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반바지를 찾아서

나는 반바지가 무척 어려운 옷이라고 생각한다. 바지 길이의 길고 짧음, 통의 좁고 넓음에 따라 신체 비율이 무너지고 색과 무늬와 장식에 따라 가차 없이 촌스러워진다. 반바지 입은 남자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도 영향을 준다. 멋지게 잘 만든 반바지가 탄생하기 위한 시간이 그만큼 부족했던 거니까. 그래서 남자가 반바지 쇼핑에 나서면 대체로 못생김과 투박함과 더 못생김과 끔찍하게 못생김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

이러면 반바지 쇼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게 불친절하면 확 안 입어버릴까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5월부터 9월까지는 반바지가 제일 소중하다. 활용도가 높은데 승률이 낮으면 헛돈이 많이 나간다. 그래도 우리는 반바지를 잘 입으면 무척 세련되고 쾌활해 보인다는 걸 잘 안다. 놓아주지 못하는 미련한 사랑이다. 여름에는 믿음직한 반바지 몇 벌을 상비약처럼 갖추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나는 옷을 좋아하고 쇼핑도 곧잘 하지만, 다섯 벌쯤 되는 든든한 상비군을 갖출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헛돈도 많이 썼고.

반바지 - 에스콰이어

우리가 반바지 쇼핑에 숱하게 실패했던 건 톰 브라운 때문일 수도 있다. 패션 디자이너 톰 브라운은 반바지 슈트로 패션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 세계적으로 정말 많이 팔렸고 여전히 꽤 인기 있으며 톰 브라운 이후에 반바지 슈트를 만든 브랜드도 참 많다. 하지만 그가 연 장에는 자비가 없다. 허벅지가 빠듯하게 맞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라니. 다리가 짧고 굵은 남자에게 치명적이다. 우린 다리가 짧고 굵다. 슈트라서 더 애매하다. 반바지는 격식을 차리라고 만든 옷이 아니다. 반바지가 비즈니스 캐주얼에 어울리고, 반바지를 입고도 격식을 차릴 수 있다고 하지만 격식 있는 반바지는 없다. 격에 맞는 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그냥 누가 봐도 갖춘 옷을 입으면 된다. 그런 옷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왜 반바지를 격식 카테고리에 끼워 넣는지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원래 격식은 불편하고 까다로운 거다.

반바지는 자유로운 옷이다. 좀 편하고 분방하게 입었으면 좋겠다. 내가 발견한 신세계는 수영복 바지다. 수영복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자, 이제부터는 수영복을 수영복이라 생각하지 말고 수영도 할 수 있는 반바지라고 생각하자. 수영복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 형태만 봐도 납득할 수 있다. 통이 헐렁하고 바지 길이가 무릎 위로 손가락 길이만큼 올라온다. 이러면 다리가 길어 보인다. 가볍고 시원하다. 세탁하고 말리는 과정에 부담이 없다. 광택이 없는 것은 거의 면바지처럼 보인다.

내 첫 번째 일상 수영복은 몇 년 전에 산 H&M이었다. 햇빛에 자연스럽게 닳은 듯한 카키색에 박음질한 실은 연한 크림색, 바지 밑단에 약간의 트임이 있고 똑딱 단추 아래에 벨크로가 달려 있어 앞을 쉽게 여밀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바지를 지금도 잘 입는다. H&M은 색과 무늬가 다양한 수영복을 5월 초부터 판매한다. 종류가 다양하고 가격 부담도 없으니 수영복의 일상화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보기를 권한다. 폴로 랄프 로렌과 몽클레르도 훌륭하다. 새터데이즈 서프, 버드웰, 웨일런처럼 서핑 문화에 바탕을 둔 젊은 브랜드도 좋다. 올레바 브라운은 수영복에 테일러링 개념을 도입한 런던의 수영복 브랜드다. 사진을 바지 전면에 실사 프린트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정말 슈트 만들 듯 수영복을 만들어 놀랄 만큼 고급스럽다. 그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카프리섬의 청명한 바다 사진이 바지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 사고 싶다. 얄미운 앵글로색슨.

맨날 수영복만 입으면 질릴 수도 있으니까 데님 반바지도 입어야 한다. 데님 바지는 애초에 멋지게 잘 맞는 걸 찾기 힘든데, 길이가 반 토막 나면 난도가 세 배는 높아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 사지 말고 입던 걸 자르자. 잘 입던 청바지 중 스트레이트 핏 하나를 골라 무릎 위 길이로 자른다. 스키니는 안 된다. 슬림 스트레이트도 네버. 모든 반바지는 반드시 헐렁해야 한다. 그래야 우아할 여지가 있다. 좋아하는 바지라고 아까워할 것 없다. 그 바지가 아니어도 입을 데님 바지가 세 벌쯤 더 있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최고의 반바지를 찾았다. 6년 전 어느 길거리 옷 가게에서 산 이름 모를 데님 바지를 잘라 만들었다. 입고 벗고 빨다 보니 닳아서 거의 완벽해졌다. 그 바지를 대체할 데님 반바지는 아직 없다. 최고의 반바지를 찾으면 여름이 기다려진다. 늘 입던 바지를 올해는 어떻게 다르게 입을지도 기대되고. 그 바지는 지나간 몇 번의 여름 동안 내가 느낀 사랑과 행복과 슬픔과 원망을 모두 안다. 편집부에서 제일 사치스러운 옆자리 선배는 최고의 반바지를 찾았는데 작년에 홧김에 버렸고, 그 바지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한다. 애인 같은 반바지와 보내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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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 지은(m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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