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다. 청와대를 도망치듯 떠났다. 박근혜 정권은 끝났다. 겨우내 광화문광장을 지켰던 촛불 민심의 승리처럼 보인다. 아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는 어차피 올해 말까지였다. 촛불 민심이 원했던 게 고작 대선을 반년 일찍 치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탄핵 인용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법 처리가 전략적 목표라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정권 교체가 진짜 목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는 박근혜로 상징되는 박정희 신화를 지워내는 게 최종 목표가 돼야 한다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국민이 집단행동을 통해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는 측면에서 촛불 집회는 분명 혁명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성공한 혁명은 4·19와 6월 항쟁에 이어 세 번째다. 그런데 앞선 두 차례의 혁명은 단순히 최고 권력자를 축출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1960년 4·19의 결과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모든 혁명은 혁명의 성과가 성문화될 때 끝이 난다. 영국의 명예혁명도 프랑스의 대혁명도 미국의 독립혁명도 마찬가지였다. 광화문 촛불 혁명의 최종 목적지도 개헌이어야 하는 이유다.

대선 판도를 흔들어보려는 정략적 개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을 리셋할 개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같아선 5월 9일 대선에서 선출될 신임 대통령도 실패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의회 권력은 분산돼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해도 ‘여소야대’란 말이다. 한국 정치에선 여소야대만큼 위태로운 상태도 없다. 10·26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3당 합당도 여소야대가 만들어낸 야합이었다. 노무현 탄핵도 여소야대 정국이라 가능했다. 박근혜 탄핵 역시 지난해 4·13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형성됐을 때 이미 예고된 파국이었다. 이대로라면 5월 대선 이후에도 정국은 시계 제로 상태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대연정 얘기가 자꾸만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작 대통령 중심제인 현행 헌법상으론 연정은 불가능하다. 승자 독식 권력 구조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나눌 필요가 없는 헌법 아래에서 권력을 나누고 반대파에 귀 기울이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박근혜 정권이 집권 기간 내내 불통이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 정파간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하는 협치 개헌을 하지 않고는 국가의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촛불 혁명이 정치권에 마땅히 요구할 최대치의 목표다. 협치 개헌을 통해 권력 분산을 성문화해야 한다.

2017년 4월호는 편집장으로서 만든 첫 번째 <에스콰이어>다. 첫 번째 편집장의 글을 정치 칼럼으로 만들어버린 이유가 있다. “잡지는 편집장의 책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랜 시간 잡지업계의 좌우명처럼 회자된 말이다. 적어도 앞으로의 <에스콰이어>는 편집장만의 책이 아닐 것이다. 편집장 혼자 만기친람하는 잡지의 시대는 끝났다. <에스콰이어>는 에디터 개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조직이 될 것이다. 그러자면 편집장의 권력을 과감하게 나눠야 한다. 편집장은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건 무한한 소통이다. 에디터 개개인이 의사 결정 과정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 것이다. 우선 위정자 같았던 편집장의 위상부터 스스로 낮출 것이다. 편집장은 직무이지 직위가 아니다. 여러 에디터 중에서 조금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이다. 직위에만 집착하는 대통령이 의전 대통령으로 전락하듯 직무와 직위를 혼동하는 편집장은 편집부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 대한민국만큼이나 <에스콰이어>한테도 협치와 분권이 화두란 말이다. 이번 편집장의 글은 편집부 모두의 이러한 요구를 <에스콰이어> 지면을 통해 성문화한 것이다.

2017년 봄, 대한민국과 <에스콰이어> 모두 변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양쪽 모두 변화의 방향과 목적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권력자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이며 <에스콰이어>는 편집장의 잡지가 아니라 에디터 모두의 매거진이다. 이것이 시대정신이다.

편집장 신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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