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까레라

태그호이어가 전통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

TAG Heuer Carrera Calibre 01 45mm Black Matt Ceramic
지름 45mm, 블랙 매트 세라믹 케이스, 블랙 매트 세라믹 브레이슬릿, 시·분·초·날짜 표시, 오토매틱 와인딩, 파워 리저브 50시간, 칼럼 휠 크로노그래프. 스켈레톤 처리한 다이얼, 뒤가 보이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케이스백. 759만원.

시계 오른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오른편에 버튼 세 개가 보인다. 가운데 있는 큰 것이 ‘크라운(crown)’이라는 장치다. 시간을 맞추는 부품이자 우리가 기계식 시계에서 조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부품이다. 크라운 위아래로 두 개의 버튼이 더 보인다. 크로노그래프를 조절하는 버튼이다. 위쪽이 스타트/스톱, 아래쪽이 리셋이다. 크로노그래프 버튼 옆으로 눈을 돌려보자. 부품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케이스와 스트랩 사이에 있는 이 부분을 러그(lug)라고 한다. 보통 러그는 케이스와 붙어 있다. 이 시계처럼 별도로 있는 건 거의 없다. 스위스의 고급 시계는 작고 비싸다. 모든 디테일이 시계의 단가 및 브랜드 이미지와 직결된다. 즉 모든 디테일에는 이유가 있다. 태그호이어가 분리형 러그를 만든 데에도 확실한 전략적 판단이 있다. 분리형 러그의 의미는 모듈화다.

분리형 러그가 도드라지는 뒷모습. 신형 자사 무브먼트 칼리버 01이 보인다.

모듈화한 러그는 고급 시계 비즈니스에서 태그호이어의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기에 아주 좋은 장치다. 생산 단계에서 모듈화의 목적이자 미덕은 효율 증대다. 기존에는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던 걸 모듈화해서 쪼개면 생산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이미 자동차업계는 폭스바겐 MQB처럼 베이스를 모듈화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건 어느 업계에서나 좋은 일이다. 하지만 비싼 시계업계에서 효율을 추구하다가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잃을 수도 있다.

전 세계에 비싼 물건을 팔아치우며 사는 스위스는 여기에도 이미 대책을 세워뒀다. 1급 시계 회사의 아주 훌륭한 점 중 하나는 기술, 이미지, 생산, 마케팅이 혼선 없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기술과 마케팅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니스는 첨단 기계식 시계 기술로 승부했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니 제니스에게는 첨단 기술이 곧 마케팅이다” 같은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스위스 시계업계 최고의 스타 장 클로드 비버가 지난 11월 조선호텔을 찾아서 기자들에게 건넨 말이다. 그런데 왜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제니스냐고? 둘의 수장이 같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LVMH 시계 부문 대표이자 태그호이어 회장이기도 하다.

당대의 시계 마케팅 천재 비버 체제의 태그호이어는 좀 다른 전략을 쓴다. 비버가 택한 태그호이어의 브랜드 이미지는 한층 젊고 강하면서도 고급스럽다. 그래서 태그호이어는 서서히 광고 모델을 바꿨다. 몇 년 전만 해도 태그호이어의 광고 이미지와 해당 캠페인 모델은 보통 시계 광고 모델과 별 차이가 없었다. 타이거 우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스타들이었다. 지금 광고 모델은 좀 분위기가 다르다. 카라 델레바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데이비드 게타. 광고 카피까지 해시태그다. #돈크랙언더프레셔dontcrackunderpressure 압력에 굴하지 마라. 젊은이들을 자극하는 문구다.

젊은이를 자극하려면 젊은 감각의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 까레라가 태그호이어의 답이다. 지금의 까레라는 밀레니얼 세대를 생각하는 고급 시계다. 고급품이라면 번쩍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난 무광의 검은색 시계. 지름을 키우고, 안쪽의 주요 디테일을 미세하게 눈에 잘 띄게 만든 시계.

모듈형 러그 역시 여기서 확실한 역할을 한다. 모듈형 러그 덕에 디자인이 다양해진다. 태그호이어 홈페이지에서 ‘까레라’를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다. 러그와 케이스를 분리한 덕분에 태그호이어는 러그와 케이스의 소재를 다르게 해서 더 효율적으로 라인업을 키웠다. 손목시계 디자인을 미래적으로 바라본 경우에 속한다. 비싼 물건일수록 보수적인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태그호이어의 모듈형 러그는 굉장히 미래적인 발상이다.

이 시계의 세라믹 브레이슬릿은 가볍되 빈틈없는 느낌으로 손목에 감긴다. 사진에서 보듯 브레이슬릿에 체결된 각 부품의 회전 반경이 넓기 때문이다.

태그호이어의 미래지향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까레라와 비슷하게 생긴 태그호이어의 커넥티드 워치는 아예 러그가 분리된다. 스마트워치 케이스와 러그를 분리시킨 후 기계식 시계 모듈을 끼워 쓸 수도 있다. 과감하면서도 안전한, 기계식 시계의 명가라는 브랜드 자산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시도다. 애플이나 LG전자가 러그를 분리할 수 있고 기계식 시계 모듈을 끼우는 스마트워치를 만든다 쳐도 전혀 매력이 없을 것이다. 이건 만듦새를 떠나 정당성의 문제다. 태그호이어처럼 기계식 시계 역사가 있는 회사가 이런 시도를 했으니 ‘아, 그러면 스마트워치를 차다가 기계식 시계로 바꿀 수 있겠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태그호이어가 전에 쓰던 브랜드 슬로건에는 ‘스위스 아방가르드’도 있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발상이다.

‘스위스 아방가르드’라는 말에도 이유는 있고, 그 이유 안에는 이들의 역사가 있다. 태그호이어는 ‘태그’와 ‘호이어’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시계 브랜드 이름을 짓는 패턴 중에선 신기한 경우에 속한다. 보통 시계 브랜드 이름을 짓는 방식은 세 가지다. 사람 이름, 약어, 기타. 브라이틀링은 인명, IWC는 약어, 위블로(기존 단어)나 롤렉스(신조어)는 기타. 태그호이어는 약어와 사람 이름의 혼합이다.

태그호이어는 ‘호이어’에서 시작됐다. 1800년대 후반에 시계 회사를 차린 에두아르 호이어가 창업주다. 그때부터 호이어 시계는 가문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100년이 좀 더 지난 후 에두아르의 증손자 잭이 브랜드를 이끌 때 쿼츠 파동이 일어났다. 잭은 용단을 내리기로 했다. 회사를 넘기기로. 그는 1985년 오스트리아의 태그 그룹에 브랜드를 넘겼다. 태그(TAG)는 ‘테크니크 아방가르드’의 약어다. 태그호이어가 ‘스위스 아방가르드’를 오래 쓴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벌써 이것도 34년 전 이야기다.

호이어가 태그호이어로 변하고 스위스 아방가르드가 #돈크랙언더프레셔로 변해도 호이어 시절의 유산은 태그호이어 안에 그대로 이어진다. 잭 호이어는 아직 명예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잭 호이어 에디션도 나왔다. 요즘은 레트로 시계가 인기라 태그 없이 호이어만 쓰여 있는 시계도 다시 나온다.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가 돈이 된다는 사실도 잘 아니까 이런 선택을 내리는 것 같다.

시계 이름인 까레라 역시 태그호이어의 전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까레라는 1960년대부터 이어져온 태그호이어의 대표적인 컬렉션 이름이다. 까레라라는 이름에는 태그호이어가 소비자들에게 알리고자 한 브랜드 가치가 담겨 있다. 레이싱이다. 까레라 파나메리카는 1950년대에 잠깐 열린 전미 종단 자동차 경주다.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대회는 중단되었으나 대회 이름 자체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다. 태그호이어 말고도 여러 브랜드가 이 대회의 이미지를 써먹는다. 까레라와 파나메라(파나메리카)를 쓰는 포르쉐가 대표적인 경우다.

태그호이어는 왜 레이싱과 스스로를 붙이려 했을까? 기계식 시계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크로노그래프에 특화된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태그호이어는 손목시계가 대중화되자 자신의 특기인 크로노그래프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자동차 경주와 시계 이미지를 나뭇가지처럼 접붙이려 했다. 그 시도의 결과물이 지금도 이어지는 까레라이고, 그 이미지 믹스를 이끌었던 사람이 잭 호이어다.

잭 호이어 시절에 만든 그 까레라는 아직도 까레라라는 이름으로 출시된다. 지금 보고 있는 시계가 바로 그 까레라다. 다만 태그호이어는 까레라라는 라인업 이름 아래로 아주 다양한 시계 라인업을 꾸리고 있다. ‘호이어’ 로고만 있는 레트로 시계와 이 시계처럼 현대적인 시계가 동시에 한 라인업에 있다. 이 시계 안에서도 태그호이어의 균형 감각이 드러난다. 현대적인 디테일을 가미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디테일 역시 잊지 않고 새겨둔다.

시계 가장자리의 미세한 눈금이 좋은 예다. 12시 방향 태그호이어 로고 오른쪽으로 태키미터(tachymetre)라는 글자가 보인다. 경과 시간을 측정해 속도를 재던 시절의 전통에서 온 디테일이다. 지금 이걸로 진지하게 시간을 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능적 요소를 미적 액세서리로 돌려 쓰는 게 현대사회의 마법이다. 랭글러 타고 오프로드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조금씩 높낮이를 다르게 꾸민 다이얼 디자인 덕분에 새카만 시계인데도 입체감이 있다.

태그호이어는 어디까지나 현대적 감각으로 시계를 만든다. 다이얼 구조가 좋은 예다. 시계 다이얼은 속을 뚫은 스켈레톤형으로 구성했다. 무광과 반광 등 광택을 섞고 회색과 검은색 등 무채색의 채도를 미묘하게 달리했다.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돌아가는 부분에는 작은 경사를 주는 등 미묘한 입체감을 줬다. 덕분에 새까만 시계인데도 막상 차면 생각보다 시·분·초가 잘 보인다.

이 시계의 무브먼트는 태그호이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날의 시계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는 표식이다. 태그호이어가 직접 만든 칼리버 호이어 01이다. 시계 브랜드가 무브먼트까지 직접 만드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시계 카탈로그나 기사를 보다 ‘자사 무브먼트’라는 말이 있다면 해당 시계 회사가 직접 무브먼트를 만드는 거라고 보면 된다.

그럼 ‘타사 무브먼트’가 있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물론이다. 시계는 부품 아웃소싱이 활발한 정밀기계라는 점에서 자동차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동차 회사가 보쉬나 ZF의 변속기를 납품받아 탑재하는 것처럼 시계 역시 무브먼트 전문 회사의 무브먼트를 탑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롤렉스의 무브먼트를 사용한 초기의 파네라이가 좋은 예다. 자사 무브먼트는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다. 무브먼트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기술이 있다는 건 자동차 회사가 엔진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개념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자사 무브먼트를 보유한 브랜드는 시간 될 때마다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궁금증이 이어진다. 왜 그러면 진작 자사 무브먼트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건 스위스 시계업계 내부의 미묘한 판도와 관련이 있다. 스위스 시계업계에는 기계식 시계 무브먼트 전문 회사인 ETA가 있다. 무브먼트만 만드는 스와치그룹 자회사이고, 여전히 잘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회사에 판매하는 무브먼트 공급을 조절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와치그룹의 라이벌인 타 브랜드에게 우리 손으로 만드는 고품질 무브먼트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부터 스위스의 주요 시계 브랜드는 자사 무브먼트를 발전시키거나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스위스에는 공짜가 없다. 돈을 들이고 노력을 했다면 무조건 알린다. 최근 자사 무브먼트가 유명해지고 중요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아무튼 태그호이어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자사 무브먼트 칼리버 호이어 01을 출시했다. 칼리버 호이어 01은 태그호이어의 기존 자사 무브먼트인 칼리버 1887과 거의 모든 스펙이 같다. 부품 수, 동력 잔량, 시간당 회전수 등. 달라진 건 장식적인 효과다. 무브먼트 맨 뒤에 붙는 로터(무게 추)를 조금 더 키우거나, 무브먼트 앞에 있는 스켈레톤 날짜 창을 아주 미세하게 깎아내거나.

태그호이어는 칼리버 01의 중요 부품을 거의 다 만들되 외부 생산을 맡기는 부품도 있다. 무브먼트의 헤어스프링은 아토칼파라는 회사에서 공급받는다. 헤어스프링은 미세한 장력과 내자성 등 다양한 특징을 갖춰야 해서 거의 모든 회사가 소재 전문 기업에 생산을 위탁한다. 사실 아토칼파 역시 스와치그룹 자회사이자 헤어스프링 제조사인 니바록스의 대안이다. 니바록스 역시 타사에 공급 제한을 선언한 지 좀 됐다. 고상한 스위스 시계업계는 냉정한 비즈니스의 장이다. 작은 시계 하나에도 이렇게 한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 있다. 그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게 다름 아닌 이 시계의 상품명이다. 태그호이어 까레라 칼리버 01.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은 ‘태그, 호이어, 까레라, 칼리버 01’이라는 게 각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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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정 우영
출처
29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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