좋은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음악가가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도 존중받는 세상. 음악가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 앞장서서 따르라고 외치는 음악이 아니라 개개인을 존중하며, 다만 함께 가자고 다독이는 음악의 세상.

음악가도, 우리도, 모두 개인이고 시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