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저항

구찌와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지금 ‘다름’의 가치를 만들고 있다.

그날 중세 귀족처럼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가 피날레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 2015년 1월 19일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던 얼굴이다. 구찌는 혼란스러웠다. 몇 년간 이어진 매출 부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CEO의 느닷없는 사퇴, 이런 상황에서 2015F/W 남성 컬렉션 쇼까지는 고작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팀은 정확히 5일 만에 완전히 새로운 2015F/W남성 컬렉션을 완성했다.

구찌 디자인팀과 그 남자는 쇼에 온 모든 이들로부터 대단한 박수를 받았다. 어떤 팀원은 눈물을 흘리고 대부분은 아주 밝게 웃고 있었는데, 가운데 선 그 남자는 옅게 웃었지만 감격이 넘칠 듯 가득해 보였다. 이틀 뒤 그 남자는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톰 포드,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 생 로랑의 에디 슬리먼의 이름이 거론되던 자리다. 그때 그 남자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알레산드로 미켈레.

미켈레는 2002년부터 구찌에서 일했다. 그는 누구보다 구찌를 잘 아는 사람이다. 또 누구보다 독창적이고 시적이라서 그가 만드는 어떤 옷은 에덴동산을 닮고 어떤 건 불지옥을 닮을 만큼 극적이다. 그만큼 자신이 그려내는 그림, 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방향이 명확한 사람이다. 오죽하면 5일 만에 컬렉션을 완성해야 했을 때, 무대까지 새로 만들고 모델도 싹 바꿨을까.

“옷은 그저 옷일 뿐입니다. 남자도 여자 옷을 입을 수 있죠. 우리가 고객에게 너무 많은 룰을 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듯 미켈레는 패션보다 태도에 대해 말한다. 자신에 대해 눈을 뜨고, 전통의 껍질을 깨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태도. 미켈레가 구찌 월드를 만든 3년 동안 패션 트렌드는 젠더리스, 앤드로지너스, 레트로, 빈티지, 맥시멀리즘 등 전에 없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갔다.

3년 만에 다시 미켈레의 구찌를 직접 봤다. 구찌는 지난 시즌부터 남성 쇼와 여성 쇼를 통합해 일 년에 두 번, 여성 컬렉션 시즌에만 런웨이 쇼를 진행한다. 무솔리니 시절에 비행기 격납고로 사용하던 곳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구찌의 밀라노 오피스로 만들었는데, 쇼도 지난 시즌부터 이곳에서 한다. 천장이 높고 빨간 카펫이 깔린 공장형 건물 안은 초대형 석상, 조각 난 그리스식 기둥, 이집트풍 장식으로 채워져 있었고 안개가 자욱해 더욱 음산했다. 극적인 걸 좋아하는 미켈레답다.

구찌의 2018S/S 컬렉션은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설계했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 존재에 대해 연구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영감받았다. 한껏 부풀린 헤어스타일, 포멀한 슈트 차림에 겹겹이 건 목걸이, 빈티지 숍에서 10년은 묵은 듯한 가죽 재킷, 곡예단을 연상시키는 트랙 슈트 스타일링에서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지식인, 카뮈와 하이데거의 고민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사회 통념에 대한 저항, 익숙한 가치에 대한 반대, ‘다른 것’에 대한 자유.

미켈레는 컬렉션을 통해 저항하라고 외쳤다.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세상의 기준에 굴복하지 말고 무자비한 통일성에 저항하라고. 이런 정신은 그가 창조해낸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가령 ‘Guccy, Animal Magnetism, Spiritismo’ 같은 ‘미켈레적’ 표현을 가슴과 가방과 신발 곳곳에 새겼다.

쇼가 끝난 다음 날 리시(re-see)에 갔다. 리시는 쇼룸에 들러 옷을 만져보고 입어보기도 하면서 찬찬히 둘러보는 시간이다. 구찌 옷은 가까이 봐야 더 황홀하다. 사람을 홀린다. 턱 끝부터 발목까지 세심하게 짠 드레스,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 만든 스웨터, 사방으로 반짝거리는 블라우스 같은 걸 보면 저게 기성복인지 쿠튀르인지 헷갈릴 정도. 쇼에서는 사람 잡을 것 같은 옷도 리시에서 입어보면 굉장히 잘 재단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원단 자체였다. 새 원단을 일부러 헌 것처럼 가공했다. 원단 면이 적당히 들떠 있고 색도 은근히 바랬고 드문드문 보풀도 있었다. 그 원단으로 더블브레스트 재킷도 만들고 슈트 안에 입는 셔츠도 만들었다. 원단부터 공들이니 제아무리 기괴해 보여도 완성도는 최고다.

미켈레가 온 후 구찌가 특히 주력하는 부분 중 하나는 주얼리와 아이웨어이다. 이번 시즌에 처음 등장한 메탈 볼로타이와 동물 뼈를 닮은 목걸이는 가까이 보니 더 기가 막혔다.

며칠 전 구찌가 더 이상 퍼를 생산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모던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끔 생각한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정확히는 ‘도대체 어쩔 뻔했을까?’가 더 맞지만. 미켈레는 매일 럭셔리를 새롭게 정의한다. 2015년 1월 19일에 미켈레의 첫 구찌를 직접 본 건 정말 놀랍고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미켈레는 오래된 모든 것을 사랑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보다 과거와 현재에 열광한다. 그런 미켈레가 지금 구찌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창의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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