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프라하의 기억

‘프라하’ 하면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프라하’ 하면 전도연을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세대 간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간극이 크다. 전도연이 출연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프라하의 관광 명소를 배경 삼아 삼류 멜로를 게워내듯 이어가고 있었다. 제작된 지 10년도 더 된 드라마를 지금에서 다시 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국경선을 넘나드는 기나긴 버스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보기 시작한 <프라하의 연인>은 김민준의 오글거리는 연기가 극에 달할 즈음 일시 정지 상태로 멈춰 섰다. 드디어 프라하에 도착했다는 신호다. 밀란 쿤데라가 인간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그토록 참을 수 없어 했던 바로 그 프라하 한복판 속으로 나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프라하의 첫인상은 그리 밝고 경쾌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번갈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프라하 시민들의 표정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자살 방지 철책이 둘러쳐진 자유의 다리를 통해 자본주의에 적응 못 한 노년층의 비애가 느껴졌고, 관광객과 소매치기가 서로 뒤엉켜 치열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카를교는 녹록지 않은 체코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프라하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인간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역설적이게도 삶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졌다.

프라하에서 마주하게 되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어딜 가나 한국 관광객으로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예가 바로 한글 안내판이다. 프라하 공항에서부터 한글이 눈에 띈다. 공항 안내판은 영어, 체코어, 러시아어, 한국어 네 나라 언어로 병기돼 있다. 우리를 기죽게 했던 중국어와 일본어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프라하에서 맛본 김치찌개가 최근 내가 경험한 김치찌개 중 가장 맛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프라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점령당한 듯 보였다. 그것도 한결같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아웃도어 웨어)을 입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해외 단체 관광객 중에서 한국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너무도 쉽다. 바로 등산복이다. 프라하의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로 등산복 차림의 한국 관광객이 단체로 몰려다니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죽하면 일부 여행사에서는 등산복 차림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을 출발 전 관광객들에게 보낼 정도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아웃도어 브랜드의 마케팅 승리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산에 갈 때나 입는 등산복을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TPO 측면에서 보자면 프라하 같은 유적 관광지에서 등산복은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입기 편하고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등산복만을 고집한다기보다는 거기에는 민족의 정체성 같은 것이 개입돼 있지 않나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단적으로 등산복에 집착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등산복 옹호주의자들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악 지역인 대한민국 특성상 등산복의 일상화는 너무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많이 걸어야 하고 땀도 많이 흘리는 여행길에 등산복은 최적의 선택이라는 것. 비록 알록달록 촌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가격대가 꽤 비싼 편인데 착용하기 편안하고 활동성이 좋은 등산복을 왜 남의 눈치를 보며 입어야 하느냐는 반박도 일견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보다 세련된 패션 감각을 지녔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개성에 따라 스타일을 달리하는 게 정답이다.

프라하는 파리와 부다페스트에 이어 유럽의 3대 야경을 자랑하는 도시다. 유럽은 대부분 서머타임을 적용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날이 저문다. 저녁을 먹고 한참을 기다린 후 야경을 감상하기 위하여 구시청사 천문 시계탑 꼭대기 망루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 때문에 탑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역시 부지런한 한국 관광객들이 이미 탑 망루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두 셀카봉을 하나씩 들고 프라하의 시내 야경을 찍느라 자리다툼도 치열하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프라하 사랑이 남달랐을까?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프라하를 경유한 동유럽 여행이 인기다. 서유럽에 비해 여행 경비가 저렴한 것도 이유가 되지만 동구권 국가들이 과거 공산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관계로 중세 유럽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프라하의 야경은 정말 볼만하다.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만했다.

짧은 여행 일정 탓에 프라하는 대표적인 관광지만 둘러봤다. 그래도 참 많이도 걸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치마 입은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퍼포먼스를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고,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쟁취한 역사의 현상인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의 미래를 엿보기도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프라하를 떠나면서 문뜩 전도연의 <프라하의 연인>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터프한 형사 김주혁은 결국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프라하에서 우연히 만난 대통령의 딸 전도연, 아니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윤세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프라하의 연인>의 작가와 <태양의 후예>의 작가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그 드라마가 달리 보이기도 했다.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프라하를 낭만적으로 재탄생시켰다.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인 나에게 프라하는 자유를 갈구하는 혁명의 도시일 뿐 멜로 따위는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직접 여행을 통해 만난 프라하는 김은숙 작가의 <프라하의 연인>만큼이나 달콤 쌉쌀한 맛으로 다가왔다. 혁명은 역사가 되었고, 자유는 현실이 되어 낭만을 품고 있었다.

편집장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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