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만든 남성복

남성복을 새롭게 설계하고 건축하는 동시대의 여자들.

GRACE WALES BONNER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는 디자이너이자 사상가다. 흑인 문화에 관심이 많고 차분하지만 결단력이 있다. 브랜드를 론칭한 지 몇 년 만에 스타가 됐다. 하지만 또래 디자이너들처럼 자기 자신을 소셜 미디어로 요란하게 홍보하거나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찬찬히 자신만의 독립적인 길을 걸었다. 웨일스 보너의 옷을 입은 모델들은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건장한 흑인 남성의 이상과는 차이가 있다. 흔들리는 버드나무같이 낭창낭창하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느낌. 남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패션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섹슈얼리티 같지만 미묘하게 센슈얼리티를 보여준다. 정체성과 독창성에 집중하다 보면 소재와 디테일에서 약점을 보이기 마련인데 그녀에겐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깔끔하게 정리된 재단과 정제된 디테일, 완벽한 커팅과 피트감은 어쩌면 동시대에 보기 힘든 진짜 우아함이다.
editor 백진희

 

MARTINE ROSE

마틴 로즈의 옷을 처음 봤던 때를 기억한다. 머리를 반질반질하게 빗어 넘긴 모델이 밑단이 드레스처럼 퍼진 바지를 입은 사진이었다. 재미있는 옷이었지만 오래 기억하진 못했다. 2017 F/W 런던 남성 컬렉션 스케줄 명단에 마틴 로즈가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을 때도 반응은 미미했다. 그러나 쇼가 끝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그 1등은 나였고. 마틴 로즈의 첫 런웨이 쇼에는 세상 모든 남자가 있었다. 부동산업자, 우체부, 버스 운전사, 은행원, 회사원…. 평범한 남자들을 능수능란한 테일러링으로 비범하게 표현했다. 남자의 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가능한 영역. 생물학적 한계는 마틴 로즈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 특출 난 기술로 뎀나 바잘리아가 발렌시아가의 첫 남성 컬렉션을 만들 때도 조력자가 되었다. 이쯤 되면 런던 남성복이 다시 부흥한 건 다 마틴 로즈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editor 권지원

 

CLARE WAIGHT KELLER

끌로에를 만들던 그녀가 지방시 하우스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되자 우려가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성스러움으로 똘똘 뭉친 끌로에와 우락부락한 지방시의 교집합을 찾는 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지방시를 완전히 흔들었다. 힙합과 스트리트, 다국적 근육질 남자들의 옷에서 복고와 낭만, 예민한 소년들의 옷으로. 이처럼 예전과 다른 온화하고 상냥한 분위기가 눈과 마음을 먼저 현혹했다. 하지만 한쪽에선 랄프 로렌 퍼플 라벨 등 다양한 브랜드에서 연마한 날 선 테일러링 내공을 은근슬쩍 드러냈다. 절도 있는 슈트와 의젓한 코트, 분방한 블루종은 로맨틱한 장치와 뒤섞여 조금 다른 남성복의 영역으로 펼쳐졌다. 그녀의 첫 컬렉션은 마치 새로운 지방시를 써 내려간 선언문 같았다.
editor 고동휘

 

FENG CHEN WANG

펑첸왕은 갓 데뷔한 젊은 디자이너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스포티즘, 로고, 오버사이즈, 스트리트웨어 같은 것.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자라고 런던에서 공부하고 뉴욕에서 컬렉션을 만드는 동안 스며든 이국의 낯선 정서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터. 그래서 펑첸왕의 컬렉션에는 ‘MADE IN CHINA’ 레터링 티셔츠도 있고, 극단적으로 해체된 셔츠도 있고, 지극히 상업적인 보머 재킷도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파격적인 실루엣. 테크니컬한 소재로 마음껏 부풀리거나 제멋대로 늘어뜨린 옷을 보면 대륙적 해방감이 든다. 그 와중에 주름 장식으로 분명하게 중심을 잡는 건 여성 디자이너라서 가능한 섬세한 시선.
editor 권지원

 

PHOEBE ENGLISH

피비 잉글리시는 간결하고 분명한 색과 제한된 소재를 활용해 옷을 만든다. 그래서 때론 그녀를 미니멀리즘을 구사하는 디자이너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한정된 색과 소재에 한계를 두지 않고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일목요연하지만 세밀하게 다른 컬렉션이 그런 결과랄까. 피비 잉글리시는 무엇보다도 ‘일하는 남성’을 위한 옷을 만든다. 그 남성은 슈트를 갖춰 입고 일을 하는 남성과는 거리가 멀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창문을 닦고, 요리를 하는, 본인은 물론 애인과 가족을 위해 먼저 나서는 남성을 위한 옷. 그녀의 옷에서 볼 수 있는 탄탄한 소재와 만듦새, 여유로운 실루엣은 그런 이유를 뒷받침한다. 피비 잉글리시가 정의하는 남성복은 유용하고 기능적이며, 그래서 더 낭만적이고 사랑스럽다.
assistant editor 신은지

 

ASTRID ANDERSEN

스포티즘과 스트리트를 주재료로 삼는 건 이제 별 이슈도 아니지만, 아스트리드 안데르센은 이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그녀는 농구복부터 갖가지 운동복을 기반으로 한 럭셔리 스트리트웨어를 장르화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안데르센의 옷을 규정하는 건 도리어 여성성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자포니즘적인 꽃 프린트, 섬세한 실크와 레이스, 휘황한 색, 여성복에서 차용한 신체 노출 등 여성적 장치를 이용한다.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이 넘칠 듯한 운동복의 형태에 돌발적으로 결합시킨다. 운동복의 형태와 기능은 전복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은 생경해서 더욱 아름답다. 여성적 세부로 만든 남성적인 옷. 가장 모순에 다다른 옷. 그녀가 남성복에서 구획한 영역은 정말 독보적이다.
editor 고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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