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이 된 컴퓨터

브라이틀링을 만든 역사와 디테일.

아래 보이는 곳이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의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다. 내비타이머의 다이얼. B자 좌우로 날개가 그려진 브라이틀링 특유의 로고.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울퉁불퉁하지만 만져보면 충분히 부드럽게 깎인 베젤. 이 모두가 모여서 ‘브라이틀링 시계’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이룬다.

이 시계의 지름은 43mm에 불과하다. 베젤 부분을 빼면 다이얼을 이루는 원의 지름은 더 줄어들 것이다. 그 크기를 생각하면 다이얼 안에 보이는 미세한 눈금의 정확성과 정밀성은 놀라운 수준이다. 작은 크기 안에서 정밀한 공정을 해나간다는 건 1000만원쯤 하는 이 시계의 가격을 정당화시키는 큰 이유가 된다. 이미테이션 시계와 진짜 시계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고.

저 눈금에는 엄연한 기능이 있다. 정식 이름도 있다. ‘슬라이드 룰’이다. 다이얼에 있는 숫자와 베젤에 있는 숫자를 곱하거나 나누어서 특정한 계산 기능을 할 수 있다. 곱하기와 나누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응용도 가능하다. 30분 후에는 몇 m나 더 가는지, 환율은 얼마인지 등 곱셈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계산을 할 수 있다. 기계식 시계 명가라면 우리만의 것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브라이틀링에는 내비타이머와 슬라이드 룰이 대표적인 우리만의 것이다. 이 기능 때문에 한때 브라이틀링 시계는 손목 위의 컴퓨터 취급을 받았다.

지금 저 계산을 하기 위해 1000만원쯤 하는 시계를 살 사람은 너그럽게 생각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작은 눈금들은 이제 계산기가 아니다.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의 장식적 요소인 동시에 개념적으로는 이 시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기능적 요소를 장식적으로 사용하는 건 현대 고가 기계식 시계 전반에서 보이는 아주 큰 특징이기도 하다. 예전의 첨단 기술이 지금의 장식이 되는 것이다.

브라이틀링은 이 기술과 장식성이 합쳐진 이미지를 통해 살아남았다. 19세기에 태어나 21세기인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꽤 훌륭한 점수다. 시계 브랜드가 새겨둔 글자에는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게 쓰여 있다. 내비타이머의 경우에는 브랜드의 로고 아래에 숫자가 있다. 1884년. 이들이 문을 연 해다. 이 시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려면 잠깐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작명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사람 이름인 경우와 아닌 경우. 브레게가 전자, 위블로는 후자다. 사람 이름이 브랜드인 경우는 또 한번 둘로 나뉜다. 한 명이냐 두 명이냐. 브라이틀링은 사람 한 명이 시계를 만든 경우에 속한다. 브라이틀링을 처음 만든 사람은 1860년에 태어난 레옹 브라이틀링이다. 그는 시계 산업으로 유명했던 서부 스위스 쥐라산맥 지역의 상티미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네살 되던 해에 자기의 이름을 딴 시계 브랜드를 만들었다. 브라이틀링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스위스는 작은 미국과 비슷해요. 26개의 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쓰는 말이 다를 뿐 아니라 같은 언어를 써도 억양이 완전히 달라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쥐라산맥 인근에서 스위스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샤프하우젠에서 시작한 IWC는 굉장히 특이한 경우다. 젊은 레옹 브라이틀링 역시 여기서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의 시계를 지금의 번쩍거리는 사치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당시 시계는 최첨단 계측 기기였다. 초기 올림픽에서 세계 기록을 재는 시계는 모두 지금 눈으로 보면 아주 아름다운 기계식 시계다. 지금은 파스타 한 접시 값이면 사는 카시오 디지털 손목시계에도 스톱워치 기능이 있지만 경과 시간을 재는 건 보통 기술이 아니었다. 지금 아주 흔해졌을 뿐이다. 크로노그래프는 구조도 복잡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크로노그래프 제작법에 따라 복잡한 시계를 의미하는 ‘컴플리케이션 워치’의 범주에 크로노그래프를 넣는 사람도 있다.

이때의 브라이틀링은 기술 기업이었다. 브라이틀링도 크로노그래프로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다. 레옹 브라이틀링은 1900년대 초반부터 회중시계형 크로노그래프를 만들었다. 1900년대 초반은 남성용 시계가 조끼 주머니 안에서 손목으로 넘어가던 때다. 1915년의 브라이틀링 손목시계는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달아준다는 느낌의 얇은 가죽 스트랩이 달린 손목시계형 크로노그래프가 있다. 우리가 아는 브라이틀링 손목시계는 1940년대부터 나왔다.

이때의 내비타이머는 진지한 계측기였다. 슬라이드 룰 시스템을 당시 사람들은 정말 컴퓨터처럼 썼다. 흔히 기계식 시계의 기능을 이야기하다 보면 ‘요즘 그런 시계 차고 비행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들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반면 그때는 정말 그 시계를 차고 하늘을 날았다. 브라이틀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공군에게 시계를 납품하기도 했다. 예물의 명가 오메가도 그때는 군납을 했다. 20세기 중반은 그런 시대였다.

브라이틀링 로고에도 이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가 묻어 있다. 브라이틀링의 초반 로고는 그냥 영문 필기체였다. 날개와 닻 로고는 영국 해군 비행기에 납품했다는 이력에서 비롯됐다. 군납이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때도 브라이틀링은 항공과 밀접한 관계였다. 미국 항공기 소유주 조종사 협회(AOPA)가 1956년부터 브라이틀링을 공식 시계로 선정했다. 브라이틀링과 파일럿과의 연관성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좋은 시절이 있으면 나쁜 시절도 있는 법이다. 브라이틀링 가문이 브라이틀링을 계속 소유하지는 못했다. 시계업계 대부분을 무너뜨린 쿼츠 무브먼트의 보급 때문이었다. 브라이틀링 역시 이때를 견뎌내지 못하고 회사를 판매했다. 그래도 좋게 보면 한 가문이 3대나 갔으니까 오래간 편이다.

그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스위스 고가 시계업계는 기능적으로는 밀렸어도 손재주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숙련된 기계 제작 기술에 마케팅과 스토리텔링을 더하면 계측기가 귀금속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의 현대의 연금술과도 같은 마법의 공식,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 공식을 바로 찾아낸 건 아니다. 모든 브랜드가 답을 찾아 헤맸다. 과도기에는 원래 흥미로운 물건이 나온다. 브라이틀링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무드먼트를 끼우고 슬라이드 룰 시스템을 남겨둔 내비타이머도 있다.

지금의 내비타이머는 그 시대적 가치에 충실한 고급 시계다. 기능이 장식이 될 수 있으며 정밀성 자체가 귀금속의 가치가 될 수 있다는 세계관에 근거한 물건이다. 무형의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이 있다. 브라이틀링 특유의 압도적인 광택, 크기, 그리고 다이얼의 디테일이다.

브라이틀링 특유의 광택은 내비타이머를 다른 시계 중에서도 돋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소다. 도색하지 않을 경우 보통 시계의 표면 처리 방식은 크게 둘이다. 붓질한 듯한 브러싱과 거울처럼 반짝이게 만드는 폴리싱이다. 보통 브랜드는 폴리싱과 브러싱을 적당히 섞어 자신만의 입체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 브라이틀링은 내비타이머의 경우엔 거의 모든 부분에 폴리싱 처리를 한다. 금속 거울 수준으로 반짝거리는 폴리싱이다. 무인도에 조난당했을 때 브라이틀링의 반사광을 잘 쓰면 지푸라기에 불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는 근본적으로 커서 잘 보이기도 한다. 손목시계는 점점 커지는 추세다. 흥미롭게도 특정한 시간 대비 자동차의 사이즈가 커진 비율과 기계식 시계의 지름이 늘어난 비율은 크게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평균 신장과 체중이 반영된 결과라서일까? 하지만 항공 시계는 원래 컸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도 쉽게 크라운을 조작하고 크로노그래프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다. 파일럿의 비행 조건이 달라진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다. 조선이 망했지만 명절에 궁궐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다이얼의 디테일은 몇 번을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은 내비타이머의 얼굴이다. 파일럿의 전통을 말하지만 이 시계의 본질은 귀금속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디테일의 시작은 입체적 구조다.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돌아가는 부분은 약간 파여 있고 거기는 미세한 동심원 음각 장식이 들어간다. 10개의 바 인덱스 역시 그냥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폴리싱 처리한 스틸 바가 붙어 있는 형태다. 그 아래로는 역시 날개의 주름까지 음각으로 재현된 금빛 브라이틀링 로고가 붙어 있다. 유광과 무광, 굴곡과 입체, 이런 요소가 모여서 시계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인상을 준다.

1940년대 버전의 초기 내비타이머는 지금의 내비타이머와 사뭇 다르다. 초기 내비타이머의 다이얼은 모두 다이얼에 색칠한 것이다. 폰트도 손으로 쓴 게 완연해 보인다. 여기에도 나름의 운치와 멋이 있지만 지금 것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칠판과 컴퓨터 모니터 정도의 차이가 난다. 또 하나 비교 대상은 똑같이 생긴 진(Sinn)의 903이다. 브라이틀링의 주인이 바뀔 무렵 독일 시계 회사 진으로부터 투자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진은 브라이틀링만의 슬라이드 룰스를 비롯해 모든 디자인 요소가 거의 흡사한 903을 아직 합법적으로 제조하고 판매한다. 둘은 가격 차이가 두 배쯤 나는데, 세공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시계는 귀금속 중 가장 무거운 편에 속하며 압도적으로 혹독한 환경에 놓인다. 금속에 치명적인 물이 닿을 일이 별로 없는 목걸이나 손가락에 끼는 반지와는 다르다. 무브먼트의 정확도부터 방수성과 착용감까지, 다른 귀금속에 비해 신경 써야 할 부분의 범위 자체가 다르다. 고급 시계는 무게와 무관하게 착용감이 좋은 편이다.

브라이틀링 시계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브라이틀링의 브레이슬릿은 7개의 쇠로 연결되어 다른 브랜드에 비해 구동 범위가 넓다. 다른 브랜드는 쇠 3개로 시계 브레이슬릿을 짜는데, 번쩍거리는 폴리싱 처리를 거친 7개의 쇠로 브레이슬릿을 짠다면 아무래도 시계가 비싸진다. 공정뿐 아니라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다. 측면에서 보면 내비타이머의 러그는 눈 쌓인 소나무 이파리처럼 부드럽게 처져 있다. 러그의 각도와 구동 범위가 넓은 브레이슬릿이 합쳐져 시계를 감았을 때 착 감기는 느낌을 준다. 이게 잘 구현되지 않는 시계는 규격이 잘 안 맞는 볼트와 너트처럼 잘 안 감기는 느낌이 든다.

기계식 시계는 아주 가볍고 작은 제한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분야다. 내비타이머가 시계 중에서 커 보인다고 했지만 이 시계 역시 지름이 43mm에 불과한 초소형 기계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아주 작은 부분을 바꿔도 확 티가 난다. 시계를 만드는 측의 어려움이자 시계를 즐기는 측의 묘미다.

브라이틀링은 세 세기에 걸쳐 적당히 성공적으로 변하며 살아남았다. 계측기 제조사에서 고급품 제조사로 탈바꿈했다. 주요 고급 시계 브랜드가 그룹의 일원으로 재편되는 동안에도 고집스럽게 개인 회사라는 특징을 유지했다. 고집을 부리는 동시에 타협하고, 어떤 부분을 확실히 포기하는 대신 다른 부분을 확실히 가져갔다. 그 끊임없는 협상의 결과가 지금의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다. 1884년부터 2017년까지 끝없이 협상하고 개선했지만 브라이틀링은 원래부터 존 트라볼타와 함께했던 것처럼 한결같아 보인다. 늘 개선하되 ‘이게 우리다’라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브라이틀링을 비롯한 장수 시계 회사의 노하우다. 우리가 이 비싼 시계를 갖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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