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도시 런던

런던에서 처음 맞닥트린 것은 부슬비였다. 잔뜩 흐린 날씨에 간헐적으로 내리는 부슬비는 체류 내내 런던을 적셨다. 이상한 것은 런던 시민들은 웬만해서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런던에서는 소나기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신 오는 듯 마는 듯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가 대부분이라 우산을 쓰기에도 애매하다. 개버딘 소재의 트렌치코트가 영국의 대표 패션 아이템이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런 날씨 탓이다. 하지만 이런 궂은 날씨가 런던을 더욱 런던답게 한다. 음습한 겨울 날씨가 셜록 홈스의 트레이드마크인 프록코트를 입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런던 패션 위크 내내 트위드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런던 거리를 종횡무진 휩쓸고 돌아다녔다.

런던 사람들은 우울한 날씨 탓인지 유머가 일상화돼 있다. 이웃해 있는 고딕 양식의 타워 브리지와는 달리 런던 시청도 존재 자체가 유머다. 건물 모양이 삶은 달걀을 슬라이스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깨진 달걀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런던 시청의 별칭이 유리 달걀(The Glass Egg)이다. 관청으로서 권위는 물론 도시의 유구한 역사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시민에게 편하게 다가가기 위함이다. 유리 파도 모양의 서울 시청도 이를 흉내 내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런던 시청에서는 위트가 느껴진다.

시청에서 템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런던아이(대회전 관람차)와 마주치게 된다. 런던 시청보다 더 생뚱맞은 구조물이 바로 이 런던아이다. 원래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5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운행할 예정이었으나 이제는 영구적 런던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혔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를 알렸던 런던의 역사성에 견주어 런던아이는 민속촌 속 놀이동산처럼 이질적이지만 런던 사람들은 런던아이를 랜드마크로 받아들였다. 런던이 다른 유럽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당히 개방적이며 옛것과 새것이 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런던아이에서 웨스트민스트 다리에 들어서면 빅벤과 국회의사당의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런던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걷다 보면 총리 관저가 나온다. 구중궁궐 속에 위치한 채 접근이 통제된 우리나라 청와대와는 대조적이다. 다우닝가 10번지 대로변에 영국 총리 관저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는 국민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총리와 국민과의 물리적 거리가 이처럼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상대적으로 청와대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국민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나는 다우닝 1번가를 지나 내셔널 갤러리, 피카디리 서클, 코벤트 가든을 거쳐 대영박물관까지 걸었다. 부러웠던 것은 내셔널 갤러리와 대영박물관의 관람이 무료란 사실이다. 우선 2300점의 유럽 회화를 소장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와 세계 최대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대영박물관의 규모에 압도당했다.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의 3분의 2가 기증품이라는 점에 다시 한번 놀라웠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의 갤러리를 관람하면서 700만 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 중 상당량이 전리품이거나 약탈한 것이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인은 대영박물관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약탈된 자국 유물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심정은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한때 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오만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도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프랑스로부터 되돌려받기 위해 외교적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런던은 영국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담고 있는 타임캡슐과도 같은 도시다. 런던은 해리 포터가 걸어 다니고 비틀스가 노래하며 <레 미제라블>이 사철 공연되는 콘텐츠의 도시다. 운이 좋으며 셰익스피어와의 만남도 가능하다. 런던 패션 위크 기간 6일 동안 나는 런던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앞으로 틈나는 대로 런던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패션으로, 인문학으로, 아니면 문학으로. 영국은 그야말로 네버엔딩 스토리의 콘텐츠 강국이다.

편집장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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